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그냥 흘려보내기가 아깝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고 해도 시간이 지난 후에 떠올리면 세세한 감정은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나. 잊지 않고 싶어서 기록에 집착하는 것 같다. 슬픔도 기쁨도 내가 느낀 것이니, 그때의 나를 잘 기록해두고 싶다."
[ACT! 125호 인터뷰 2021.06.25]
영화 보고, 책 읽고, 쓰는 남미리입니다
차한비(ACT! 편집위원)
늘 SNS로만 봐온 사람을 직접 만났다. 아이디는 _m.blue, 필명은 ‘블루’인 남미리 씨는 영화와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들에게 친숙한 ‘인스타그래머’다. 어떤 작품을 접하든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 꾸준히 리뷰를 올리는 성실함 덕분에 팔로워 숫자는 2,400여 명에 이른다. 다르게 표현하면, 미리 씨는 너그럽고 소중한 관객이다. 영화의 경우, 거의 모든 개봉작을 관람하고 크고 작은 영화제도 틈을 내어 찾는다. 누군가에게는 작품을 미리 엿볼 기회를, 누군가에게는 영화에 관해 감상을 나눌 공간을 마련해준다. 일과를 물어보니 일주일에 사흘 정도는 퇴근 후에 극장에 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집순이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가만히 있기보다는 뭔가를 계속해야 하는 것 같아요.” 미리 씨는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덤덤하게 말했지만, 그만큼 좋아하는 일에 매진하는 이도 드물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과 취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매일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내는 미리 씨와의 대화를 옮긴다.
= 블루라는 필명은 어떻게 정했나.
- 좋아하는 단어이고,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 때부터 썼다. 당시에는 리뷰를 쓸 목적은 아니었다. 무슨 영화를 봤는지 스틸컷만 올려둘 생각이었는데, 취미가 ‘딥’해지기 시작하면서 지금 모습이 됐다.
= 언제부터 취미가 ‘딥’해졌나.
- 2018년 무렵? 그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자원활동을 했다. 관객심사단이었는데, 당시 함께 활동한 친구들이 글을 써보라고 응원해줬다. 엄청나게 친해져서 아직도 연락하고 지낸다.
= 자원활동이 즐거웠나 보다.
- 이전 직장에서 퇴사하자마자 한 일이었다. 실은 퇴사한 날, 반차 내고 자원활동 면접을 보러 갔다. (웃음) 관객심사단은 다른 자원활동과는 성격이 좀 다르지 않나. 매일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어떤 개입이나 간섭 없이 우리끼리 토론해서 수상작(관객심사단상)을 선정하는 과정도 즐거웠다. 대학 다닐 때도 영화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때는 영화제 자원활동을 해볼 생각까지는 못했다. 줄곧 미술을 공부했고 학부에서는 무대미술을 전공한 터라, 말하자면 스태프 입장이었던 적이 많거든. 영화로 또 무슨 일을 하기보다는 그냥 관객 입장에서 즐기고 싶었다.
= 직장에서는 무슨 일을 하나.
- 브랜드 마케터다. 이벤트 기획, SNS 콘텐츠 제작 등을 주로 한다.
= 학부 전공과도, 취미와도 거리가 먼 일처럼 들린다.
나도 말하면서 의외라고 느껴지는데, 언젠가부터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 삼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것마저 싫어지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이 생기더라. 그동안 해왔던 일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가보고 싶었고, 다행히 첫 회사에서 무대미술 경력을 좋게 봐준 덕분에 자연스럽게 이쪽 길로 들어왔다.
= 가장 큰 재미는 취미로 남겨두고, 두 번째 재미를 일로 선택한 걸까?
그런 셈이다. 일하면서도 나름 재미를 찾았으니까. 근데 마케팅 일도 5년 차에 접어들다 보니… 요즘 한참 고민하는 시기다. (웃음)
= 일만큼 취미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균형을 맞추고 있나.
-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는 ‘돈 버는 사람’ 스위치를 켜고, 6시 이후에는 그 스위치를 끈다. 물론 초년생일 때는 일과 여가 시간을 분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퇴근 후에도 계속 업무를 생각하고, 상사에게 어떤 지적을 받았는지 곱씹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적어도 해야 할 만큼은 한 것 같은데, 지나치게 얽매여 있는 듯했다. 그때부터 스위치를 켜고 끄는 법을 연습했고, 지금은 퇴근하면 회사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웃음)
= ‘워라밸’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부터 다년간 연습을 거쳤구나. (웃음) 일 년에 영화는 몇 편 정도 보나.
