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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다 원해 - 정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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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3. 3. 1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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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34Me.Dear 2023.03.30.]

 

전부 원해

 

정여름 (IW31 활동가)

 

 

 ‘외국인보호소 폐지를 위한 물결 International Waters 31’(이하 IW31) 활동 경험을 옮길 언어가 부족하여 말을 아껴왔다. 일여 년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결여가 보충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엉킨 실타래를 찬찬히 풀어 본다. 손가락에 감긴 실로 형편없는 뜨개를 한다. (사실 원고료가 필요하여 청탁을 받아들였다. 부끄럽지만, 출발점을 밝혀 둔다. IW31과는 전혀 무관한 글이 될 가능성이 있다)

 

 체류 연장 조력을 하러 가는 날은 언제나 긴장 상태다. 출입국이 문을 여는 시간에 딱 맞추어 가야 한다. 삼십 분만 늦어도 수 십 명이 번호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출입국은 체류민원사전방문예약제로 운영된다. 방문 전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 한국어로 제작된 홈페이지에 주민등록번호나 외국인등록번호를 입력하면 된다. 그러나 난민 신청자는 외국인등록증이 없어 예약이 불가능하다. 당일 민원인을 받는 몇 안 되는 창구에서 내리 기다려야 한다. 만약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서류가 미비하거나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는 오늘을 날렸을뿐더러 벌금을 무는 처지에 이른다. 체류자격 연장은 기한 ‘마지막일’(비자가 끝나는 날)에만 신청을 받아 준다. 이런 적이 있다. 부동산 계약이 묵시적 갱신으로 자동 연장되었는데, 그에 대한 증거를 가져와야 처리를 해 준다는 것이다. 한두 시간을 기다려 받은 답변이었다. 건물을 나서자마자 집주인과 통화하고 택시를 잡았다. 거의 반쯤 실신한 상태였다. 리치(가명)[*주1] 덜덜 떠는 나의 손을 끌어와 주물러 주었다. 제일 긴장한 리치였을 텐데, 상황에 압도되어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못했다. 심장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는 와중에도 팔은 부드러운 악력에 속아 넘어갔다. 집주인은 이해가 된다는 전화로 하지 그랬냐고 핀잔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우리도 매한가지였다. 계약서 아래에 ‘1 연장함이란 글씨가 추가되었다. 헛웃음이 났다. 이따위 낙서가 한 사람의 삶을 좌우한다고? 재접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완전히 실성해버렸다. 지옥을 하나 상상했다. 일명 A4 지옥이다. 평생 종이 한 장 위에서 살아가는 벌을 받는다. 옆으로 기울거나 넘어지면 광선이 몸을 동강 낸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종일 쌓였던 분을 풀고자 망상했다. 문득 리치에게 누적된 분노는 어떨지 궁금했다. 나는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며 이런 느낌이냐 물었다. 리치는 전혀 아니라고 했다. 오른쪽 검지와 왼쪽 검지를 붙여 서로 기댄 형태로 걷는 동작을 했다. 분노 속에서도 함께 가기. 너무 다정한 방식이다. 깊숙한 곳에 확신이 생겼다. 리치에게 손가락질하는 이들은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손가락을 멀리 내미는 만큼 몸과는 거리가 생긴다. 그 여백이 차갑고 쓸쓸하므로, 서로를 껴안은 사람들이 부러워질 거다. 이건 확신이자 술법이고, 모두에게 권하는 근육이다.

 

 차례를 기다리다 보면 실패를 목도한다. 실패는 체류민원실을 바짝 얼어붙인다. 한국어나 영어 사용자가 아닌 경우에는 통과 자체가 운에 달렸기에 더욱 초조하다. 너그러운 직원을 만날 확률이 코앞에서 줄어든다. 준비 서류를 다양한 언어로 명시해 주면 상호 간 수고를 덜 텐데 어째서 조치를 안 하는지 의문스럽다. 한편으로 냉대하는 입장도 이해가 간다. 컨베이어벨트처럼 길게 늘어선 창구, 종이 무더기, 재빠르게 옮기고 찍어내는 환경에서 한 사람의 이야기를 진심 어리게 파고들 수 있을까. 그저 주어진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최소한 반말은 하지 말지, 한 번만 다시 설명해 주지⋯⋯.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에 M이 한 발언이 거듭 떠오른다. “나는 묻고 싶다. 과연 한국 정부가 나와 같은 이유로 미국이나 유럽 사람을 감옥에 가둘 수 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주2] 러시아 난민이 인천공항에 계류된 4개월, 외국인보호소의 기한 없는 구금, 체류민원실에서 서류 한 장이 통과되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시간. 달력은 떨어졌다고 말해야 할 때다. 하지만, 체류민원실에 앉는 순간, 변호하고 싶은 충동은 가다듬어진다. 조용히 고개를 숙여 손톱 거스러미를 떼어낸다. 활동을 하면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 한계를 체감하기 때문에. 한 사람만을 위해 말하고 있다는 것. 이기적이지만 절대적인 사랑의 방식에 죄책감이 든다.

