[ACT! 135호 Me, Dear 2023.05.30.]
그리운 철새들을 떠올리며
로새
“여보세요?” 고요한 사무실에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영화제 스태프 처우 조사를 위한 설문조사를 한다고 한다. 보통 같으면 죄송하다 하고 끊었을 텐데, 몇 분 정도 걸리는지 물었다. 그날 사무국 복도에서 1~5 사이의 숫자를 외치고 있는 내 모습이 뭔가 웃기기도 어이가 없기도 했다.
기대와 희망
내 첫 영화제는 해외에서였다. 영화의 영자라고도 몰랐지만 일만 구할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마음이었던 그때. 워킹홀리데이로 한국을 떠나기 전 내한 공연 백스테이지 업무를 했던 걸 살려 겨우 영화제 인턴 일을 구했다. 영화제에 참석하는 게스트를 초대하는 초청팀 Guest Department에 들어갔다. 우리 팀에는 나를 비롯해 스페인, 덴마크, 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있었다. 각자 적어도 70여 명이 넘는 게스트를 담당하며 이메일과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인사, 호텔 스케줄링, 항공편, 그리고 각자 참석해야 하는 일정 등을 안내하고 특별히 챙겨야 하는 게스트의 경우 더 꼼꼼하게 연락했다. 세계 각국에서 영화제를 위해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오는구나 싶었다. 지금 돌아보면 처우가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언어에서 발생하는 위계관계가 없었기에 뭔가 필요하거나 요구하는 것을 편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화제가 다가올수록 사무실에 오래 남아 업무를 했는데, 팀별로 방이 따로 있어 힘들 땐 우리끼리 음악도 틀고 노래도 부르곤 했었다. 영화제가 이런 곳이라면… 뭔가 계속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점점 뾰족해지는 마음
영화제가 끝난 후 다음 영화제가 열리기까지 1년을 기준으로 하면, 초청은 상시 필요한 직무는 아닐 것이다. 당해 개막작과 상영작이 정리가 되는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입사하면 가장 먼저 몸풀기로 매달 이 시기에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그림을 그려보는 일을 했다. 초청은 프로그램이나 운영처럼 눈에 잘 보이진 않지만, 빵꾸가 나면 티가 너무 잘 났다(그래서 나는 영화제 기간 전화가 울리지 않는 날이 좋았다). 초청도 어찌 보면 숙련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연차가 쌓일수록 노하우도 조금의 여유가 생기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휘몰아치는 영화제 안에서 언제나 마감을 맞추는 게 쉽지는 않다. 특히 영화제의 규모가 커질수록, 업무 분화가 세밀하게 돼 있지 않는 곳일수록, 한 명이 감당해야 할 업무량이 상당하다. 그러다 보면… 밥 먹듯이 야근하는 동료들이 생긴다.
나는 연차가 그렇게 쌓인 편도 아니었는데도 스태프 중에 중간에 속해있었다. 그러니까 영화제에 중간층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보니 처음 근무하는 친구들에게 지우는 짐이 상당히 무겁게 느껴지는데, 그들이 의존해야 하는 자료는 작년, 재작년의 철새가 남긴 폴더와 결과보고서, 인수인계 기록들이다. 이마저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으면 창조 업무를 해야 하는데 정말 일만 하도록 뽑은 짧은 시간에 그 자료를 소화하고 일도 해야 한다. 잘 마치면 다행이지만 업무를 익히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경우, 한 사람이 자기의 양을 하지 못했을 때 다른 사람이 부담해야 하는 일의 양이 많아진다. 뭔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일 경우 재촉하지 말자, 화내지 말자 마음을 다잡다가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얘기할 때면 속이 탄다. 그렇게 영화제가 다가올수록 점점 뾰족해지는 내 마음을 보는 게 어려웠다.
보통 한국의 영화제, 특히 규모가 있는 국제영화제의 경우 자부담으로는 축제가 돌아가지 않고 영화진흥위원회, 시/도 지원금으로 주로 인건비와 사업이 굴러간다. 돈을 받는 입장에서는 일정 부분 고려를 해야 하는 사항도 있겠지만, 그들의 입맛을 맞춰야 한다는 이유로 실무자의 부담이 늘어날 때도 있다. 없던 사업이 갑자기 생기기도, 바뀌기도 한다. 특히 시도에서 나오는 어떤 주무관은 영화제 공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반말과 손가락질을 하곤 했다. 팀장급도 그렇게 대하는데, 비교적 어린 스태프에게는 말하지 않아도 그려진다. 어디를 가나 권력을 부리는 사람은 있다지만 한 줌 영화제 안에서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바쁘니까 그만해달라고 외치고 싶었다.
물론 결과보고서와 소회 나눔에서 스태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변화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도 기존에 영화제를 운영하던 사람들이 바뀌면 다시금 말짱 도루묵 되기도 한다. 그렇게 매년 영화제에 발전이 없냐는 욕받이 대잔치가 열리는데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매년 같은 실수는 조금 완화되더라도 반복되고 있는 게 아닐까. 영화제는 여전히 신진/기성 감독에게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중요한 곳이자 반가운 얼굴들과 소회를 푸는 자리기도 하지만 언제까지고 영화제에 기대를 품고 온 신규 직원들의 피땀눈물로 연명할 수는 없다.
현장의 변화는 결국 구성원의 관심으로부터
영화제를 그만두자고 결심했던 즈음, 새롭게 일을 구하려고 하는데 면접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죄다 짧게 일한 경력밖에 없는데 적응을 못 하는 게 아닌가요, 어떤 인격적 결함이 있는 건 아닌지” …황당했다. 물론 이력서만 보면 4개월, 3개월, 4개월… 이러다 보니 밖에서 볼 때는 어느 한 곳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구나. 영화제나 치고 빠지는 직종에서만 일하다 보니 별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밖을 나가니 보였다. 영화제 스태프는 영화계 스태프도 아닌, 프리랜서라 하기도 애매한 그 어느 지점에 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단기계약의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여겨진다. 추가근무수당 미지급 건을 계기로 잠시 이뤄졌던 영화진흥위원회 영화제 스태프 처우 조사는 2020년 12월을 보고서를 끝으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다큐멘터리 매거진 도킹에 ‘영화제 Paradiso’라는 코너에서도 도대체 이 상황에 해답이 있는 걸까? 라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한다. 나도 비슷하다. 이제는 예전처럼 열정과 애정만으로 팍팍한 하루를 헤쳐 나가기는 쉽지 않다. 적어도 영화제를 애정하는 사람들이 계속 머물 수 있도록, 영화제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먼저 그들의 처우를 이해하고 의논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욕하고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 선언해도 영화가 좋고, 거기서 오는 보람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라 지원서를 쓰던 지난날들이 생생하다. 이제는 관객으로 참여하면서도 영화제 뒤에서, 관객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며 영화제를 쌓아 올리는 얼굴들이 먼저 보인다. 지금도 힘들지만 여전히 영화제를 돌며 좋아하는 일을 이어가는 영화제의 친구들도, 영화는 글렀다 싶어 영영 떠나버린 나의 친구들도, 이제 영화제는 아니지만 영화산업에서 함께하는 친구들도. 영화제라는 공간이 단순히 영화인과 관객뿐만 아니라 영화제 구성원들도 잘 품어주길 바라며… 사랑하는 철새들이 어디서든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글쓴이. 로새
영화제를 떠도는 철새였다가 현장의 목소리가 궁금해져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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