- 항상 확인하는데, 매년 200-250편 정도 보더라. 300편 넘게 볼 때도 있다. 올해 들어서는 한 편을 보더라도 잘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많이 보는 게 중요했는데, 문득 ‘내가 왜 이렇게 양에 집착할까?’ 싶더라.
= 연말 정산, 월말 정산하듯 관람작 리스트를 이미지로 만들어 인스타그램에 게시하더라. 갈무리하고 ‘베스트’ 작품을 꼽는 이유가 있나.
- ‘베스트’를 꼽지만, 전제는 다 좋다는 거다. 굳이 명시한 이유는 난감해서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자꾸 뭐가 제일 좋았는지 묻더라. 추천해달라는 사람도 있고. 다 좋았지만, 그중에 아주 요만큼 더 좋았던 작품을 꼽는다. 한편으로는 일하며 생긴 습관 같기도 하다. 회사에서 월말이나 연말에 보고서를 작성하듯, 말일이 되면 혼자 되짚어 본다. 이번 달에는 뭘 봤는지, 누굴 만났는지, 언제 가장 좋았는지. 결국 그것도 기록의 일종이고, 실은 그냥 재밌어서 하는 일이다. 뚜렷한 이유를 말하기가 어렵다. 처음부터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면 이유도 쉽게 설명했을 텐데, 나한테는 그저 자연스러운 루틴이거든. 물론 ‘내가 이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들여다봤다니’ 하는 만족감은 있다.
= ‘이야기’라는 것이 미리 씨한테 중요한가 보다.
- 뭔가를 보고 읽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야기 만드는 사람을 동경한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신기하다. 나는 한 번밖에 못 살지 않나. 근데 영화에서는 다른 세상을 보고, 때로는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무대미술을 선택했던 것 또한 텍스트로 쓰인 이야기를 실제로 구현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했던 것 같다. 그러다 ‘안 되겠다, 이 일로 돈을 벌기엔 너무 힘들겠구나’ 깨달았지. (웃음)
= 영화를 보고 SNS에 꾸준히 단평을 남긴다. 팟캐스트에서 ‘오씨네필’이라는 채널을 운영했고, 영화 관련 모임에서 진행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미리 씨에게 영화는 취미를 넘어선 무엇 같다는 느낌도 든다.
- 취미이긴 한데, 높낮이를 따지면 되게 깊이 들어간 것 같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일의 영역으로 끌어오고 싶지는 않다. 안 그래도 인터뷰를 제안받고 나서 생각해봤다. 내가 언제부터 기록했지? 왜 시작했지? 뭐가 좋지? 딱히 ‘나는 이렇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뚜렷하게 떠오르지는 않더라. 그냥 재밌어서 시작했고, 사실 그 외에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할까 싶기도 하다.
= 영화의 재미를 알려준 영화는?
- 언니랑 다섯 살 차이가 난다. 어릴 적에는 언니가 되게 어른스러워 보였고, 언니의 취향을 닮고 싶었다. (웃음) 예를 들면 <커피와 담배>(짐 자무쉬, 2003), <수면의 과학>(미셸 공드리, 2006) 같은 영화를 언니 덕분에 봤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아, 영화라는 건 되게 멋있는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 인스타그램에는 줄거리 요약과 함께 짧은 리뷰를 쓴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이유와 그걸 SNS에 공개하는 이유는 각각 다를 듯하다.
- 오랫동안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얼 느끼는지 오랫동안 생각했다. 나란 사람 대체 뭘까. (웃음) 그걸 잘 모르겠어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참 우울하고 슬퍼하던 시기였다. 이유를 파고들다 보니 ‘과거에는 어떤 감정이었지? 그때 어땠기에 지금 이렇게 된 걸까?’ 궁금해지더라. 영화나 책을 본 후에 한 줄이라도 쓰려고 하는 이유도 그와 연결된다. 감정을 그냥 흘려보내기가 아깝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고 해도 시간이 지난 후에 떠올리면 세세한 감정은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나. 잊지 않고 싶어서 기록에 집착하는 것 같다. 슬픔도 기쁨도 내가 느낀 것이니, 그때의 나를 잘 기록해두고 싶다.
