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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의 정교한 설계를 검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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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2. 1. 1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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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이 글은 2021년 12월 7일부터 2022년 1월 4일까지 미디액트에서 진행된 강의 ‘한 편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분석해보기’의 수료작입니다.

 

 

<기생충>의 정교한 설계를 검토하며 

 

안병진

 

 

<기생충>은 세 개의 스테이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짤막한 인트로와 에필로그를 포함하면 총 다섯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트로에서는 기택 가족들을 소개합니다. 반 지하에 살고 있고 윗집 와이파이를 훔쳐 써야 할 정도로 곤궁한 경제 상황을 보여줍니다. 와이파이를 훔쳐쓰는 모습은 흥미를 끌기 위한 설정일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기생하며 살아간다는 전체 스토리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분석을 거쳐 오프닝이 작품 전체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충숙이 기택을 다그치며 하는 대사, “와이파이도 다 끊기고 계획이 뭐야?”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우가 면접보러 나설 때에는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수재민 대피소에서는 “그러니깐 계획이 없어야 돼” 라고 기택이 기우에게 했던 대사는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지만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계획”이라는 대사가 이렇게 슬며시 배치되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후에도 장면들 곳곳에 “계획”이라는 대사가 언급이 되는데 기우가 “다 계획이 있다”고 말하는 엔딩 장면을 보면서 시나리오가 얼마나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첫 번째 스테이지에서는 기택 가족의 위장 취업이 펼쳐집니다. 예기치 않게 수석을 들고 찾아온 민혁이 기우에게 자신이 교환학생으로 자리를 비울 동안 과외-동익의 딸 다혜의 영어 수업-를 맡아달라며 부탁합니다. 동익의 부인 연교는 기정의 도움을 받아 준비한 위조 서류들은 확인하지 않고 수업 참관으로 채용을 판단하겠다고 합니다. 기우는 예상 밖의 기세로 수업을 장악하며 “케빈 쌤”으로 채용됩니다. 이어서 온 가족이 ‘믿음의 벨트’에 따라 차례로 채용됩니다. 기정은 기우의 소개로 동익의 막내 아들 다송의 미술 치료 선생님, “제시카”로, 기택은 음흉한 작전을 벌여 윤기사를 몰아낸 기정에 의해 동익을 도울 노련한 기사로 채용됩니다. 그리고 가족 모두가 단합해 이 집에서 가장 오래 지낸 가사도우미 문광을 쫓아내고 충숙이 채용되도록 합니다. 

 

연교가 참관한 기우의 첫 과외 수업에서 “pretend”라는 단어가 언급되는데 사소한 듯한 장면에서도 영화의 테마를 심어둔 것을 확인하며 큰 환기를 얻었습니다. 이러한 대사들마저 그때그때에 맞춰진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두 번째 스테이지에서는 지하 벙커가 드러나고 동익의 집을 차지하기 위한 기택 가족과 문광 가족 간의 다툼이 벌어지는 등 첨예한 갈등 구도가 펼쳐집니다. 기택 가족은 동익 가족의 휴가를 틈타 동익의 집에서 한가로운 휴가를 즐깁니다. 이때 갑자기 문광이 찾아옵니다. 문광은 충숙의 도움을 받아 지하실 비밀 문을 열고 벙커로 내려갑니다. 한동안 끼니를 챙기지 못한 자신의 남편 근세를 찾아온 것입니다. 문광은 충숙에게 이따금 근세를 챙겨달라며 부탁합니다. 충숙은 이에 응하지 않고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문광을 협박합니다. 그러나 뒤에서 훔쳐보고 있던 기택, 기우, 기정이 발각되며 우세 국면은 순식간에 정반대로 뒤집어집니다. 휴가를 즐기는 쪽은 이제 문광 가족이 됩니다. 협박도 문광 가족이 기택 가족에게 합니다. 충숙은 이를 다시 역전시키기 위해 몸을 던지고 얼마간 두 가족 간의 육탄전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복숭아의 힘을 빌어 기택 가족이 문광 가족을 제압할 때 쯤 동익 가족이 돌아옵니다. 기택 가족은 문광 가족과 자신들이 어질러놓은 것들을 허겁지겁 수습하고 마치 자신들 집의 곱등이처럼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습니다. 동익 가족이 각자의 방에 들어간 틈을 타 바로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다송의 돌발행동 때문에 밤이 깊어지고 동익과 연교가 아주 골아떨어지고 나서야 이 집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됩니다. 도착한 집은 폭우로 침수돼 이들은 집이 아닌 대피소에서 잠을 청하게 됩니다.

