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청소년 영화에서 청년 영화로 연구범위를 넓히고, 아홉 명의 시민연구자를 찾고, 시간을 내어 발굴한 69편의 영화를 모두 관람하고, 시민비평을 공동집필하고, 온라인 기획전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이 올해 여름과 가을 사이에 이루어졌다. 분산된 2010년대 지역 청소년과 청년의 기억을 모아 그것을 오늘 이곳에서 살고 있는 우리 공동의 기억으로 바꾸어냈다."
[ACT! 123호 미디어 큐레이션 2020.12.16.]
개인의 경험에서 공동의 기억으로
- 2020년 성남시 생애주기별 마을미디어 아카이브
임종우(ACT! 객원 편집위원)
연구의 명분을 찾아서
2017년 여름, 나의 전공교수였던 김동현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님의 제안으로 영화학교 졸업을 앞두고 다시 지역으로 돌아갔다. 감사하게도, 덕분에 그곳에서 독립영화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영화관에 와이드릴리즈하지 않는 수면 아래의 영화들, 역사화되지 않는 영화들, 지역 시민들이 만드는 영화들, 독립영화인이라는 자기인식이 없는 사람들이 만드는 독립영화들을 만났다. 이것들은 낮은 완성도 탓에 주요 영화제에서 탈락했고, 대부분의 감독은 출품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영화들은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내가 이 작업들을 독립영화의 역사 위에 올려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눈에 밟혔던 영화는 지역 청소년 영화감독의 다큐멘터리 작업들이었다. 2012년부터 2019년까지 DMZ국제다큐영화제 청소년 다큐멘터리 영화제작 워크숍의 일환으로 만들어졌고, 성남미디어센터와 분당정자청소년수련관이 해당 프로그램을 운영한 바 있다. 이 영화들을 우선적으로 다루고 싶었던 이유는 사실, 그것들이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소년 영화감독 몇 명과의 라포르형성이 충분히 진행된 상태였다. 청소년 다큐멘터리 영화제작 워크숍을 오랜 시간 진행한 후 직접 매듭을 지었던 김기봉 성남시청소년재단 선생님의 제안도 큰 동기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내 앞에 있는 것부터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앞으로 새로운 작업을 발굴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을미디어를 연구하는 마을미디어?
문제는, 모두가 예상하듯, 자원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누구도 석/박사 학위도 없고, 전임 대학교수도 아닌 나이 어린 청년에게 연구사업을 만들어 맡길 리 없었다. 미디어센터에 독립영화제작 지원사업은 있지만 독립영화연구 지원사업은 없다. 영화제 상영과 수상이력이 풍성하지 않은 이 영화들을 연구할 필요성이 충분히 있다는 인식의 합의점을 지역에서 찾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쩌다 알게 된 소규모 연구사업에 지원했지만 보기 좋게 탈락했고 한참 의기소침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기봉 선생님의 추천으로 성남미디어센터 마을미디어사업 공고를 보았다. ‘이걸로는 안 될까?’ 망설였지만 이내 결심했다. 청소년의 영화들을 마을미디어로 번역해야겠다고 말이다. 엄밀하게 말해 개별 작품은 마을미디어 콘텐츠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총체, 10년 가까이 쌓인 청소년 영화 아카이브는 마을의 역사와 지역 청소년세대 의제의 변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이것이 마을미디어가 아니라면 무엇이 마을미디어일까?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많은 질문을 받아야 했다. “마을미디어를 연구하는 마을미디어단체” 사례가 없어 성과지표가 명확하지 않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청소년의 작업만을 살펴보는 것이 협소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시민들이 참여하지 않는 소위 ‘먹물의 잔치’가 되지 않겠느냐는 의심도 받아야 했다. 이에 나와 동료들은 전반적으로 기획을 개선하기로 했다. 청소년에서 청년세대를 아우르는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동료 연구자로의 시민의 자리바꿈을 이끌어내며, 활동결과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방향으로 프로젝트를 바꾸어나갔다. 그 결과 청년의 진로선택을 지원하는 대안학교 ‘일하는학교’ 구성원들이 2017년부터 만든 영화를 추가로 발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지역 청소년과 청년이 만든 영화 69편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때 “성남시 생애주기별 마을미디어 아카이브: 2010년대 청소년과 청년의 경우”라는 이름을 프로젝트에 붙였던 것 같다.
