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전쟁>은 그들 각자의 언어를 통한 기억의 투쟁에 동참하고, 함께 시차를 넘어설 것을 요청함으로써 그들의 기억을 현재화한다."
[ACT! 120호 리뷰 2020.06.05]
- 다큐멘터리 <기억의 전쟁>
박동수(대학생, 관객)
생각해보면 베트남전을 다룬 한국 극영화는 많지 않다. <푸른 옷소매>, <하얀 전쟁>, <알포인트>, <님은 먼곳에>, 혹은 베트남전을 잠시 등장시키는 <클래식>이나 <국제시장> 정도만이 떠오른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무수한 영화들을 떠올려볼 때,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인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는 너무나도 적다. 극영화에서 베트남전을 끌어오는 방식 또한 대부분 참전군인을 등장시키고 그의 입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말하게 하는 것 정도이지, 전장을 재현하진 않는다. 반면 할리우드에선 무수히 많은 베트남전 영화가 제작되었다. <플래툰>, <지옥의 묵시록>, <풀 메탈 자켓> 등이 그러하다. <트로픽 썬더>나 <콩: 스컬 아일랜드>와 같은 장르영화에서 베트남은 완전히 장르화 된 공간으로 변모한다. 미국의 국토가 아니었던 전장들은 끊임없이 재현되고, 재가공되고, 변주된다. 베트남전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들에서의 베트남은 야만과 광기, 탐욕의 공간이고, 장르적으로 변주된 영화에선 공포와 미지의 영역으로 타자화된다.
한국에서 베트남전을 재현하는 영화가 자주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의 전장은 한반도였으며, 전장은 국가, 국민, 이데올로기와 동일시된다. 반면 한국군이 파병되었던 베트남의 전장은 완전한 타지이자 타자다. 할리우드의 베트남이 야만, 광기, 공포의 타자라면, 한국영화의 베트남은 낭만 혹은 ‘한강의 기적’의 이념이라는 타자이다. 전장을 직접 재현하는 소수의 영화들만이 (아마도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을 따라) 타지를 경유하여 타자화 된 참전군인을 다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장이 한반도가 아닌 ‘타지’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군인들은 타지에서 전투를 수행하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베트남전을 기억하는 감각에는 그만큼의 역사적 시차가 발생한다.
<기억의 전쟁>은 그러한 시차에 주목한다. 영화는 한국에서 열린 ‘베트남전쟁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에서 시작하고 마무리된다. 이길보라 감독은 시민평화법정에 증인으로 참석한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의 생존자 응우옌 티 탄을 중심으로 또 다른 생존자인 딘 껌, 한국군이 남기고 간 지뢰에 의해 시력을 상실한 응우옌 럽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준다. ‘들려주고 보여준다’는 것은 <기억의 전쟁>이 시차를 드러내는 방법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전쟁피해자 세 명은 공적언어에서 배제되어 있다. 이는 응우옌 티 탄, 웅우옌 럽, 딘 껌 세 사람이 각각 여성,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이라는 점 때문이다. 건장한 남성의 신체를 통해 치러진 전쟁은 그들의 언어로 기록된다. 전쟁에서 돌아온 상이군인이 상실된 남성적 신체 때문에 잊히고 배제되는 것처럼, 비장애인 남성의 언어인 공적언어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인 이길보라 감독이 이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은 청각장애인인 자신의 부모님을 담아낸 전작 <반짝이는 박수소리>의 연장과도 같다. 딘 껌의 증언이 담긴 인터뷰 장면과는 달리, 그가 처음 등장하는 숏들엔 자세한 자막이 없다. 카메라는 그의 몸짓과 표정을 오롯이 담아낸다. 응우옌 티 탄이 등장하는 첫 장면은 자신의 손자를 돌보고 주방에서 요리하는 모습이다. 응우옌 럽은 마치 향을 꽂는 위치를 꿰고 있는 듯 제사를 지낸다. 이들의 언어는 (물론 베트남어가 포함되어 있지만) 수어, 필담, 그림, 표정, 그리고 오랜 시간 위령제를 드리며 몸에 베어버린 제스처들이다. 반면 한국으로 돌아온 참전군인들의 언어는 무엇인가? 한국을 찾은 응우옌 티 탄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연대하는 장소 앞에서 군복을 입은 채 욕지거리를 날리고, 전몰장병 합동 위령제에서 무표정하게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며, 시민평화법정에도 부대마크를 떼지 않는다. 세 피해자의 언어가 요청과 용서라면, 이들의 언어는 고함, 침묵, 거부이다.
