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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든 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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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기다렸던 관객들의 함성 소리를 들었다. 물이 들어온 갯벌은 부드러웠고 옆에서 환한 미소로 모든 것을 지켜보던 이강길 감독의 웃는 모습 또한 한없이 맑았다."

 

 

[ACT! 118호 이강길을 기억하며 2020.03.13.]


카메라를 든 어부, 이강길


안창규(독립 다큐멘터리 감독)


  1월 25일은 설날이자, ‘카메라를 든 어부’ 이강길 감독이 급성 백혈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신 날이다.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은 지 4일만이었다. 갑자기 치러진 장례에서 그가 살아왔던 길을 제대로 돌아보긴 어려웠다. 이강길 감독과 제대로 이별할 준비도 못한 채 그렇게 허망하게 장례를 마쳤다. 

▲ 2020. 1. 27. 분당메모리얼파크, 故 이강길 감독 (사진 제공: 안창규) 



2004년 <새만금 핵폐기장을 낳다>

  이강길 감독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몇 가지 이미지들이 희미하게 떠오르며 가장 먼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단어는 ‘고집 센’ 이었다. 
  2003년 부안 위도에 핵폐기장 건설이 결정되면서 부안 군민들은 격렬하게 핵폐기장 건설 반대 투쟁을 벌였다. 2000년 새만금 방조제 반대 투쟁을 기록하고 있던 이강길 감독은 자연스럽게 부안 핵폐기장 반대 투쟁을 기록하게 되었다. 
  2004년 부안 핵폐기장 반대 투쟁의 일환으로 군민들은 자체적으로 ‘부안영화제’를 기획했다. 당시 학생이던 나는 서울국제노동영화제 기획단 사람들과 영화제를 지원하기 위해 부안으로 내려갔다. 제1회 부안영화제는 부안 군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으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폐막작은 이강길 감독의 <새만금 핵폐기장을 낳다>였고, 폐막식은 핵폐기장 예정지인 위도 앞 격포에서 진행되었다. 많은 부안 군민들이 격포로 모여 들었고 폐막식 행사까지 무사히 마쳤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폐막작인 <새만금 핵폐기장을 낳다>가 상영되면서 예상치 못한 항의를 받기 시작했다.
  “새만금 방조제와 핵 폐기장은 별개 문제야!” 
  “새만금 방조제가 완성이 돼야 부안이 살 수 있어!”
  다큐멘터리 내용은 새만금 방조제와 핵폐기장은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이고 부안 군민들이 생존의 터를 지키기 위해서는 새만금 방조제 건설도 같은 선상에서 싸워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부안군민들은 핵폐기장은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험한 시설이고 새만금은 부안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노다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연히 이강길 감독의 <새만금 핵 폐기장 낳다>는 군민들이 보기에 불편한 영화였다. 
  영화 상영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는 군민들 사이로 큰 소리로 논쟁하는 사람이 있었다.
  “새만금까지 막아내야 삶의 터전을 지킬 수 있어요!”
  처음에는 새만금 방조제를 반대하는 군민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그 사람이 이강길 감독임을 알게 되었다. 흥분한 다수를 상대로 절대 지지 않고 막서는 모습. 그게 이강길 감독의 첫 인상이었다.

  얼마 전 부안을 다녀왔는데, 새만금 방조제로 인해 갯벌은 사라졌고 많은 군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었다. 그때 이강길 감독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지금은 군민들의 생활 수단이었던 부안 백합을 찾아볼 수가 없다.


