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강길 형에게

본문

“새만금 작업을 하면서 형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참 많았는데 이렇게 황망히 가니 저는 갑자기 미아가 된 기분입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의 삶은 계속 되고, 그러니 저는 또 힘을 내서 카메라를 들어야겠지요.” 

※ 2020년 1월 27일, 장례식장에서 추모사로 읽었던 글을 고치고 보태서 싣습니다.

 

[ACT! 118호 이강길을 기억하며 2020.03.13.]


강길 형에게


황윤(독립 다큐멘터리 감독)


  불과 열흘 전,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을 다시 보는 상영회가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서 열렸습니다. <설악, 산양의 땅 사람들>(2019)이 상영되었고, 저는 그 자리에서 형과 함께 관객과의 대화를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에요. 형은 그때 이번 감기가 독해서 오래 간다며, 다음 날에는 순천에서 ‘환경과 생명을 지키는 교사 모임’과 함께 영화 상영이 있어 내려가기로 했다며, 습지를 찍었던 영상도 편집해야 하고, 고등학교 친구이자 문화노동자인 연영석님의 뮤직비디오도 찍을 거라며 작업과 다큐멘터리 배급에 대해 저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맥주도 한 잔 했는데,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2020.1.15.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왼쪽부터) 관객과의 대화 중인 황윤 감독과 이강길 감독 


  장례식이 있고 얼마 후, 강길 형의 큰형이 전화를 주셔서 의사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입원했을 때 혈액 수치를 보니, 보통 사람이 견딜 수 없는 통증이었을 텐데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는군요. 그렇게 아픈 데도 전주까지 와서 관객과의 대화를 했던 거군요. 강길 형은 언제나 약자들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영화학교에서 다양한 영상의 세계를 경험한 형은 1990년대 후반 ‘푸른영상’을 찾아가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한창 새만금 간척을 막고자 싸우는 주민들의 활동을 기록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2~3개월 계획으로 달려간 현장에서 10년을 함께 했습니다. 2007년 서울환경영화제 관객심사단상, 2008년 교보생명 환경문화상 환경예술부문 대상 등을 받으며 ‘환경 다큐 감독’으로 불렸지만, 정작 형은 환경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생존의 이야기”를 할 뿐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내몰리는 갯벌 사람들, 핵 폐기장으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을 위기에 처해 있던 부안 사람들, 케이블카 사업으로 벼랑 끝에 몰린 설악산과 산양들. 형의 카메라는 늘 삶터에서 내쫓기는 여리고 소중한 생명들 곁에 있었습니다. 모두가 떠날 때, 형의 카메라는 그곳에 머물렀고, 가장 슬프고 억울한 자들의 곁에 있었고, 그들의 목소리를 마지막까지 전하는 ‘최후의 스피커’가 되고자 했습니다.

  강길 형의 별명은 ‘카메라를 든 어부’였습니다. 강길 형은 누군가를 피사체로 기록하는 것을 넘어 동지가 되고, 동생이 되고, 형이 되고, 아들이 되고, 삼촌이 되어, 그들과 함께 울고 웃고 살며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강길 형은 어디를 가든 현지인으로 오해받았습니다. 외모뿐만 아니라, 그 우직하고 순박한 마음 하나로 형은 현지인과 하나가 되어 그들의 친구이자 가족이 되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폭염에도 혹한에도, 강길 형은 늘 현장에 있었습니다. 형의 이메일 아이디는 ‘카메라 아이’(camera eye), 독립다큐멘터리 제작사 이름도 ‘카메라 아이’, 현장을 지키는 눈,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 현장을 지키는 사람이고자 했습니다. 개발과 성장의 이름으로 짓밟히던 사람들의 편에서, 국책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는 공동체 한 가운데서, 가장 춥고 어두운 그늘에서, 그 어두운 그늘에도 사람이 있고 생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세상에 알리는 일을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천직으로 알았던 강길 형. 

  오래 전 어느 해 추석 때였나, 명절 잘 보내라고 형이 제게 안부 문자를 보내면서 주위에 괜찮은 아가씨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나요. 그때 저는 그 문자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렸고 딱히 마땅한 사람도 생각나지 않아 잊고 말았는데 형이 떠나고 나니 이제야 그 문자가 다시 생각나네요. 겉으로 볼 땐 강한 것 같아도 속으론 외로웠구나, 형이 혼자 살고 혼자 작업하고 혼자 아파하면서 보냈을 시간들을 떠올려 봅니다.

