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렇게 할머니의 부재를 겪을 동안 나의 남동생은 이 시간을 어떻게 지나왔을까. 앞으로 우리는 어떤 ‘부재’를 만나며 어떻게 성장하게 될까."
[ACT! 122호 리뷰 2020.10.14.]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
– 영화 <남매의 여름밤> 리뷰
이다혜 (광주여성영화제 프로그램 팀장)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은 여름방학 동안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게 된 남매 옥주와 동주가 겪는 가족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사소하고 현실적이라 다시금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내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없는 아이인데 이 영화는 놀랍게도 이제는 더 이상 손에 잡히지 않는, 잊고 지냈던 나의 지난 추억을 찾게 해준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여름이라는 시간은, 옥주와 동주가 할아버지의 2층 양옥 주택에서 티격태격 보내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 시간 속 남매는 옥주와 동주 뿐만이 아니다. 별다른 갈등 없이 맥주 캔을 부딪히면서도 아버지의 유산에 대한 속내가 불쑥 튀어나오는 남매의 아버지와 고모라는 또 다른 남매의 시간이기도 하다.
소중한 사람의 ‘부재’라는 것은 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조차 큰 두려움이자 결핍으로 다가온다. 영화 속 두 남매 모두에게 ‘어머니의 부재’란 영화 속에서 낭비 없이 쓰인다. 아빠와 고모에게 부모님이 나온 꿈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도 “난 꿈 안 꿔”라고 말하던 옥주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되지 않는 꿈을 꾸며 마음 깊은 곳의 결핍과 마주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이곳에 없음’으로 인해 존재에 대해 기억하기 시작하고 추억을 회복한다.
어렸을 때의 나는 할머니를 아주 많이 미워했다. 아픈 할머니의 병간호를 대부분 엄마가 했기 때문이다. 나에겐 어려서는 아픈 ‘나’ 때문에, 그리고 내가 괜찮아질 때쯤엔 아픈 ‘할머니’ 때문에 ‘엄마는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겠구나’라는 죄책감이 생겼다. 난 그런 어줍잖은 죄책감으로 이유 없이 할머니를 아주 많이 미워했다.
생전의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기억은 흐린 날의 요양병원이다. 할머니는 계속 아슬아슬한 몸 상태를 유지하며 삶을 이어나가셨다. 그 때의 나는 할머니와 무슨 이야기들을 했었을까. 잠깐 생각해 보았지만 기억에 없고, 아마 실제로도 별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를 다시 본 곳은 장례식장이었다. 장례식장은 알 수 없는 낯선 이유들로 분주한 모습이었고, 그 속에는 덩그러니 할머니의 영정 사진만이 놓여있었다. 할머니 얼굴을 본 후에야 죽음을 실감하게 된 나는 그 자리에서 울기 시작했다. 할머니에게 미안해서, 아빠에게 미안해서 계속 울었다. 사실은 울지 않으면 내가 너무 나쁜 년이 될 것 같아 무서워서 엄마 앞에서 계속 울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4년, 부모님은 요새도 가끔 ‘너가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울어서 많이 놀랐다’라는 이야기를 하시곤 한다.
“내 마음이 가는 그 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갈 수 없는 먼 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하는 사람”
영화 속 옥주가 계단에 앉아 할아버지와 함께 신중현의 <미련>을 듣는 그 장면에서 계속해 눈물이 났다. 아마도 그 장면에서 나는, 무의식 깊은 곳에서부터 할머니의 죽음에 빚이 있는 것 같아 슬픔과 괴로움들이 떠올라 눈물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옥주는 할아버지를 만나고 떠나보내는 여름밤 동안 한차례 성장하지만, 할머니를 떠나보낼 때의 나의 여름밤은 내가 성장하기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내가 이렇게 할머니의 부재를 겪을 동안 나의 남동생은 이 시간을 어떻게 지나왔을까. 앞으로 우리는 어떤 ‘부재’를 만나며 어떻게 성장하게 될까.
영화 속에서의 ‘옥주’라는 캐릭터는, 가족들 사이에서 할아버지와의 친밀도가 가장 낮은 인물처럼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모와 아빠가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려고 했을 때, 그의 집을 팔려고 했을 때 옥주는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다시는 더 이상 무언가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옥주는 아빠가 판매하던 나이키 짝퉁 운동화를 훔쳐 좋아하는 아이에게 선물하지만 이후 다시 뺏어온다. 뺏은 운동화를 싣고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 페달을 굴리는 옥주의 모습은 절박하기도 혹은 간절해 보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아빠도, 집도, 할아버지도 다 잃게 될까봐 페달을 굴리고 굴려서 전부 다 처음 제자리로 돌리고 싶어하는 것처럼.
할아버지 장례 후 다시 돌아온 옥주는 그의 집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들어간다. 그가 없는 집에서 그가 없이 밥을 먹다 울음을 터뜨린 옥주는 비로소 그의 부재를 맞닥뜨리며 슬픔을 쏟아낸다.
몇 년간 긴 서울 생활을 끝낸 나는 다시 고향인 광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오랜만에 친구와의 식사를 위해 길을 나섰다. 약속 장소로 가던 나는, 낯설지 않은 어떤 길을 마주하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 길은 할머니가 입원하셨던 요양병원에 가던 길이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 특별한 의미조차 없었던, 살가운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던 그 곳을 지나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람을 가르며 전속력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던 옥주처럼, 밥을 먹다 갑작스레 울음이 터져버린 그 아이처럼, 나는 그 길에서 나도 모르는 내 마음속 옥주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내 마음이 가는 그 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갈 수 없는 먼 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하는 사람”
김추자의 <미련>이 가슴 속 어딘가에 박힌 미련처럼 돌고 돌아 다시금 흘러나온다. 할머니를 잃은 뒤 여러 해를 보낸 나는 알게 되었다. 누구나 지나온 시절들이 있고, 누구나 언제나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지난다는 것을.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는 오은 시인의 말을 빌려 나에게 ‘부재’는 영원한 미련이자 옥주가 바람을 가르며 전속력으로 굴리는 페달일지도 모르겠다. 매년 마다 찾아오는 가을 앞에서 나는 긴 오늘을 산다. 할머니가 없는 이 계절이 가끔은 아주 외롭고 그립다.
“미련 없이 잊으려 해도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가을 하늘 드높은 곳에 내 사연을 전해 볼까나 기약한 날 우리는 없는데 지나간 날 그리워하네 먼 훗날에 돌아온다면 … ” □
글쓴이. 이다혜 (광주여성영화제 프로그램 팀장)
- 고향인 광주에 내려와 2019년부터 광주여성영화제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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