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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민주노조를 생각하다 - <깃발, 창공, 파티>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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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0. 8. 3.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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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에 물을 주고 바닥을 쓸고 선전물을 부착하는 일상의 리듬감, 커피가 떨어지지 않게 채워 넣고 누군가 앉을 테이블에 과일을 가져다 두는 상냥함 같은 것은 내가 노동조합 혹은 투쟁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서 배운 훌륭한 삶의 태도들이었다."

 

[ACT! 121호 리뷰 2020.08.14.]

 

지금 여기에서 민주노조를 생각하다 
- 영화 <깃발, 창공, 파티> 리뷰

 

김설해 (생활교육공동체 ‘공룡’ 활동가)

 

 

 2011년부터 시행된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는 한 사업장 안에 여러 개의 노조를 인정하지만, 단체교섭을 할 때는 노조 간의 교섭대표 노조를 정하도록 하고 있다. 교섭대표 권한을 갖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과반 수 이상의 조합원을 확보하는 것인데, 그러지 못한 소수노조는 파업권과 교섭권을 대표노조에 위임하게 된다. 결국 이런 승자독식의 위험성을 가진 제도는 기업의 노조파괴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됐다. 2011년 복수노조법의 시행을 전후로 수많은 기업들이 기존의 노조에 타격을 주는 동시에 어용노조를 만들고 지속적인 차별과 협박, 회유 등의 방법으로 기존 노조의 조합원들을 이탈하게 만들었다. 10년이라는 시간동안 민주노총 소속의 수많은 노조가 아예 문을 닫거나 소수노조로 고착되었다.

 구미에 있는 반도체 공장 KEC는 노동법 개정과 복수노조법의 시행 사이였던 2010년, 그러니까 아주 초창기부터 노조파괴를 했던 회사로 알려져 있었다. 여자 기숙사에 난입한 용역과 노조 탈퇴를 강요한 정신 교육으로 악명이 높았고, 파업에 가담한 KEC지회 조합원들에게 청구된 300억이 넘는 손해배상 가압류가 주변의 할 말을 잊게 만들었다.

 그런데 <깃발, 창공, 파티>는 KEC지회의 이런 오래된 갈등과 고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자료화면도 거의 쓰지 않고, 내레이션이나 인터뷰, 이름과 직함을 알려주는 자막 같은 것도 없이 2시간 40분 동안 조합원들의 모습만을 보여준다. 단합대회를 하고, 회의를 하고, 교육을 하고, 연대 집회에 나가고, 같이 휴가를 보내는 그들의 모습은 얼핏 평범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사람들의 말이나 표정에서 10년을 버티며 싸워온 시간의 결이 문득문득 튀어나오는데, 그럴 때면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갑자기 그들의 맨 얼굴을 마주한 것 같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기분이 되었다. 가볍게 웃고 떠드는 속에 무거운 현실이 있었고, 지칠 것 같은 상황에서도 파티는 계속됐다.

 

▲ 영화 <깃발, 창공, 파티> (장윤미, 2019) 



 영화는 2018년도 KEC지회의 1년간의 임금과 단체협약(임단협) 과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남녀 성비가 비슷한 사업장인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한 번도 꾸려지지 않았던 여성 지회장과 여성 간부들이 주축이 되는 지도부가 꾸려졌고, 그동안 노조에서조차 묵인해왔던 성차별적 임금체계를 바꾸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다. 영화 속의 그들은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서로를 돌보며 부조리에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주체들이다.

 이렇게 노조의 밝은(?) 모습에 주목한 결과 이 영화는 노동조합을 미화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 것 같지만, 내가 느낄 때 영화는 오히려 노동조합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편이다. 소수노조인 KEC지회는 임단협 체결을 위해 8년 만에 제2노조와의 교섭창구 단일화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는데, 이를 논의하는 노동조합의 회의에서 배태선 교육국장에게 한 간부가 질문을 한다. 현장 조합원들이 최종적으로 임단협 안을 결정하는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건지 궁금해한다고. 배태선 국장은 교섭대표 노조가 갖는 공정대표의무가 있음을 들어 승산이 있음을 설명하지만, 영화 말미에서 결국 교섭대표 노조인 제2노조는 전체 조합원들이 투표를 통해 부결까지 시킨 안으로 회사와 협상한다. 영화는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교섭권이 없는 소수노조로서 결정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결과를 감추지 않으면서 인터뷰나 내레이션을 통해 상황을 평가하지도 않는다.

 사실 투쟁하는 노동조합에서 이런 상황은 대부분 익숙하지 않을까 싶다.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지만 현실적인 상황과 변수에 의해 100% 달성하지 못하고 또 다음 과제를 남기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해온 공을 나누며 이후에도 함께 투쟁할 것을 결의하는 것.

 투쟁의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간부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런 스스로에게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여러 번 던져볼 수밖에 없었다. 소수노조로 고사할 것인가, 최대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볼 것인가. 어쩌면 답은 정해져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 희망을 만들어 낸 건 모두 그들의 책임 있는 선택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비정규직 투쟁에 자기 일처럼 연대하고, 당장 본인들 임금에는 큰 영향이 없다고 하면서도 최저임금 투쟁에 앞장서고, 오래된 악습이었던 성차별적 임금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설득할 때마다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오랜 싸움에 지친 조합원들에게 말을 꺼내는 건 더 어려웠을 것 같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말을 꺼내고야 마는 그 끈질김이 부러웠다.

 

▲ 영화 <깃발, 창공, 파티> (장윤미, 2019) 



 영화가 특정 인물에 이입하도록 만드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안에는 다양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실 이런 식의 접근 방식은 어느 순간 나에게 오히려 긴장감을 불어 넣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 속 이들의 표정을 살피고 여러 사람의 입장을 상상해 보게 만들었다. 관찰하는 카메라와 긴 호흡의 편집을 거쳐 나온 화면 안에는 남/녀 조합원의 미묘한 태도의 차이, 오랜 경험이 있는 간부와 신규 간부의 차이, 단련된 언어를 갖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 나이 차이까지 수많은 차이가 드러난다. 그런 차이를 갖고 있는 그들은 민주노조라고 하는 하나의 틀거리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나아간다. 

 KEC지회는 끊임없는 회의를 통해 투쟁의 의미와 목적을 구성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말들로 정립해 나가는데, 이 모습을 통해 감독은 ‘남/녀, 정규직/비정규직, (KEC 임금체계의 등급인) J등급/S등급 등등..’과 같이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으로 구분되는 노동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것을 요구하는 듯했다. 그리고 일상을 꾸려가는 노동조합 활동을 세밀하게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노조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더 중요한 역할과 덜 중요한 역할이 있는 게 아님을 짚어낸다.

 화분에 물을 주고 바닥을 쓸고 선전물을 부착하는 일상의 리듬감, 커피가 떨어지지 않게 채워 넣고 누군가 앉을 테이블에 과일을 가져다 두는 상냥함 같은 것은 내가 노동조합 혹은 투쟁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서 배운 훌륭한 삶의 태도들이었다. 그런 규칙적인 활동을 통해 유지되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만나고 감정을 공유하고 투쟁이라는 걸 한다. 

 예전에 어느 투쟁하는 노동자로부터 노동자가 승리하는 시점은 노동자가 투쟁을 시작하는 순간부터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지금 여기를 함께 살아가며 민주노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시간을 담은 이 영화를 보며 그때 그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었다. □

 


글쓴이. 김설해 (생활교육공동체 ‘공룡’ 활동가)

 

- 청주에 있는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에서 미디어 제작과 교육, 다양한 연대 활동을 합니다. 노조파괴에 맞선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사수>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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