 

<기생충>은 대부분의 장면이 '인지도의 비대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미치광이 같은 모습의 문광이 남편을 부르며 지하 벙커로 내려가는 장면이었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지하 계단을 처음 보았을 때 섬뜩한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인지도의 비대칭'이라는 구도를 극단적으로 밀어 붙이는 과정에서 이 지하 벙커는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세계의 실체를 의심스럽게 하고, 기택 가족이 아닌 우리를 그 음험한 지하실로 끌고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집으로 찾아와 지하 벙커로 내려가는 문광

 

세 번째 스테이지에서는 다송의 생일 파티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집니다. 연교는 다송의 생일 파티를 위해 기택 가족을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생일 파티가 시작되면 문광을 잃은 근세의 복수도 시작됩니다. 아니 다송의 생일 파티는 근세의 복수를 위한 무대라 해야겠습니다. 근세는 수석을 들고 내려온 기우를 해치고, 케이크 세레모니 중인 기정을 찌릅니다. 그러나 복수하려던 충숙에게는 제압당하고 맙니다. 죽음을 맞이한 그의 몸에는 케잌과 소시지가 들러붙어있습니다. 이때 차 키를 찾던 동익이 근세의 냄새를 역겨워 합니다. 그 모습을 본 기택은 갑자기 동익을 찌릅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유유히 사라집니다.

 

여기서는 두 번째 스테이지와 세 번째 스테이지를 연결하는 설계가 흥미로웠습니다. 근세가 유령처럼 등장하는 다송이의 트라우마 장면은 근세가 살인마처럼 나타나는 생일 파티와 이어지게 되고, 테이블 밑에서 다송의 트라우마 이야기를 듣던 기정은 생일 파티에서 ‘그 케이크’를 들게 됩니다. 치밀한 설계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장르적인 면모들이 눈에 띕니다. 짙은 어둠속에서 근세가 두 눈을 부릅뜨고 등장하는 장면은 공포영화를 보는 듯했습니다. 

 

아웃트로에서는 사후의 상황들이 설명됩니다. 기우와 충숙은 집행유예를 받았지만 기정은 결국 사망했고 기택은 행방불명인 상태입니다. 기우는 어느날 그 저택을 엿보다가 모스부호로 기택의 편지를 읽게 됩니다. 기택의 근황을 들은 기우도 아버지에게 보낼 편지를 씁니다. 돈을 벌 것이며 그 저택을 살 것이라는 계획을 적은. 그리고 첫 장면과 똑같은 장면으로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영화관에서 번이나 보았기 때문에 <기생충> 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분석 강의는 제가 놓친 점들, 모르고 있던 것들을 인지할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pretend( ~ 척하기)”, “계획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대사와 장면들이 얼마나 정교하고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탁월한 시나리오를 검토할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특히정보 처리라는 측면에서 <기생충> 사용되었던 여러 요소들-인지도의 비대칭을 이용한 몰입, 씨앗 뿌리기와 거두기 - 확인하며 봉준호 감독이 얼마나 뛰어난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지 다시금 느낄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썼던 시나리오는 통하지 않았을까, 무엇이 부족한 걸까, 항상 고민이었는데 오히려 정도로 정교하게 시나리오를 설계한 적이 있었나 하며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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