시민참여적인 문화연구와 문화기획 프로젝트
이런저런 노력 끝에 아홉 명의 시민연구자를 섭외해 8월부터 참여적인 문화연구를 진행했다. 온라인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69편의 영화를 보며 다양한 생각과 고민을 공유했다. 잠시, 김기봉 성남시청소년재단 선생님과 이정현 일하는학교 선생님의 자료기증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꼭 언급하고 싶다. 다시 돌아와 성남시민으로서, 청년세대로서, 후기 청소년으로서 영화를 분석하며 아카이브의 의미망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역할을 나누어 모든 작품에 대한 짧은 비평을 작성해나갔다. 동시에 상영기획 워크숍을 운영, 온라인 기획전을 함께 준비했다. 투표를 통해 기획전 제목을 정하고 여러 차례 회의를 거치며 상영 프로그램을 구체화했다. 이렇게 순조롭게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는 듯했다.
텅 빈 아카이브를 마주했을 때
예상치 못하게 상영섭외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었다. 영화감독의 연락처가 바뀌어 접촉할 수 없게 되거나 연락망 자체가 유실되어 있었다. 상영허락을 받았지만 상영본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운영기관에서 원본파일이나 DVD 자료를 폐기한 것이다. 우리의 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기존 아카이브 위에서 생산하는 일종의 “2차 아카이브”인데, 전자 자체가 비어 있었다. 소멸한 기억과 텅 빈 아카이브를 바라보며 낙담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우선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되새기면서 “상영하고 싶은 영화”보다는 “상영할 수 있는 영화”를 우선적으로 찾아나갔다. 그 결과로 10월 24일부터 이틀간 12편의 영화와 60편의 시민비평을 온라인에 전시하였고 670여명의 관객을 만났다.
개인의 경험에서 공동의 기억으로
지역 청소년 영화에서 청년 영화로 연구범위를 넓히고, 아홉 명의 시민연구자를 찾고, 시간을 내어 발굴한 69편의 영화를 모두 관람하고, 시민비평을 공동집필하고, 온라인 기획전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이 올해 여름과 가을 사이에 이루어졌다. 분산된 2010년대 지역 청소년과 청년의 기억을 모아 그것을 오늘 이곳에서 살고 있는 우리 공동의 기억으로 바꾸어냈다. 개인적으로는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나서야 2020년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지역 마을미디어의 여성주의적 재구성”을 주제로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2016년 일하는학교에서 제작한 청년노동 다큐멘터리 네 편을 복원하는 일도 후속과제로 남았다. 어딘가에 있을 지역 활동가와 예술가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곧 문을 두드리러 가겠다고 말이다. □
※ 온라인 기획전 <지역의 변천사, 젊은 예술과 표현: 성남시 생애주기별 마을미디어 아카이브, 2010년대 청소년과 청년의 경우>(2020)의 흔적은 아래 링크에서 찾을 수 있다.
▮ 관련 사이트
- 성남시네미디어포럼 공식 홈페이지 https://seongnamforum.blogspot.com/
글쓴이. 임종우(ACT! 객원 편집위원)
- 2018년부터 2020년 가을까지 ACT! 리뷰 담당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경기도 성남시에서 영상문화운동에 집중하는 중이다. 모두를위한극장 공정영화협동조합의 운영위원이며 성남교육영화제 총괄 프로그래머이다. 대학교에서는 한국독립영화의 역사와 미디어교육 기획 방법론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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