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의 존재 사실을 이해는 하지만 가시화는 하지 말라는 요구, 성소수자의 억압과 차별적 상황을 알고는 있으나 그 구조를 전복하기 위한 노력은 나중으로 미루려는 입장들, 성소수자가 겪어야 하는 고통은 동정의 대상일 뿐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 상상하지 않으려는 태도들을 넘어서기 위해서 우리는 비비안님과 나비님이 겪고 있는 모험의 여정에 동참해야 한다. ‘너에게 가는 길’이 완성하고자 하는 모험의 결론은 ‘너에게 가는 길’이 단지 성소수자 당사자들만의 길이 아닌, 또 그 곁을 지키는 이들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여정이 되어야만 한다는 진실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ACT! 128호 리뷰 2022.01.14.]
구체적 실체로서 너에게 가는 길을 상상하기
이동윤
<너에게 가는 길>에는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회원 중에서 비비안님과 나비님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비비안님은 시스젠더 남성 게이인 정예준님의 어머님이다. 나비님은 바이젠더, 팬로맨틱, 에이섹슈얼로서 트랜지션을 마치고 현재 MTF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한결님의 어머님이다. 두 분은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 오랫동안 항공 승무원과 소방관으로 근무해온 전문직 노동자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공통점들은 <너에게 가는 길>을 깊게 들여다보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기도 한데, 나비님이 관객과의 대화에서 언급했듯이 한 번 보면 퀴어영화, 두 번 보면 가족영화, 세 번 보면 여성영화가 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이 바로 이 공통점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너에게 가는 길>이 표면적으로 그려내는 두 분의 모습은 각종 언론과 미디어에서 재현되어 왔던 성소수자 부모님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5년 전, 닷페이스에서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성소수자 부모님들의 모습을 처음으로 공개 했을 당시, 화면 속 부모님들은 한없이 기쁨 충만한 밝은 표정으로 “나에게 오라”고, “내가 모두를 품어주겠다”고 손짓했었다. 이 영상에서 ‘너’는 성소수자 당사자, ‘나’는 성소수자 부모로 고정되어 있었다. 일방적으로 나에게 와서 위로 받고 가라는 부모님들의 손짓과 제스처는 조건 없는 사랑의 실체였다. 마치 신적 사랑과도 비견될 수 있을 정도의 숭고한 ‘부모님들’의 사랑이 일방적으로 전달되었을 때 성소수자 커뮤니티 모두가 받은 위로와 힘은 대단했다. 입에 담기도 힘든 각종 혐오와 폭력의 언어로 성소수자를 공격해오는 세상 속에서 성소수자 부모님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한 줄기 가녀린 희망의 빛줄기가 되었다. 하지만 <너에게 가는 길>은 어쩌면 우리가 성소수자 부모님들을 ‘부모’라는 위치에 고정 시켜 놓고 조건 없는 사랑을 주는 존재로서만 상상해왔던 것은 아닐까 되돌아보도록 만든다.
영화 속에서 비비안님과 나비님은 성소수자 당사자인 자녀들과 같은 호흡으로 고민하고 갈등하며 아파한다. 영화 속 두 분의 모습은 부모이기 전에 한 연약한 인간이며 모순 가득한 내적 갈등으로 쉽게 휩싸일 수 있는 한 개인일 수 있음, 그래서 네가 내가 될 수 있음을, 내가 네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궁극적으로 대화를 가능하게 만든다. 발신자와 수신자가 일방적이지 않은,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서만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질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너에게 가는 길>이 성취시킨다. 그래서 너에게 가는 그 과정이 결국 너와 나를 하나로 연결 짓고 서로 소통하도록 만드는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성찰하도록 만든다. 그동안 방송과 미디어에서 재현되어 왔던 성소수자 이미지들은 모두 소수자로서의 고통과 아픔을 토로하고, 우리도 평범한 한 개인이란 점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였다. <너에게 가는 길>은 당사자가 아닌 그 곁을 지키는 부모에게 집중함으로서 메시지의 일방성을 극복하고 소통 가능성, 공유 가능성을 확인하도록 만들고 결국 관객에게까지 전달되어 성소수자-부모-관객(대중)을 하나로 연결하는 트라이앵글 구조를 완성한다.