2005년 제2회 부안영화제

  두 번째로 스치고 지나가는 단어는 ‘까칠한’.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던 시기에, 부안영화제에 사람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제1회 부안영화제 때와는 달리 핵폐기장 건설이 백지화되고 영화제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던 때였다. 나는 프로그래머란 이름으로 부안영화제를 3일을 남겨놓은 시점에 부안 계화도로 내려갔다.
  새만금 방조제 반대 투쟁의 거점으로 계화도에 ‘그레’라는 공간을 만들었는데, 영화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그레’에 모여 격렬하게 토론 중이었다. 쟁점은 폐막식 장소였는데, 영화 상영이 용이한 부안성당이냐, 새만금 방조제 반대의 상징적 장소인 계화도 갯벌이냐를 놓고 싸움 직전까지 가고 있었다.
  이강길 감독은 갯벌에 상영하기 위해서는 구조물을 세우고 전기도 끌어와야 하는데 영화제가 얼마 남지 않는 시점에서 무리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양쪽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합의점을 찾지 못할 시점에서, 서울에서 막 내려온 나에게 이강길 감독이 의견을 물었다. 당시 나는 어떤 상황인지 파악도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질문을 받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거면 왜 내려왔어!”
  이강길 감독이 나에게 소리를 쳤다. 내려온 지 30분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결국 폐막식은 계화도 갯벌에서 진행하기로 결정이 났다. 다음날부터 영화제 실무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실무 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때 구세주로 나섰던 게 이강길 감독이었다. 
  이강길 감독은 작은 성당 식당 건물에 스크린을 세우고, 문규현 신부님에게 진공 엠피를 빌려 음향 장비를 세팅했다. 관객들에게 밥을 제공하면서 스스로 영화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든 것도 이강길 감독이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에는 폐막식을 진행할 갯벌에 무대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3일 동안 영화제는 큰 문제없이 운영되었고, 드디어 마지막 폐막식 날이 되었다.
  갯벌 한가운데에 설치된 무대에서 계화도 주민들의 폐막식 공연이 끝난 후 폐막작 상영만을 앞두고 있었다. 상영 데크 앞에 나 혼자 서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순간. 물때도 아닌데 무대가 설치된 갯벌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때 멀리서 전깃줄이 물에 닿지 않게 나무들을 들고 제일 먼저 뛰어왔던 사람이 이강길 감독이었다. 
  다행히 바닷물은 발목까지만 차올랐고 상영 데크에 플레이를 누르는 순간 영화를 기다렸던 관객들의 함성 소리를 들었다. 물이 들어온 갯벌은 부드러웠고 옆에서 환한 미소로 모든 것을 지켜보던 이강길 감독의 웃는 모습 또한 한없이 맑았다. 
  영화제를 끝내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 이강길 감독이 버스터미널까지 마중 나왔다. 고생했다며, 다큐멘터리 작업은 재미있는 일이라며, 다큐멘터리를 하는 것도 생각해 보라고 했다. 꼭 이강길 감독의 말 때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다. 


2008년 <어부로 살고 싶다 – 살기 위하여>

  2008년 시민방송 RTV에서 시민제작자로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었다. <어부로 살고 싶다 마지막 3부작 - 살기 위하여>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여 내가 만드는 프로그램에 소개하게 되었다.
  편집을 위해 이강길 감독에게 영상 클립을 받았다. 영화 안에는 계화도 주민으로서 이강길 감독이 보였다. 계화도 주민 유기화 씨의 죽음에 대한 슬픔, 카메라를 배 기둥에 묶어 두고 조업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생활비를 벌기 위해 배를 탔다.),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하면서 경찰 보트를 밀어 내는 모습, 주민들의 생활 터전인 갯벌을 지키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주민들과 항상 함께 했다. 그런 이강길 감독의 마음을 인터뷰 내내 느낄 수가 있었다.
  “다큐멘터리를 하는 사람들은 남의 아픔을 먹고 사는 사람이라 현장에서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인터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다. 이강길 감독은 사람 좋아하고 따뜻하고 정 많은 사람이었다. 

