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비평가로서 그들이 지닌 고민이, 확장된 비평으로 가기 위한 필요조건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젊은 작가가 되길 원하는 나 또한, 언젠가는 지금보다 확장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낙관하고 싶다."
[ACT! 117호 리뷰 2019.12.16.]
온오프라인 비평 플랫폼 「마테리알」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선혜
얼마 전, 줄곧 보고 싶었던 영화가 상영된다는 소식에 인디스페이스를 방문했다. 극장 앞에 차려진 자그마한 부스를 잠시 둘러보던 중, 처음 보는 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휙'하고 집어 챙기려던 찰나, "그거 무가지 아니에요!" 하는 지인의 외침에 민망해하며 잡지를 황급히 내려놓았다. 강렬했던 민망함 덕분인지, 「마테리알」이라는 잡지의 이름만큼은 기억에 제대로 남았다. 지금 「마테리알」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이 상황은, 그때의 무례함(?)을 만회하라는 계시일지도 모르겠다. 미리 밝혀두자면 나는 비평에 지식도 자신도 없는 부류로, 비평에 관해서라면 하얀 도화지와도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무지가 자랑은 아니지만, 적어도 선입견 없이 대상을 바라보는 조건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마테리알」의 대한 글을 써내려 가고자 한다.
올해 5월 창간준비호를 통해 독자들을 미리 만났던 「마테리알」은, 9월에 창간호를 발간하면서 첫발을 내딛었다. 발행인인 정경담과 함연선의 글로만 구성되었던 창간준비호와 달리, 창간호에는 6명의 필자진이 함께하면서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이와 함께 온라인 홈페이지를 열면서 ‘온/오프라인 비평 플랫폼’의 모습을 갖추었다. 창간준비호와 창간호의 첫 번째 페이지에서는, 축구경기에서 활용되는 기술인 '스루 패스'라는 개념을 통해 「마테리알」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소개한다. 열린 공간을 만들어내어 이를 골의 기회로 연결시키는 스루 패스처럼, 「마테리알」은 자신들의 비평이 작품(작가)에게 동적 공간을 만들어주기를, 반대로 작품(작가) 역시 비평에게 동적 공간을 만들어주기를 희망한다.
‘동적 공간을 창출하고자 한다’는 표현 때문인지, 처음 「마테리알」의 창간호를 접했을 때 받은 인상은, 잡지가 독자에게 제공하는 운신의 폭이 넓다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모든 무빙이미지를 다루는 비평'이라고 밝혔듯이, 「마테리알」은 영화뿐만이 아니라 갤러리 영상, 드라마 등을 소재로 하며 확장된 플랫폼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양한 영상매체들의 비평을 한 데 묶으니 나오는 이야기의 총량이 많아졌다’는 식의 단순한 확장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나올 수 있는 이야기의 가능성이 넓어졌다’는 의미로서의 확장성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갤러리에 전시되었던 한 작품에 관한 글을 읽는다고 가정해보자. 해당 글이 갤러리의 전시 브로슈어에 실려 있는 경우와, 모든 무빙이미지를 다루는 비평지에 실려 있는 경우로 나누어 생각해보기로 한다. ‘전시 브로슈어’라는 매우 제한된 플랫폼 안에서 ‘갤러리 영상’이라는 범주 바깥으로 사고를 뻗어나가는 것은 쉽지 않을 테지만, 후자의 경우에서는 사고의 확장이 보다 빈번하게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플랫폼이 제공하는 스펙트럼 자체가 갤러리 영상에 머물러있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갤러리 영상에 관한 비평을 읽은 후에 잡지를 뒤적거리다 보면 어느새 다큐멘터리에 관한 비평과 마주하게 되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인 나는 ‘이걸 저기에 적용해볼 수 있을지, 저게 여기에도 유효한 얘기인지’ 계속해서 자문하고, 덕분에 사고는 자연스레 영상매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뻗어나간다.
그래서일까? 독자뿐만 아니라 필자진 또한 한계를 두지 않고 자유로이 비평을 펼쳐나가는 인상 역시 느껴졌다. 이를테면, ‘유령의 기술: 차이밍량의 <더 데저티드(The Deserted)>’는 ‘ONE VR 카메라’ 기술을 소개하고, 이러한 기술을 통해 작품이 획득(혹은 상실)하고 있는 지점에 도달한다. 생소한 디지털 기술들을 소개받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서사 위주가 아닌 비평을 접하고, 이로써 비평의 가능성을 엿보는 것 역시 즐거움이었다. 뿐만 아니라, ‘장재현의 보이스카웃은 무엇을 단련하는가’와 같은 글에서는 비평지에서 위트와 날카로움을 함께 지닌 비평을 만나기도 했다. 해당 글에서는, 장재현의 영화에서 무기력하게 소모되는 소녀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지만 동시에 위트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위트 덕분에, 곳곳에서 웃음과 씁쓸함이 동시에 몰려오는 식이다. 이외에도 언급될만한 여러 기사들이 있겠으나, 몇 가지를 추리자면 이러하다.
이렇듯 ‘확장’이라는 키워드로 「마테리알」을 설명해봤지만, 사실 이 키워드 하나로만 「마테리알」을 정리하기에는 어딘가 아쉽기도 하다. 확장의 반대급부로 보이는, 비평 자체에 대한 깊은 고민으로 침잠하는 지점들 역시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 예로, 창간준비호에 실린 〈경험되지 않는 영화에 대하여〉와 창간호의 특집기사 중 하나인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한국 영화비평계의 86세대에 대해 반추하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작품과 비평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 언제나 빈사 상태로 묘사되는 현 비평계에 대한 우려, 앞으로 걸어 나갈 방향에 대한 고민이 엿보이는 글에서, 나는 젊은 비평가의 모습을 보았다. (물론, 나이 어린 비평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해당 기사들을 읽으며 필자들을 향한 동질감을 느끼기까지 했다고 하면 과장일까? 하지만 정말 그러했다. 나 또한 이들과 근본적으로 비슷한 고민을 지니고 있기에. 다큐멘터리 제작자를 꿈꾸는 나 역시도, 다큐멘터리가 지닌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고민하고, 외면받기 십상인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걱정하고, 그렇다면 대체 나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점쳐보곤 한다. 그들은 비평가로, 나는 작가로 불릴 것이란 점을 제외하면, 사실상 그들이 나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마테리알」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젊은 비평가로서 그들이 지닌 고민이, 확장된 비평으로 가기 위한 필요조건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젊은 작가가 되길 원하는 나 또한, 언젠가는 지금보다 확장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낙관하고 싶다. □
글쓴이. 나선혜
- 나라는 사람을 알고 싶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겠다고 나섰다. 다큐멘터리를 완성하고 나니 이제는 나를 더 모르겠다. 어디로 갈지 몰라 다큐멘터리 근처에서 서성이는 중이다. 갈 길이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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