▲ (왼쪽부터) 이강길 감독과 황윤 감독


  살림살이는 가난했지만, 가방은 늘 무거웠습니다. 촬영 장비만으로도 무거운데, 현장의 동지들 먹일 간식으로 가득 차 있던 형의 배낭. 형은 동료와 후배 감독들이 우는 소리 하며 촬영을 부탁할 때도 언제나 무조건 달려와 주었던 고마운 사람입니다. 2015년 가을 원주에서 급하고 중요한 촬영이 있어서 형에게 SOS를 쳤을 때, 형은 팔 때문에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었지만 치료를 미루고 기꺼이 달려왔습니다. 그때는 고마운 마음뿐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선배가 어떻게 사는지 좀 더 챙겨주지 못한 제 자신이 참 원망스럽습니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은 하는지 물어보지 못한 제가. 

  저는 지금 새만금의 새들과 사람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있어요. 새만금 간척 사업 마지막 물막이 공사까지 치열했던 투쟁의 기록을 형의 영화가 담고 있다면, 저는 그로부터 십 수 년이 지난 이후 모두가 새만금을 잊은 지금 황무지가 된 그곳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주민들과 새들의 현재를 기록하고 있어요. 누군가의 가장 어두운 슬픔과 그 어둠 속에도 빛나는 찬란한 아름다움을 동시에 바라보고 기록하고 이야기해야 하는 저희 다큐멘터리 감독들의 삶이란. 이번 새만금 작업을 하면서 형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참 많았는데 이렇게 황망히 가니 저는 갑자기 미아가 된 기분입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의 삶은 계속 되고, 그러니 저는 또 힘을 내서 카메라를 들어야겠지요.

  지난 15일. 마지막 상영회일 줄 꿈에도 몰랐던 전주 상영회에서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 가운데 형은 욕이 섞인, 특유의 투덜이 스머프와 같은 말투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전에 제가 술을 엄청나게 먹고 문정현 신부님한테 전화해서 막 그랬어요. 종교인들이 몇 명이나 있는데 이 새만금도 하나 못 막느냐, 그러니까 신부님이 가만히 한참 듣고 계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 70살이 다 됐는데 내가 여태까지 이겨본 싸움이 없는 거 같다. 근데 너 지금 반 백 살 살았는데 뭐 이기기를 바라냐? 근데 말이다. 가만히 보니까 봉건제도가 안 무너질 것 같은데 무너지더라. 일제가 영원히 집권해서 한반도를 먹을 줄 알았는데 걔들이 패망하고 물러가더라. 유신독재가 안 무너질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무너져 있더라. 정말 군홧발로 짓이기고 굉장히 엄혹했는데 뒤돌아보니까 그 독재도 무너져 내렸더라.’ 그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중략) 그래서 저는 그런 거 같아요. 각자가 자기 일을 묵묵히 하고 있을 때, 그럼 비로소 언젠가는 우리가 원하는 그런 것들이 오지 않을까? 단지 그게 빨리 오느냐 늦게 오느냐에 따른 차이인데, 당장 내 앞에서 안 오기 때문에 답답함을 많이 느끼는 거 같아요.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이 계속해서 해야죠. 그게 제 방법인 거 같아요.”

  이기는 싸움을 해본 적이 많지 않은 저희들에게, 그날 감독님의 말씀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몰라요. 저를 포함해 그 자리에 있던 관객들 모두 어떤 바람에도 꺼지지 않을 기적의 불씨 하나를 가슴에 받아 안은 느낌이었어요. 형이 마치 유언처럼 남겨준 그 이야기, 유산처럼 남겨준 불씨,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리고 힘들 때마다 그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갈게요. 

  강길 형, 이제는 무거운 장비, 무거운 배낭, 그리고 무거웠던 책임감과 사명감 다 내려놓고, 편히 쉬세요. 형이 못다 한 이야기들은 저희들이 이어갈게요. 형이 꿈꾸던 생명과 평화의 세상, 반드시 올 수 있도록 저희가 더 큰 불이 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불씨를 나누어 줄게요. 훗날 언젠가 뒤돌아보면, 신부님에게서 형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그리고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퍼져 나간 기적의 불씨로 온 세상이 환하고 따뜻하게 밝혀져 있을 거예요. 먼저 간 박종필 선배 만나 술 한 잔 하시고, 먼저 간 계화도 류기화 이모와도 한 잔 하세요. 그곳에는 간척으로 이 땅을 떠난 도요새들도 모여 있겠군요. 강길 형, 고생 많았어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기록과 소중한 영화들을 이 세상에 남겨주어 고마워요. 따뜻한 마음도 고마웠어요. 편히 쉬세요. □

 



글쓴이. 황윤
- 다큐멘터리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 감독이자 <사랑할까, 먹을까> 작가.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