 

 

▲ 2022년 4월 4일, 리치가 여름의 카메라로 찍은 물결

 

 

 리치한테 가장 좋아하는 책을 물어보았다. 성경이라고 했다. 나는 뭐라고 할지 고민하다가(설명이 가능한 말을 고르다가) 최근 영향을 받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리지외의 테레사의 일화였다. “그녀가 어린 소녀였을 때, 누군가가 여러 가지 성탄절 선물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말하자, 그녀는 이렇게 ㅡ 이 말은 응석받이의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가톨릭 논평가들은 그녀의 억누를 수 없는 영적 욕구의 표시로 해석한다 ㅡ 대답한다. 난 고르고 싶지 않아요. 난 다 원해요.”[*주3] 케이크, 포크, 커피를 일렬로 배열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 세 가지 있습니다. 아버지가 하나를 정하라고 했습니다. 테레즈 드 리지외는 말했습니다. 전부 다. 감동적이지 않아? 다 줘야 한다는 거. 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리치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따라했다. 이거 다 주세요. 맞는 말이다. 리치는 전부 가져야 한다. 당연히 거기엔 고통도, 절망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기분도 포함된다. 밑으로 향하는 기분까지 리치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리치 대신 여는 순간이 참 어렵다. 리치의 것인데 내가 먼저 이해할 때. 나만 이해할 때. 통역할 때. 통역해도 안 될 때. 결국 리치의 것이 내 것이 될 때. 앞으로 해야 할 활동이 막막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리치가 다 가지는 날까지 함께 하지 못할까 봐. 전부 줘야 한다. 다 주는 데에 걸맞은 시점은 없다. 지금 전부 줘야 한다. 특혜 마냥 보호일시해제, 체류 자격 연장 도장으로 생색을 낸다 한들, 들은 체 만 체하며 말하겠다. 자유권은, 노동권은, 건강보험은?

 

 IW31은 외국인보호소 폐지를 요구하는 직접행동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한다. 대면 조력, 구금시설 내 성소수자/HIV 감염인 인권 활동, 탈시설, 동물 해방, 성노동자 해방 행동 등 외국인보호소폐지운동은 많은 운동과 연결되어 있다. 사회가 분리를 조장하고 행정으로 낙인 찍은 자리 바깥의 존재들. 이들을 지워버리는 폭력은 취약성을 끌어내는 조건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한 함정은 ‘보호’라는 이름으로 은폐된다. 외국인보호소 개선이 아닌 폐지를 말하는 건 권력이 타고 흐르는 벽을 완전히 허물어버리기 위해서다. 전부 다 주기 전엔 아무것도 아니니까.  □

 

참고하면 좋을 곳

 - IW31 트위터 https://twitter.com/_IW31_

 - IW31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internationalwaters31/

 - IW31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JCTCinHIDC

 - [연대기금 후원]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ci4KSvKIkfu3R5jrAPj7GT4E1Zv86OzLsPyD6AwxBloAKN4g/viewform

 

 

*주

[1] 일화를 써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면서 원하는 가명을 물어보았다. 리치Rich로 정했다.

 

[2] 전문을 옮긴다. “내가 겪은 일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나는 자의적으로 구금되어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보호소를 나와서는 수많은 혐오발언과 마주쳐야 했다. 원인은 부정의한 법무부가 나의 명예를 훼손하는, 왜곡된 영상을 유포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접할 수 있는 최악의 경험은 부당하고 거리낌 없는 혐오에 놓일 때다. 나의 인격을 향한 혐오발언을 몇 가지 예로 들겠다. : 그냥 쏴죽이면 안 돼? 저런 놈은 죽여야 했는데. 저런 악질적인 범죄자의 인권을 보호할 필요가 있어? 나는 평생 감옥이라고는 가본 적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엄중한 경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감옥에 갇힌 나 자신을 발견했다. 단지 불법이민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몇 달 동안이나 노예처럼 취급당하고, 무자비하게 고문당했다. 나는 묻고 싶다. 과연 한국 정부가 나와 같은 이유로 미국이나 유럽 사람을 감옥에 가둘 수 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나는 지금 한국에 있는 아프간 어린이들이 그의 교육기본권을 박탈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럽연합과 서방 언론의 이중 잣대: 우크라이나 난민을 향해선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다른 한쪽에선 눈동자와 머리칼 색을 들어 아프간, 시리아, 이라크인 등을 취급하는 것을 보라. 세계에 전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다. : 이 세계엔 네오나치와 백인우월주의가 설 자리는 없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우리는 인종적 편견과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에 언제나 맞서 싸울 것이다. 인종차별과 모든 종류의 차별을 넘어 우리 모두가 인권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

 

[3] 엠마뉘엘 카레르, “왕국”, 임호경 옮김. p.111

 


 

필자소개. 정여름

와인 세 잔과 칼 열네 자루가 나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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