= 자신을 좋아하기 어려울 때 드는 마음이기도 한 것 같다.
- 맞다, 엄청나게 고민했다. ‘나는 나를 왜 이렇게 싫어할까?’라는 질문을 반복한 끝에 나를 좋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나랑 사이좋게 지내야 하겠더라. 나를 사랑해야 남한테 사랑도 줄 수 있고, 나한테 다정한 시간을 줘야 남한테도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느낀 걸 다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 어릴 때 일기도 열심히 썼나.
- 꼬박꼬박 썼다. 어느 날, 일기를 다시 봤더니 슬픈 얘기만 잔뜩 있더라. 그다음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안 썼다. 어떻게 보면 그 욕구를 영화나 책의 리뷰로 푸는 것 아닐까. 영화를 보면 그런 생각도 든다. 일주일 동안 살면서 느끼는 감정보다 영화를 보는 2시간 동안 훨씬 더 많은 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고.
= 본 영화에 관해서는 무조건 기록을 남기나.
- 뭐든 한 줄이라도 쓰기로 했다. 일단 한 줄을 쓰면 더 쓰고 싶은 게 생기더라. 친구들은 스트레스받지 않느냐고 묻는데, 나한테는 스트레스 해소 행위에 가깝다. 가끔은 영화 리뷰라는 형식을 빌려서 내 속마음과 상태를 고백하기도 한다. 리뷰는 껍데기일 뿐이고, 내가 나를 솔직하게 드러낼 기회처럼 여길 때도 있다.
= 글쓰기는 정성이 필요한 일이다. 어떤 작품을 만날 때 좀 더 마음이 가는지 듣고 싶다.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글을 쓸 만큼 매력적인 작품은?
-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애도의 과정을 담은 작품을 보면 계속 말하고 싶어 진다.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은 적이 있다. 이후 죽음을 자주 생각했다. 죽는다는 게 뭘까? 남은 사람에게 삶이란 뭘까? 남겨진 자가 일상을 이어나가는 건 어떤 힘으로 가능한 것일까? 그런 의문이 늘 남아 있다. 죄책감이나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심리가 드러나는 작품을 발견하면 놓칠 수 없다는 마음이 든다. 거기서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내가 ‘왜?’라고 물었지만, 아직 답을 내리지 못한 질문에 대한 답을.
= 관련해서 떠오르는 영화가 있나.
- 마침!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단편 <한비>(이다영, 2021)를 봤다. (웃음)
= 세상에. (웃음) 나도 좋아하는 작품이다.
- 나는 나를 울리는 영화를 좋아한다. 울리면, 거기에 넘어가는 것 같다. (웃음) 엄마 이야기에도 울고, 남겨진 사람의 죄책감을 다루는 작품을 볼 때도 울고. 사실 일상에서는 슬픔을 표현하는 일이 어렵지 않나. 어릴 때야 울기도 하고 떼도 쓰고 했지만, 어른이 된 후에는 그렇게 감정을 표출하기가 쉽지 않다. 그때 영화가 참 좋은 핑계가 되어주는 것 같다. 그래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남짓한 시간에 고마움을 느낀다.
= 팔로워 숫자가 2천 명이 넘는다. 아무리 개인 SNS라고 해도 게시글을 올릴 때마다 자연스레 타인의 시선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걱정스러운 부분은 없나.
-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내 기준에서 당연히 별로라고 느끼는 작품도 있을 거 아닌가. 그런 이야기를 썼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다. 어떻게 그 작품을 별로라고 말할 수 있냐고. 한동안 신경 쓰였는데, 이젠 아니다. 내가 리뷰를 쓴다고 해서 그게 무슨 공공재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 결국 이 글도 내 것이고, 이 감정도 내 것이다. 사람이 전부 다르니 영화도 당연히 각자 다르게 볼 수 있다. 지금은 그냥 좋아하는 걸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글쓴이.
차한비(ACT! 객원 편집위원)
- 어려도 추워도 가방을 내려놓지 않아도
아무 데나 걸터앉아서도 가능한 것들이 언제까지나 그랬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것을 지켜내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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