▲ (왼쪽) 조업 중인 이강길 감독 (사진 제공: 안창규) 



2019년 <설악, 산양의 땅 사람들>

  2015년,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건설이 환경부에 조건부 승인을 받았다. 국립공원인 설악산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싸움이 시작되었다. 싸움이 시작된 시기부터 이강길 감독은 카메라를 메고 설악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2017년 겨울 어느 날, 이강길 감독에게 전화를 받았다. 
  “원주지방환경청에서 노숙 투쟁 중인데 내가 몸이 좀 안 좋아. 촬영을 도와줄 수 있니?”
  차를 몰고 원주로 향했다. 원주지방환경청에 도착해보니 사람들이 천막도 없이 비닐 하나에 의지해서 환경청 건물 앞에 노숙을 하고 있었다. 이강길 감독은 감기로 몸이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 모습이 안쓰러워 감기가 떨어지게 근처 모텔에서 따뜻하게 자고 오라고 권했다. 
  “다른 사람들이 비닐 하나 덮고 노숙하고 있는데 나 혼자 따뜻한 모텔에서 어떻게 자냐?”
  결국 이강길 감독은 고집대로 비닐 하나에 의지해 아침을 맞았다. 


2020년 1월 25일 설날, 이강길 감독 빈소

  1월 25일 설날, 아침에 문자 하나를 받았다. 
  ‘[부고] 이강길(영화감독) 별세.’
  문자를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한 달 전 여성 춤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예정이라고, 댄스 학원 한켠에 자리 잡은 사무실에서 이강길 감독을 만났다. 특별히 건강에 이상이 없어 보였다. <설악, 산양의 땅 사람들> 작업을 하면서 어깨가 망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3~4명이 들고 올라갈 장비를 혼자 짊어지고 그 높은 설악산을 오르락내리락 했던 결과였다. 왜 그때 눈치 채지 못했을까?


  빈소에 찾았을 때 이강길 감독의 영정 사진을 보고서야 죽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2년 전 세월호를 기록하던 박종필 감독을 간암으로 보내고, 현장에서 기록하던 이강길 감독마저 허망하게 잃었다. 누구보다 현장에서 헌신적이었고, 약자들 편에 서서 카메라를 들고 부당함을 알리며 싸웠던 사람들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고 스스로 했던 일이라 그랬을까?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묵묵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었다.


  이강길 감독이 마지막으로 지냈던 사무실 풍경이 생각난다. 1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장비들로 빽빽하게 들어찬 곳에서 방음 하나 되지 않고 댄스 연습실에서 울려 퍼지는 소음을 들으며, <설악, 산양의 땅 사람들> 편집을 했다. 사무실 구석에서 선잠을 자며 작품을 완성시켰다. 그래서였을까? 한참 활동할 나이에 허망하게 세상을 등졌다. 까칠했지만 따뜻했던, 헌신적이고 좋은 사람을 잃었다. 이강길 감독을 아버님 곁에 안치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료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그랬다. 노환으로 떠나는 장례식에서 보자고. 그런 동료 감독에게 말했다. 노환으로 장례식을 맞이하려면 다큐멘터리를 그만 둬야 한다고.

▲ 2020. 1. 27. 분당메모리얼파크, 이강길 감독을 보내고 (사진 제공: 안창규) 



이강길 감독을 보내고

  설날 이후 건강을 챙기라는 문자를 많이 받았다.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가벼운 안부나 덕담을 넘어 받았던 문자들에 무게가 느껴졌다. 나에게 물었다. 
  “나는 괜찮은가?”
  “다큐멘터리를 계속 하면서 살 자신은 있는가?”
  액티비즘.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 그런 수식어를 달고 아직 현장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현저히 줄었다. 내 경험에 비춰 봤을 때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들이 있다. 현장을 카메라로 지키려는 별도의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지킬 수 없다. 현장 밖에서 미디어교육을 하거나 홍보 영상이나 웨딩 촬영 등 현장과 별개로 다른 일들을 병행해야만 현장을 지킬 수 있다. 

