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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구가 보내는 안부 - 영화 <개의 역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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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1. 3. 9.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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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본 리뷰는 퍼플레이와 미디액트가 진행한 온라인 워크샵 <자기만의 글 - 페미니즘 영화 비평 쓰기> 1, 2차 강좌 (주강사 : 김소희, 정지혜)의 수강생이 작성한 비평 수료작입니다. 교육 수료작으로서 수정없이 게재합니다.
* 총 8편의 비평 수료작은 매주 2편씩 4주에 걸쳐 여성영화 온라인 매거진 퍼줌(PURZOOM)과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 저널 ACT!에 공동 게재됩니다.

 

[미디액트X퍼플레이 '페미니즘 영화비평' 수료작]

 

 

백구가 보내는 안부

<개의 역사> 리뷰

 

이도

 

 

서울 평범한 동네, 마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에 백구 한 마리가 산다. 꽤 오랜 시간을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옆을 지나다니던 동네 사람들도 그 개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 그런 동네 사람들에게 좀 더 깊은 질문을 하며 그 개에 대하여 카메라를 들고 조금씩 알아가려는 김보람 감독, 동시에 15번째 이사를 준비한다. 그리고 그 카메라는 이내 백구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의 풍경처럼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풍경 밖으로 꺼내려한다.

 

    개의 ‘역사’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영화를 틀었다. 그런데 첫 장면이 ‘백구가 죽었다’였다. 주인공인 백구가 죽었다니. 그리고 빨래를 널고 있는 감독의 모습. 감독이 백구에 대해 물어보고 다니자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던 기억들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모아진 퍼즐의 조각들이 완성되지 못한 채 영화는 또 다른 퍼즐들의 조각을 보여준다. 주목받는 과거를 보냈던 홍은동 아주머니, 노인정에 남아 앉아있는 할머니, 그리고 남자친구와의 이별, 부모님의 이혼, 키우던 강아지 못난이의 죽음을 등 다양한 이야기들 속에 감독의 이야기도 중간중간 삽입된다.

    공사장 시퀀스, 새로 지어진 24시 편의점, 높은 계단 대신 생긴 엘리베이터, 새로운 아파트. 사람들은 편리해졌다고 말하지만 계단에 도란도란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풍경은 사라졌다. 계속된 발전 속에 밀려나고 밀려나 정착하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도시 속에서 모든 것은 쉽게 떠나고 쉽게 잊혀진다. 때로는 나의 의도 혹은 잘못과는 상관없이 내가 채우지 못한 빈틈을 채우고 있는 누군가에게 밀려난다. 심지어 그 존재가 나보다 낫다는 것이 인정될 때 느껴지는 씁쓸함. 살면서 입시, 취직, 결혼 등 경쟁 아닌 경쟁에서 주연에서 조연으로 밀려났던 경험이 없는 이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 존재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지만, 정작 밀려난 나 자신에 대해서는 바라보지 못했다. 카메라 속의 백구와 감독은 영화를 통해 나에게 ‘너는 어떻게 지내? 나는 이렇게 지내고 있어’라고 묻는 듯하다. 홍은동 아주머니의 도전이 무산된 것을 볼 때면 아쉬움과 동시에 약간의 안도감이 드는 듯했다. 실패자들의 연민, 혹은 동질감. 단순한 동정과는 다르다. 아주머니를 포함한 인물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단순 연민이 아니라, 소통의 시도가 더해져 나에게도 진심 어린 위로가 된 것이다. 게다가 공통적으로 이들은 밀려남으로 인해 소통이 어려워진 존재들이다. 감독은 이런 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존재들에게 귀를 기울인다.

 

▲ <개의 역사> (2017, 김보람) 스틸컷

 