그러한 차이는 베트남과 한국, 양국이 각각 세운 베트남전에 대한 공간들에서도 드러난다. 베트남 호치민의 전쟁증적박물관은 전쟁 당시 사용된 무기들과 미군과 연합군에 의해 민간인이 입은 피해를 함께 전시한다. 민간인 피해에 관련된 전시물 앞엔 군복과 군화 대신 간편한 옷차림과 샌들을 신은 사람들이 있다. 주로 백인인 관광객들은 박물관에서 전시물을 관람하고, 전투가 벌어졌던 구찌 땅굴에서 기관총을 쏘는 체험을 즐긴다. 반면 강원도에 위치한 월남참전용사 만남의 장은 민간인들이 살았을 법한 마을을 재현한다. 입구에는 마을을 소개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베트남 여성의 모습을 딴 조형물이 있다. 참전군인을 재현한 조형물들은 총부리를 재현된 민가 안으로 향하고 있다. 영화 초반에는 베트남전 당시의 무전 내용을 흉내 내고 전장을 재현하는 디오라마 쇼가 등장한다. 베트남에서 전쟁의 기억은 일종의 내상이다. 시작은 내전이었고, 전투는 그들의 땅에서 치러졌다. 반면 한국에서 베트남전은 승리의 기억,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한 기억, 명예로운 과업의 기억이다. 전투의 재현물은 승리에 고취된 환호성으로 가득하다.
언어의 시차를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거리이다. 구찌 땅굴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은 기관총을 쏘며 전투의 감각을 체험한다. 이들에게 베트남은 과거의 전쟁이 벌어졌던 타지이며, 완벽한 타자이다. 설령 그것이 자신들이 패했던 전쟁일지라도, 물리적 거리를 통해 벌어진 시차의 감각은 그것을 무마시킨다. 그들에게 베트남전은 오래된 과거일 뿐이다. 한국의 참전군인에게도 그 시차는 적용된다. 한국에서 벌어졌던 전쟁의 기억에 대한 감각은 타지에서의 전쟁을 통해 거리를 두게 된다. 때문에 그들의 기억은 승리의 기억이자 명예의 기억이다. 국가는 디오라마 쇼를 통해, 국가유공자라는 칭호를 통해 전쟁과 기억 사이의 시차를 발생시킨다. 그 과정에서 참전군인 개인의 기억은 승리 이전과 거리를 두고, 승리 이후만을 가까운 현재로 받아들인다. 반면 세 명의 피해자가 증언하는 기억은 전쟁과의 시차가 적다. 그들의 기억은 당장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의 기억이며, 그들이 움직이는 몸의 기억이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기억이다.
때문에 <기억의 전쟁>은 곧 ‘기억하기’의 투쟁이며, 기억의 시차를 줄이는 작업이다. 시민평화법정에 참여하기 위해 다시 한국을 찾은 응우옌 티 탄은 민간인학살 당시의 기억을 풀어낸다. 그 기억에는 시차가 없다. 그는 시민평화법정을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증언한다. 과거를 증언하는 것은 단순히 기억하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증언은 자신이 기억하는, 몸에 베여 있으며 시신경에 각인된 과거를 현재에 잠시 되살리는 것이다. 익숙한 손짓과 말로 위령제를 지내는 응우옌 럽의 모습도, 수어와 바디랭귀지를 통해 5살 때 목격한 장면을 되살리는 딘 껌의 모습도 과거와의 시차를 없애고 그것을 현재화한다. 이들이 지닌 각각의 언어는 물리적 거리에 의해, 국가의 기념물에 의해 벌어진 기억의 시차를 넘어설 가능성을 품고 있다. <기억의 전쟁>은 그들 각자의 언어를 통한 기억의 투쟁에 동참하고, 함께 시차를 넘어설 것을 요청함으로써 그들의 기억을 현재화한다. □
글쓴이. 박동수(대학생, 관객)
-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해서 영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영화제도 극장 개봉작도 없는 상황에서 원격강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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