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차곡차곡 적어 놓은 누군가의 경험과 감상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영화를, 훨씬 더 깊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ACT! 123호 리뷰 2020.12.16.]
영화 쓰는 마음 둘러보기
차한비 (ACT!편집위원)
2020년 국내에서 출간된 ‘영화 책’ 네 권을 모아 보았습니다. 이론적인 접근을 통해 영화를 분석하거나 줄거리를 요약하며 비평하는 글은 아닙니다. 영화를 업으로(학업이기도 하고 직업이기도 합니다) 삼고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오히려 ‘영화인 책’이라고 부르는 편이 어울리겠네요. 다만 에세이와 인터뷰 형태로 엮어낸 이 책들에는 영화 서적다운 정보, 말하자면 영화의 역사, 연출, 제작, 연기, 배급과 홍보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유용한’ 지식 또한 풍성하게 담겨 있습니다. 책 속에 차곡차곡 적어 놓은 누군가의 경험과 감상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영화를, 훨씬 더 깊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이길보라, 문학동네, 2020
<반짝이는 박수 소리>(2015)를 통해 청각장애인 부모와 살아가는 코다로서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올해 2월 개봉한 <기억의 전쟁>에서는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생존자의 고통에 주목하며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이길보라 감독의 에세이입니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유학 자금을 마련한 감독은 2017년 네덜란드 필름아카데미에 입학했는데요, 낯선 나라에서 하나씩 ‘해보며’ 새롭게 배우고 만난 것들에 관해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에 차분히 기록해두었습니다. 단지 영화의 완성에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이전과는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하는 따뜻하고 야무진 조언이 가득하네요.
* 밑줄 친 문장
“모든 촬영분과 아이디어는 다시 들여다볼 가치가 있어요. 버린다면 버리는 이유 역시 확실해야 하고요. 그걸 사용하지 않는다면 왜 사용하지 않는지 들여다봐야 해요. 거기에 답이 있을 테니까.”
『다큐하는 마음』 양희, 제철소, 2020
<마리안느와 마가렛>(윤세영, 2017) <노무현입니다>(이창재, 2017) <김군>(강상우, 2019) 등 다수 다큐멘터리에 참여한 양희 작가가 인터뷰집을 퍼냈습니다. 양희 작가는 스스로를 “시간을 재구성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흔히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찍어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사실 작품이 세상에 나와 관객과 만나기까지는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영화를 만들어가는 여러 개의 손과 마음이 필요합니다. 감독, 프로듀서, 편집감독, 비평가, 홍보마케터, 영화제 스태프가 말하는 ‘다큐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들어봅니다.
* 밑줄 친 문장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넘어선 타자, 그리고 ‘우리’를 보게 되는 아름다운 경험. 그것이 다큐멘터리다.”
『김군을 찾아서』 강상우, 후마니타스, 2020
작년 5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김군>을 연출한 강상우 감독의 책입니다. 표지에 보이는 인물이 바로 ‘김군’이에요. 1980년 5월을 기억하는 광주 사람들은 그를 ‘무장 시민군’이라 증언하고, 보수 평론가 지만원 씨와 우익 커뮤니티는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며 ‘제1광수’라고 불렀지요. 강상우 감독은 이 사진을 실마리 삼아 5·18민주화운동을 재구성해나갑니다. 책에는 생존자와 목격자, 활동가 등 103명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김군을 찾아’나갔던 과정과 그 안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고민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한 편의 영화가 탄생하기까지 연출자가 거쳐 온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제작노트이자 영화에서는 전부 포함하지 못한 이야기까지 빼곡하게 기록한 책이니 영화와 나란히 두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 밑줄 친 문장
“다만 나는 김군이 왜 총을 들었고, 사진을 통해 여러 사람에게 알려졌음에도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지 알고 싶었다. 그와 행적이 교차한 생존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기억을 따라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오답’이 분명한 지만원 씨의 ‘광수’ 세계관은 물론이거니와,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주입돼 온 ‘민주화운동’ 서사와는 또 다른, 현재의 공기에서 살아 숨 쉬는 기억과 관계들의 망을 포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하는 여자들』 (사)여성영화인모임 기획, 사계절, 2020
(사)여성영화인모임은 “더 많은 여성이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로 올해 2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영화하는 여자들』은 각계각층에서 활약하는 여성 영화인과의 대화를 꼼꼼하게 옮긴 인터뷰집인 동시에, 기존 남성 중심 언어로 쓰인 영화사를 ‘다시 쓰는’ 새로운 영화사 서적이기도 합니다. 1990년대부터 2010년대 이후까지 10년을 주기로 시대를 구분하며, 제작 현장은 물론 영화제 프로그래밍과 저널리즘에 이르는 너른 영역의 영화인을 찾아갑니다.
* 밑줄 친 문장
“모든 여성 캐릭터가 주체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영화의 성 평등 지수가 높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야기에서 여러 삶을 다루다 보면 이런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런 것들이 이 시대에 영화 안에서 어떤 의미로 자리 잡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저에겐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문소리)” □
백구가 보내는 안부 - 영화 <개의 역사> 리뷰 (0) | 2021.03.09 |
---|---|
사람들은 흘러서 어디로 가는가 -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리뷰 (0) | 2020.12.15 |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 - <남매의 여름밤> (0) | 2020.09.29 |
지금 여기에서 민주노조를 생각하다 - <깃발, 창공, 파티> 리뷰 (0) | 2020.08.03 |
'내언니전지현'과 '나' 사이의 공간 -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리뷰 (1) | 2020.08.03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