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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것으로부터 - <스탠더드 오퍼레이팅 프로시저 Standard Operating Procedure>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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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2. 1. 6.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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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ACT! 편집위원회에서는 다큐멘터리 창작자가 쓰는 다큐 리뷰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누군가 두고 간 가방 속 물건들이 두고 간 사람을 천천히 회고하는 것처럼 별안간 남겨진 기록은 고유의 분위기 혹은 시간성을 드러낸다. 나 또한 이미 지나간 시간과 사라진 사건들을 다루기 위해 그저 남아있는 것들로부터 시작했기에, 이 다큐멘터리를 선택하고 기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ACT! 128호 리뷰 2022.01.14.]

 

 

남겨진 것으로부터

- <스탠더드 오퍼레이팅 프로시저 Standard Operating Procedure>

 

이솜이

 

  가보지 못한 곳과 갈 수 없는 곳은 확연히 다르고 그곳을 가를 수 있는 경계는 모호하다. 남아있는 것은 대게 흔적이거나 흔적을 대변하는 물성을 띄고, 고이 저장된 각자의 시간들이 겹겹이 남아있다. 때문에 기록데이터들은 한 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장으로 시작되어 수천 수백만 장의 기록들로 연쇄되어 흔적이 기록되기 시작하는데, 이때 이 기록을 감행한 자들에겐 절차들이 생겨난다. 이 기록들을 하드 안에 영원히 남길 것인가, 내가 아닌 모두에게 보여줄 것인가. 이 다큐멘터리는 당시 이라크로 파병된 미국군이 찍은 사진들을 토대로 2003년 이라크 Abu Ghraib 아부 그라이브(Abu Ghaib) 수용소에서 일어난 수감자들의 고문과 학대에 대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2008년 다큐멘터리로 재구성되었으며, 당시 고문관이었던 미국군 인터뷰이들이 전면으로 드러난 구성을 보여준다. 한국에서 개봉되진 못했다.

 

 

▲스탠더드 오퍼레이팅 프로시저 Standard Operating Procedure 포스터

  <스탠다드 오퍼레이팅 프러시저 Standard Operating Procedure> 줄여서 <S.O.P>는 남겨진 사진들로 시작한다. 이 다큐멘터리의 오프닝은 작은 디지털카메라로 담긴 해가 저무는 광활한 일몰 풍경이다. 해가 저무는 풍경은 세계 어디에나 있지만 이라크라는 지명이 등장하자, 그 지역만의 장소성을 획득한다. 한 장의 사진을 떠올려 보라. 사진에 담긴 배경과 상황, 피사체는 그 사진 속 시간을 유추하게 하고 매개된 시간이 갖는 고유한 분위기를 마주하게 한다. 다큐멘터리 속 이 사건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은 자 사브리나(Sabrina Harman) 병사는 자신의 연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기록한다. 재밌다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이게 학대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 일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더 찍었어. 이런 일이 자행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어. 내가 여기에 있는 유일한 이유는 사진을 찍어서 미국이 그들이 생각하는 나라가 아니란 것 증명하는 거야그저 웃음으로 넘기려던 상황들이 사라지고 저 멀리서 수집 장의 사진들로 남겨진 것은 이 사건이 그저 재미로만 남을 수 없다는 반증이다. 각도를 조금만 달리하면 이 사회의 이면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처럼, 폭력이 자행되는 순간을 기록하는 동안 데이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의 이면을 직조하여 간접적으로 경험케 한다.

 

  누군가 두고 간 가방 속 물건들이 두고 간 사람을 천천히 회고하는 것처럼 별안간 남겨진 기록은 고유의 분위기 혹은 시간성을 드러낸다. 나 또한 이미 지나간 시간과 사라진 사건들을 다루기 위해 그저 남아있는 것들로부터 시작했기에, 이 다큐멘터리를 선택하고 기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S.O.P>는 남아있는 사진들로부터 군대가 갖는 공동체성에 대한 폭력성을 담아낸다. 영화 말미에 자발 데이비스(Javal Davis) 헌병대 하사는 말한다. 사진만 없었더라면 저나 다른 사람이 나올 일도 없고 충격적인 추문들도 없었을 겁니다. 조용히 지나갔을 거고 그걸로 끝이었겠죠.”

 

  내게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 그냥 조용히 사는 순간 자체를 지키고 싶은 날들, 구태여 사건과 서사로 만들지 않고 아무런 의식도 없이 아무것도 남아있게 하지 않는 완벽한 은둔 말이다. 당시의 나는 다큐멘터리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이미 남겨진 상처들을 긴 시간 공들여 기록했던 순간이 무감각하게 되어 작업이 중단되었기에, 1년 반을 기록했지만 서사화 되지 못한 채 맥없이 축 처져가는 타임라인들. 이제는 더 이상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얼굴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를 오랜 시간 마주하고 있으니, 남겨진 기록물을 가지고 자신의 언어로 끊임없이 진술하고 있는 인터뷰이들의 집념이 마음에 남았다. 이 작품을 통해 그들 스스로 말하고자 했기에 사건이, 폭력이, 공동체가 만들어낸 잔혹함이 호명된 것은 아니었을까. 나의 언어로 사건을 다시 바라보는 것, 그리고 영화의 언어를 통해 서툴게나마 그 순간들을 현실 속에서 발화하는 것이 은둔자의 윤리보다 더 긴요한 것이 아닐까. 잠시 멈춰 두었던 다큐멘터리 속 인터뷰이들을 다시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솜이 소개

 

시간과 시간을 엮으며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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