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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13호 인터뷰] 정소희 활동가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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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9. 3. 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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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12호 인터뷰 2019.3.14.]


정소희 활동가를 만나다


최은정(ACT! 편집위원)



  어디서 한 번은 본 것 같은 사람. 튀지는 않지만 조금씩 자기 자리를 넓혀온 사람. 꾸준히 자기 나름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 정소희 활동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비 오는 날 옥탑방에서 느낀 마음의 변화도 함께 담았다. 


▲ 정소희 AMC팩토리 활동가, 독립영화 감독, 미디어교육 교사



= 자기소개 부탁한다.

- AMC팩토리(Asia Media Culture Factory) 활동가, 독립영화 감독, 미디어교육 활동가다. 이주민 문화예술 활동은 계속 하고 있고, 얼마 전에 새로운 다큐멘터리 <옐로우버스 (Yellow Bus)>를 만들었다. 최근 교육은 거의 안 잡혀서 많이 못했다.


= 활동가란 소개가 익숙한가?

- 30대 중반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내가 좋아서 하는 것뿐인데, 감히 활동가라는 말을 써도 되나 싶었다. 뭔가 무장되어 있거나 비전이 확실해야 할 것 같았다. 언제든 다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30대 중반부터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결코 미래상이 밝아서는 아니다. (웃음)


= 원래 어떤 사람이었나?

- 소심하고 우울했다. 내가 외계인 같다고 느꼈었다. 말 통하는 사람도 없었고 이 세상과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사고를 치진 않았지만, 정해진 친구들과만 놀았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살았다. 사는 게 재미없었다.


= 영화에는 관심이 있었나?

- 고향이 경상남도 삼천포라 문화 혜택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TV나 영화 보는 걸 좋아했다. 당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충격이었는데, 흑백 논리가 아니라 한 사람이 어떤 역사적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게 놀라웠다. 막연하게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왠지 영화를 하면 못 살 것 같았고, 그 때는 한국영화가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 때는 부산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했다. 당시 내가 그 학과 1기였는데, 잘 맞았다.


= 좋아하는 분야라 잘 맞았나?

- 사람들과도 잘 맞는 편이었다.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다. 한 친구가 내가 성실해 보인다고 학생회로 끌고 갔다. 그 계기로 집회에 참여하게 됐었는데, 몇 천 명이 모여 ‘바위처럼’ 같은 노래를 부르며 함께 외치는 모습이 정말 놀라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선전 선동적이라 거부감이 있었는데, 한 선배가 경험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안 해도 되니까 마음을 닫고 살지는 말라고 말해줬다. 그 선배와 미디어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얘길 나누기도 했다.


= 영화와는 어떻게 가까워졌나?

- 대학 1학년 때 부산국제영화제가 생겼다. 거기서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쓰는 게 과제였다. 고3 때 TV로 임순례 감독의 <우중산책>을 본 적이 있었는데, 단편이란 게 있구나, 한 장면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구나, 하는 걸 깨달았었다. 그런데 그런 영화가 전 세계에 있다는 것이 정말 새로웠다. 당시에는 부산은행 ATM으로도 티켓을 끊을 수 있었는데, 일정만 되면 근처 ATM에서 티켓을 사서 친구와 영화를 봤다. 이때 아니면 못 본다는 이유도 있었다. 1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영사 사고도 많았었다. 한 번은 외국 흑백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자막 넣지 못해서 내 옆옆 자리에서 영화제 스태프가 나레이션을 읽은 적도 있었다. 진지한 장면인데 부산 억양이 나와 웃었던 기억이 난다.


= 서울엔 졸업 후 올라왔나?

- 4학년 때, 다양한 문화에 관한 수업이었는데, 인디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주제였다.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이라 PC통신 하이텔로 검색했었는데, 언더그라운드라고 치니까, 홍대 언더그라운드바가 나왔고, 거기서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이 열렸다는 걸 알게 됐다. 이후에 거기에 졸업 작품인 단편영화를 출품했고 상영까지 했던 게 계기였다. 졸업 전에 IMF가 터졌고 취직 못 하는 게 당연해지기 시작했다. 누구도 안 되는 시기였으니까. 대부분 졸업 후 기본 6개월은 쉬었다. 나도 집에 피디가 되겠다는 핑계를 대고 서울로 올라와 6개월 동안 방송아카데미를 다녔다. 물론 다른 일에 더 집중했다.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로 만난 사람들과 비디오작가연대도 만들고 같이 제작도 하고 상영도 했다. 단기로 상업영화 스크립트(제작 준비만 하다 엎어짐)나 독립 프로덕션 일도 했었다. 애니메이션 채색을 한 적도 있었는데 청솔모가 뛰어다니는 걸 100장씩 그렸었다. 