  이야기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현장에서의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도 있다. 어렵게 생계와 병행하면서 현장을 지키고 기록을 해도, 기록물은 어느덧 공공의 자산이 된다. 주요 언론사나 시사 프로그램에서 기록한 영상을 사용하고 싶다고 연락을 받는다. 사용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면 마치 돈을 밝히는 사람 취급을 한다. 정작 자기들은 월급을 받으며 생활하는데 말이다. 영상 사용에 대해서 거절하면 십중팔구 현장에 있는 당사자에게 연락해서 난처한 상황을 만든다. 당사자들은 현장 이야기가 공중파에 나가면 자신들에 이야기를 알릴 수 있으니 절실할 수밖에. 울며 겨자 먹기로 영상을 무상으로 제공하면 마치 자기들이 촬영을 진행한 것처럼 프로그램이 나온다. 아니면 엔딩크레딧에 자료제공 OOO 정도. 

  현장의 인식 또한 문제이다. 현장의 미디어 활동가나 다큐멘터리 감독은 자원봉사로 인식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작고 열악한 현장이야 어쩔 수 없지만 여유가 있는 현장에서도 항상 뒷전이다. 행사가 있을 때 필요한 영상이 있으면 언제나 그 몫은 현장 미디어 활동가의 몫이다. 촬영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스토리텔링을 잡고 편집까지 진행하면 많은 품이 든다. 그래서 어렵게 결과물을 만들면 품에 비해서 적은 비용을 받는다. (열악한 곳은 비용 없이 진행되는 경우도 많다.) 예산에서 영상물은 매번 뒷전이다. 현장을 알리기 위해서 연대하는 마음으로 현장을 찾아가는 미디어 활동가와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많아서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요구하기에 어려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가끔 어렵게 노동의 대가를 요구하면 “자원봉사자 아니었어?”라는 말을 듣는다. 내가 현장에서 실제 들었던 말이다.

  건강이나 트라우마 치료도 개인의 몫이다. 이강길 감독 경우만 보더라도 그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짊어지고 설악산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절대 자기가 아픈 걸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인데 최근 만날 때마다 어깨가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분명 현장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될까봐 어깨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서 활동했던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힘들어 했었다. 노동 분쟁이 있는 현장이나 국가 개발에 반대해 싸우는 현장 등 여러 다른 현장들 역시 정신적으로 힘든 부분들이 많다. 여러 가지 폭력들에 노출되거나 죽음을 경험하거나 투쟁 당사자들의 힘든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1년간 목포신항에서 기록을 하면서 많은 죽음들을 간접 경험했고, 유가족들에 슬픔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같이 활동했던 박종필 감독을 잃었던 경험도 온전히 겪었다. 세월호 기록을 마치고 몸도 그렇지만 트라우마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세월호가족협의회’에서 트라우마 치료를 권하기는 했지만 안산까지 거리가 멀기도 했고 가장 힘든 건 유가족들인데 걱정을 끼칠까봐 고사했었다. 대신 쌍용자동차 투쟁으로 인해 만들어진 심리치료센터 ‘와락’의 도움을 받았다. 다행히 신경써주신 분들이 많아서 치료도 받을 수 있었지만 많은 미디어 활동가들이 현장에서 받은 트라우마를 치료 받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최근 박종필 감독이 돌아가신 후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녹색병원과 연계한 미디어 활동가 건강검진 사업이 진행됐었다. 굉장히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지속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온전히 이강길 감독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글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글 말미에 푸념처럼 늘어  놓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현장은 크게 달리지는 게 없지만 말이다. 계속 현장을 지키던 사람들이 죽거나 아파서 떠나거나 아니면 경제적인 이유로 떠나간다며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건강할 때 떠났으면 좋겠다. 죽지 말고, 아프지 말길. 이런 인사가 적당하지 않다는 걸 알지만. 

  마지막으로 이강길 감독에게 인사하고 싶다. 이강길 감독님. 고생 많았어요. 누구보다 참 열심히 하셨어요. 누구도 이강길 감독만큼 못할 거예요. 고마웠어요. 이제 편안하게 쉬세요. □

 

 


 

글쓴이. 안창규

- 여행, 냉면, 다큐멘터리 덕후. 맥주를 좋아하는 통풍환자.

안창규(독립 다큐멘터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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