    ‘어떤 사랑은 증명을 통해서만 구체화되고 힘을 얻는다. 만일 그 사랑이 한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나 환경,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역사적 시간에 대한 것이라면, 그래서 그 사랑이 이해이고 공감이고 연대라면, 그것은 분명히 증명되어야 한다. 다큐멘터리는 그 사랑을 포기하지 않음으로 증명한다.’ 다큐멘터리 작가 양희의 인터뷰집 <다큐하는 마음>에 수록된 구절이다. 감독이 보여주는 소통의 부재를 겪는 존재들은 크게 말을 할 수 없는 존재, 발화에 대한 욕망이 있지만 듣는 이가 없는 존재, 대화의 공간은 있지만 소통이 어려운 존재로 나뉘어진다.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밀려나 있다. 젊은 시절 글도 쓰고 한 분야의 심사위원을 맡을 정도로 유망했지만 새로운 도전을 하려는 홍은동 아주머니에게 세상은 더 이상 그녀의 이야기를 전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런 개를 왜 찍어요’, ‘귀가 안 들리니 대화가 안돼요’. 듣는 이가 없다고 해서 소통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에 담겨진 존재들을 보며, 나한테만 신경 쓰고 나만 잘하면 되는 세상이지만 한 번쯤 서로에게도 귀를 기울여보자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영화에서 보여준 시위 장면처럼 일시적으로 마음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받는 존재가 있는 반면, 조금 더 챙김을 필요로 하는 존재도 있는 것이다. 노인정에 홀로 남아 앉아있는 할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마주치며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할머니 귓가에 가까이 가서 ‘할머니가 살아오신 얘기 좀 듣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감독. 보통 다큐멘터리에서 연출자와 등장인물의 관계는 주로 인터뷰이와 인터뷰어로 설정되기 때문에 인터뷰이의 답변만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도 많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할머니의 살아오신 이야기(답변)만 보여주지 않고 감독이 할머니에게 질문을 하며 소통하려고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 덕분에 다른 다큐멘터리의 연출자-등장인물 관계를 뛰어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어쩌면 감독이 백구를 포함해 등장인물들을 대하는 소통의 방식과 <개의 역사>가 영화로써 작용한 역할을 모두 보여준 장면인 것이다. 영화의 형식은 곧 주제이다. 누가 이런 자세로 남들은 궁금해하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이렇게 자세를 낮추고 눈을 맞추며 나의 이야기를 묻는 이에게 함구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귀가 잘 안 들려 의사소통이 안된다는 보호자와는 달리 할머니도 감독에게 말을 걸고 감독도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는 이 관계는 소통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어 보인다. 게다가 그런 감독에게 보호자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주변 사람들도 어디서 촬영을 온 거냐며 경계를 하게 될 수밖에 없어진 세상을 보며 도시의 단절이 대조되어 보인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카메라를 든 감독의 시선이 더욱 따듯하게 느껴질 뿐이다. 지나가는 이에게 궁금증을 가지고 질문을 한다면 영업이나 사기꾼 정도로 보일 정도로 이상한 행위가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밀리고 밀려 옆의 누군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소통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분명 있을 것이다. 감독은 백구를 시작으로 그 안에서의 관계를 살펴보는 시선을 우리에게 선사해 준다.

 

    ‘이름 없는 것들의 찾지 못한 이름들이 사라져가는 것들의 지워져가는 시간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던 밤이 있었다’. 감독이 학생에게 가르치던 장면처럼 스무 개의 사건들 중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건 열두 개를 고른다면 ‘개의 역사’는 남은 여덟 개의 이야기에 속할 것이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이야기라 하면, 예를 들면 영화의 두 번째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자신의 외형 변화를 통해 성공을 꿈꾸는 홍은동 아주머니의 성공 스토리일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다른 참가자로부터 ‘밀려난’ 홍은동 아주머니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녀의 삶을 담아낸다. 감독이 백구에게 호기심을 갖게 된 계기 또한 같을 것이다. 카메라에 포착된 백구는 감독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주인도 없이 떠돌다 슈퍼 아저씨에 의해 슈퍼 앞에 놓여진 백구가 15번째 이사를 준비하는 본인 같아서 관심을 준 것이 아닐까, 백구 옆을 지나다니는 수많은 동네 사람들처럼 감독의 주변에서 감독을 그냥 지나친 사람들로부터 받고 싶었던 관심이 아니었을까, 도전이 실패한 뒤 어떻게 다시 살아가고 있는지 누군가 물어봐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백구의 역사를 찾으려던 감독은 그들을 바라보는 관찰자이자 주인공이 된다. 감독은 끝내 영화 제목에 걸맞는 백구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속속히 다룬 ‘역사’를 보여주는 것에는 실패한다. 하지만 백구를 통해 자신의 역사 쓰기, 김보람의 역사 쓰기를 한 셈이다. 영화를 보며 등장하는 이들에 대한 나의 감정은 단순한 동요가 아니라 나의 모습을 투영한 데에서 나오는 감응이자 위로였다. 언제나 존재하고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귀 기울여 들어보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에 먼저 귀를 기울여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해준다. 마을의 한 풍경 같은 여기저기에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미는 감독과 그런 그녀를  조금은 수상하게 바라보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 오해와 왜곡이 발생하는 이 도시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알고 있냐는 질문이 된다. 백구의 역사를 물으며 자신의 역사 쓰기를 한 감독처럼 백구에게 갖은 애정 어린 관심을 통해 김보람 감독, 그리고 나 자신에게 안부를 묻는다.

 


글쓴이. 이도

- [자기만의 글 - 페미니즘 영화 비평 쓰기] 수강생

-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를 사랑하는 세 단계 모두 실행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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