= 수입이 없었을 것 같은데?

- 6개월 정도 일이 없어서 아무것도 안 할 때가 있었다. 내가 뭐가 먹고 싶다고 하면 엄마가 3만원씩 보내주곤 했다. 언니가 사준 노트북 하나 들고 옥탑방에서 살았는데 다행히 월세는 집에서 내주셨다. 비 오는 날 라디오헤드의 ‘Creep’을 들으면서 소주를 마시는데, 문득 내가 평생 동안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는 날들이 앞으로는 없을 것을 것 같았다. 지금 즐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고 보니까 정말 없었다. 6개월 힘들었지만 지금도 힘든 건 똑같다. 그런데 지금은 한 달 일을 안 하면 끝이다. 그나마 한 번 그렇게 살아봐서 다행이다. 안 그랬다면 지금까지 로망일 것이다. 가끔 쉬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지는 않다.


= 집에서 걱정하진 않으셨나?

- 내가 스트레스 받을까봐 전화도 잘 안 하셨고, 잔소리나 강요도 안 하셨다. 선택도 스스로 하고 책임도 스스로 져야 한다는 기조셨다. 그런데 사실 지금도 전화는 자주 안 한다. 생일이나 명절 때 엄마와 30초, 아빠와 10초 정도 한다. ‘잘 사나, 안 아프나’ 하면 끝난다. 간혹 1분을 넘기는 경우가 있는데, 엄마에게 음식 레시피 물어볼 때다. (웃음)


▲ 정소희 AMC팩토리 활동가, 독립영화 감독, 미디어교육 교사



=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에 대해 얘기해 달라.

- 구성원 모두 앞서 가는 사람들이었다. 당시는 필름만이 영화고 비디오는 홈비디오일 뿐이라고 생각할 때다. 그런데 비디오로 영화를 만들었고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얘기했었다. 화질도 떨어지고 편집기가 없어서 비디오데크 두 대로 만들었지만 아이디어가 빛났다. 10만원이면 너도 할 수 있다는 것도 신선했다. 사전제작지원도 했는데 10만원을 주고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었다. 영화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음악이나 무용하는 사람들에게 주기도 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 한 번은 김지운 감독을 지원했는데 배우로 송강호와 문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관객과의 대화 때 송강호 배우는 차가 막혀 못 왔다. 나중에 스태프로 잠시 함께 했는데, 나는 아이디어가 있는 애는 아니라 몸으로 움직이며 같이 했다. 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디어가 가득한 친구들을 보면서 참 흐뭇했고 정말 멋진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다. 


= 그 활동이 충무로영상센터 활력연구소로 이어졌는데.

- 너무 앞서 갔던 것 같다. 사실 지금의 복합문화공간은 대부분 활력연구소 컨셉이다. 문화는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게 아니다. 활력연구소가 있었기 때문에 복합문화공간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시장 때문에 1년 만에 문을 닫았고, 당시에는 충무로 지나가기도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힘들었지만, 그런 시행착오와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시도들이 가능했다고 본다. 


= 이주민 문화 예술 활동은 어떻게 시작했나? 

- 활력연구소가 문을 닫은 후 시민방송 RTV 시민교육실에서 2년 정도 일했다. 그 때 이주민방송이 생겼는데 그 분들과 2주 동안 영상 제작 교육을 했다. 그러다 이주노동자영화제 2회 때 영화제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니 총괄로 들어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틈틈이 휴가를 내고 시간을 쪼개서 영화제에 결합했다. 그 계기로 3회, 4회까지 결합했고, 미디액트와 이주 노동자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 다른 미디어교육이나 활동도 많이 했는데.

