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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굴들을 보라 - <미싱타는 여자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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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2. 4. 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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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운동사의 모든 장에 여성 노동자들이 있고 우리는 이들의 투쟁과 연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군가의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모두 빚을 지고 있다. <미싱타는 여자들> 속 청계노조 여성 조합원들의 형형한 얼굴에게 우리는 모두 빚을 지고 있다."

 

[ACT! 129호 리뷰 2022.04.11]

 

이 얼굴들을 보라

- <미싱타는 여자들> 리뷰

 

강정원(영화제 노동자)

 

 

  지난 2,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 지도위원이 복직했다. 노조 활동을 이유로 부당 해고된 지 36년 만이다. 김 지도위원은 복직 연설에서 70~80년대에 함께 싸웠던 수많은 노동자를 호명했다. 그 중 청계피복공장도 있었다. 다큐멘터리 <미싱타는 여자들>은 이 청계피복 노동자,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다큐멘터리가 가진 전통적 특질 중 하나는 현장성이다. 과거와 동시대의 많은 다큐멘터리가 현장에 들어가 사건의 진행과 궤를 같이한다. 그렇기에 사건이 지나버린 뒤 뒤늦게 도착한 영화들, 현장을 직접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영화들은 이 곤란함을 해소하기 위해 대개 사건 당사자의 인터뷰와 회상, 또는 자료 등을 경유하여 현장성을 간접적으로 획득하곤 한다. 이 경우 사건이 그들의 구술을 통해 힘을 얻는다.

 

▲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출처: 영화진흥위원회 DB)

 

  <미싱타는 여자들> 또한 여러 겹의 인터뷰와 자료들로 구성된 영화로, 앞서 서술한 다큐멘터리의 보편적 구성 방식을 따른다. 이곳에 더 이상 청계노조의 물리적 공간도 시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과거를 불러오기 위해 이보다 적절한 방법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특별함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영화는 사실 앞서 이야기한 여타 다큐멘터리들처럼 과거의 특정 사건을 복원하는 것에 관심 있지 않다. 이 영화가 관심 있는 것은 인터뷰이의 존재이다. 많은 다큐멘터리가 어떤 사건을 소환하기 위해 인물을 경유하는 것과는 반대로, <미싱타는 여자들>은 오히려 등장인물들을 호명하기 위해 사건을 매개한다. 조직과 연대와 투쟁의 한복판에 서 있던 여성 노동자들. 가시화되지 않았지만, 이미 존재 자체로 시대의 증인이었던 사람들. <미싱타는 여자들>은 그렇게 주인공, 청계노조 여성 조합원들을 우리에게로 불러낸다.

 

  1970년대, 평화시장에 빽빽하게 들어선 크고 작은 피복 공장에는 밤낮없이 물량을 맞추며옷을 만들던 어린 여성들이 있었다.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3분 만에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가지 못하고, 그러고도 철야까지 하는 것이 당연했던 시기였다. 철야를 한 지 15일쯤 되면 까무룩 졸다가 바늘에 찔려 깼다고 했다. 이렇게 고된 노동을 마친 뒤에는 곧장 숙소로 돌아갈 법도 하건만 그들이 향한 곳은 노동교실이었다. ‘중등 교육 무료라고 적힌 팜플렛을 들고 찾아간 노동교실에서 처음으로 ‘7번 시다가 아닌 내 이름 석 자를 썼다. 수업에 열심히 나가 우수생이 되기도 하고, 조합원 교육이 있는 날이면 밥 담당을 자처해 새벽부터 김밥을 싸기도 했다. 조합원들과 비둘기 호를 타고 여행도 가고, 합창이나 꽃꽂이도 배웠다. 노동권 쟁취를 위한 모든 싸움도 노동교실에서 이루어졌다. 노동교실은 조합원들의 집과 다름없었다.

 

▲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출처: 영화진흥위원회 DB)

 

  노동교실에 대한 각자의 사적 회고에서 출발한 구술은 점차 그들의 공통 경험인 9·9사건(청계노조 노동교실 사수투쟁)으로 확장된다. 이때, 영화의 태도가 바뀐다. 주인공 개개인의 가시화에 집중하던 흐름이 9·9사건으로 이양돼 마치 주인공들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재배치되는 듯한 인상까지 든다. 이는 영화가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구술을 이전과는 다르게 시간순으로 정밀하게 배치하고, 짧아진 숏과 무거워진 음악 등으로 빠른 리듬을 만들어 몰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9·9사건을 묘사할지언정 스펙터클로 이용하진 않는다. 사건은 그저 짧게 통과된다. <미싱타는 여자들>에서 9·9사건을 건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청계노조 여성조합원들의 연대에서 이것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조합원들 외의 인물을 인터뷰하지 않고 9·9사건 외의 일을 다루지 않으면서, 그들에 주목하기 위해 구태여 외부에서 사람이나 사건을 끌어올 필요는 없다고 단호히 말하는 듯 하다.

 

▲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출처: 영화진흥위원회 DB)

 

  이러한 구조가 성립 가능한 이유는 이숙희 선생의 회고 속에 신순애 선생이, 신순애 선생의 회고 속에 임미경 선생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들은 그들의 존재 자체로 서로의 증인이 된다. 되돌아가서, <미싱타는 여자들>은 인물을 소환하는 영화다. 영화는 이미 초반부에서 색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시퀀스를 통해 그들을 사건의 배경이 아닌 독립된 개인으로 불러온다. 그 색을 이용해 그려진 초상화와 얼굴 사진을 오버랩 시킬 때 영화는 이 얼굴들을 잘 보라는 듯, 시간을 들여 숏을 붙잡는다. 그들이 자신의 과거 사진과 마주하는 마지막 장면에 도달할 때까지 영화는 끊임없이 미싱탔던 여자들을 호명한다.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존재는 오랫동안 가시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동맹 파업과 아사 투쟁을 했던 양말·고무신공장 노동자도, 한국 최초의 고공 농성을 한 노동자도 여성이었다.(*1) 유신 정권 후퇴의 도화선이 된 YH무역노조의 신민당 점거 농성도 여성 노동자들이 주축이었다. 이소선 선생과 김진숙 지도위원, 김미숙 이사장과 같은 이름들 또한 여전히 곁에 있다. 한국 노동운동사의 모든 장에 여성 노동자들이 있고 우리는 이들의 투쟁과 연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군가의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모두 빚을 지고 있다.’(*2) <미싱타는 여자들> 속 청계노조 여성 조합원들의 형형한 얼굴에게 우리는 모두 빚을 지고 있다.

 

 

*

1) 안재성, 한국노동운동사, 삶이 보이는 창, 2008

2) 황정은, 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


글쓴이. 강정원

불안정 고용에 시달리는 영화제 노동자. 이 영화제와 저 영화제를 부유하고 있습니다. 사진 속 초미모만두보들조랭이찔빱곤듀고양이 이름은 수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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