길을 가는 것은 필연적으로 모험을 유발한다. 서사이론에서 모험은 캐릭터를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일상세계에서 벗어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시공간을 경험해보는 것은 절대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없도록 만든다. 모험은 성찰의 서사이자 성장 이야기이다. <너에게 가는 길>은 그 대상을 성소수자 부모님들로 상정한다. 성소수자 부모로서 자녀들의 커밍아웃을 처음으로 접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그 자체로 가장 흥미로운 모험담 서사가 될 수 있다. (2018년 2월 10일, 제10회 성소수자 인권포럼에서 성소수자 부모모임이 발표한 “커밍아웃을 받은 부모가 겪는 6단계 과정”은 이를 잘 뒷받침한다. 충격-부정(거부)-죄책감-감정 표출-결단-참된 용인으로 이어지는 각각의 단계는 암에 걸린 환자가 자신의 병을 용인하는 과정과도 닮았다고 한다.) 하지만 변규리 감독은 이러한 드라마틱한 순간들에 집중하지 않는다. 커밍아웃한 자녀를 받아들이고 ‘참된 용인’의 단계를 거쳤다 상상된 그 이후, 포스트-커밍아웃 과정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하나의 모험으로서, 성소수자를 추상적 실체가 아닌 구체적 실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예준님과의 화상통화 장면에서 비비안님이 놀란 대목은 예준님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이 아닌, 그 애인과 함께 살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오겠다는 고백을 듣는 순간이었다.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애인과 함께 동거하겠다는 예준님의 선언은 비비안님이 상상하지 못했던, 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두 가지 이미지들을 중첩시킨다. 동성의 두 남자가 함께 애정표현을 하는 장면을 바로 앞에서 목도 하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이 자신의 아들과 아들 애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전자가 추상적 실체였다면 후자는 구체적 실체로서 비비안님의 삶에 현실화된다. “막연하게 트레이닝 하다가 이제는 더 적극적으로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비비안님의 인터뷰는 성소수자의 커밍아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그 자체로 완성된 모험이 아님을, 오히려 이를 구체적 실체로서 받아들이기 위해 이전보다 더 적극적인 태도와 자세가 필요한 또 다른 모험의 시작이란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와 유사한 상황은 나비님에게도 벌어진다. 한결님이 트랜스젠더 남성이란 사실을 고백하고 그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힘겨운 과정이 용인된 뒤 한결님은 본격적으로 트랜지션을 시작하며 성별 정정을 시도한다. 트랜지션과 성별 정정이라는 두 가지 목표가 만들어내는 모험의 여정은 나비님에게 또 다른 도전으로 다가온다. 전자가 트랜스젠더 남성으로서 한결님의 존재가 구체적 실체로 다가온 계기였다면 후자는 트랜스젠더로서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인정하고 대면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이 두 과정은 결국 한결님의 죽음 소망에 대한 인정으로까지 이어진다. 자녀의 죽음 소망을 ‘용인’하는 것이 과언 어떤 것일지 당사자가 아닌 우리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나비님의 힘겨운 고백을 클로즈업으로 잡아낸 인터뷰 장면은 관객 모두를 그녀의 고통 속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추상적 실체가 아닌 구체적 실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비비안님과 나비님이 자녀들의 존재를 추상적 실체에서 구체적 실체로 받아들이는 모험의 여정은 현 한국 사회가 성소수자를 인식하고 대하는 모순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태도가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는 깊은 영감의 순간들이다. 성소수자의 존재 사실을 이해는 하지만 가시화는 하지 말라는 요구, 성소수자의 억압과 차별적 상황을 알고는 있으나 그 구조를 전복하기 위한 노력은 나중으로 미루려는 입장들, 성소수자가 겪어야 하는 고통은 동정의 대상일 뿐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 상상하지 않으려는 태도들을 넘어서기 위해서 우리는 비비안님과 나비님이 겪고 있는 모험의 여정에 동참해야 한다. ‘너에게 가는 길’이 완성하고자 하는 모험의 결론은 ‘너에게 가는 길’이 단지 성소수자 당사자들만의 길이 아닌, 또 그 곁을 지키는 이들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여정이 되어야만 한다는 진실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비비안님과 나비님은 공통되게 고통스러워하는 자녀 앞에서 절대 울지 않으려 했다고 고백한다. 고통스러워하는 자녀보다 더 앞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두 분의 이 고백은 우리가 고통 속에 놓여있는 이들과 어떻게 함께 어떤 자세로 동행할 수 있는지 발견하도록 한다. 만약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함께 아파한 이들이 있다면 자신들이 흘린 눈물의 의미를 반추해봤으면 한다. 그 눈물은 과연 영화 속 성소수자들, 그 부모들의 고통 보다 앞서 있는 것은 아닌지, 추상적 실체로서의 스크린 속 인물들의 감정에 단순한 연민으로 흘린 눈물은 아닐지, 한 번쯤 돌아보길 바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죄책감’이 들었다면 스크린을 통해 만난 이들을 보다 구체적 실체로서 받아들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지 적극적으로 상상해보길 바란다.□
글쓴이 이동윤 소개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화연출, 시나리오, 영상이론을 공부하고 시나리오 작가,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춘천SF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해왔다. <한국퀴어영화사>, <한국트랜스젠더영화사>, <한국레즈비언영화사>를 책임편집 했으며 현재는 영화를 만들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영화를 통해 현실을 사유하는 모든 일에 관심을 두고 다양한 형태의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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