- 그 전후 시작했다. 당시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 워크숍을 매년 했는데, 전국의 활동가들이 모여 분야별로 토론 하고 지역 현황을 공유했다. 전체 흐름이 보이는 자리였다. 1년 단위로는 큰 변화를 느끼지 못했지만 2년에 한 번은 변화가 보였다. 노인 미디어교육은 거기서 처음 알았다. 문정현 감독이 사례 발표를 했는데 정말 재밌었고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뒤 미디액트에서 노인 미디어교육을 한다고 해서 참여했다. 정말 빡빡하긴 했다.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 워크숍은 보통 1박 2일이었는데, 도시락 주면서 붙잡아 놓고 밤늦게까지 토론했다. 다음 날도 오전을 꽉꽉 채워 얘기한 후 사진 찍고 헤어졌다. 대부분 첫 날 저녁 전에 마치고 둘째 날은 사진이나 찍는데 말이다. 교육 역시 한 번 할 때마다 써야 하는 평가서가 수두룩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과정이 토대가 되어 계속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다. (웃음)


▲ 퍼스트 댄스 (정소희, 2014)



= <퍼스트 댄스>(2014) 반응이 좋았다.

- 난 사실 극영화 지망이었다. 다큐멘터리는 남의 삶에 들어가는 거고, 그 사람의 삶도 고민해야 하는데, 무섭다고 느꼈었다. 다큐멘터리를 좋아했지만, 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2012년 친구가 미국에서 레즈비언 결혼을 하게 됐고 뭘 안 하더라도 기록 해두고 싶었다. 친구가 흔쾌히 수락하지는 않았다. 스카이프로 왜 찍고 싶은지 어떻게 찍고 싶은지 오래 얘기했다. 당시 미국에서 자살하는 성소수자 아이들이 많았다. 그 친구는 살아도 괜찮다,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난 미국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한국의 젊은 LGBT 사람들에게 자기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지점이 맞아서 가능했다. 


= <옐로우 버스>(2018) 얘기도 궁금하다.

- 알고 지내던 몽골 이주민 가수 친구가 자기를 찍어달라고 했다. 나는 홍보하는 다큐멘터리는 안 찍고, 찍어도 내 맘대로 찍지, 당신이 원하는 대로는 안 찍는다고 말했다. 내 마음이 동의하지 않는 건 거짓말 하는 거니까. 그래서 먼저 인터뷰를 했다. 다행히 이주와 예술이라는 정체성이 나와 맞았다. 나도 삼천포에서 절반, 서울에서 절반을 살았다. 어디에도 정주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 친구가 한국을 오가는 것도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주 노동자의 성공스토리가 아니라 꿈을 통해 이주하고 예술가로서 사는 고민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런데 그 사이 주인공들의 상황이 바뀌면서 원래 기획한 것과 많이 달라졌다. 촬영 중간에 아플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결국 영화가 망하더라도 같이 찍는 사람들이 즐거웠으면 됐다는 마음으로 다스렸다. 하지만 편집하면서 사람들의 말을 곱씹게 됐고 조금씩 두 사람을 더 이해하게 됐다.


= 다큐멘터리는 계속 할 예정인가? 

- 한 동안 안 하고 싶다.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어렵다. <옐로우버스> 음악 감독이 음악 극영화를 만들어볼래요 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나는 항상 그렇다. 떠밀리는 건 아닌데, 큰 의지를 갖고 하는 것보다, 둥둥 흘러가는 느낌으로 연결, 연결 된다. 늘 걸쳐져 있다. 음악감독도 AMC팩토리 하면서 알게 된 사람이다. 그 음악 감독은 내뱉으면 하는 사람이긴 한데, 사실 알 수 없다. (웃음)


▲ 옐로우 버스 (정소희, 2018)



= AMC팩토리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 안정된 소속. 적지만 돈이 나오는 직업. (웃음)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네트워크다. 바로 여길 통해 만나는 사람들. 이 일을 안 했다면 다큐멘터리는 못 만들었을 거다. 내 활동의 중요한 기반이다. 이주민 문화 예술 활동이 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티끌만큼은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성큼성큼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천천히 간다. 천천히 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실제 세상이 그렇기도 하다. 


= 미디어교육은?

- 교육은 나를 발전시킨다. 내가 완성되어 있어서 교육을 하는 게 아니다. 누구를 만나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미디어교육은 참여자에게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를 주는 게 중요하다. 그러려면 참여자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한다. 나는 이 과정에서 인간에 대해 배운다. 또 다큐멘터리 작업에 영감을 주기도 한다. 다큐멘터리는 일종의 인간에 대한 연구라 관찰을 많이 해야 한다. 교육은 그 계기를 만들어준다.


= 오래 교육을 해왔는데, 자기만의 교육 방법이 있나?

- 모든 일상이 다 창작이라는 얘길 하면서, 살림을 예로 많이 든다. 창작과 살림은 구성이 똑같다. 오늘 누구를 초대해 무슨 요리를 할지 정하는 게 기획이고, 어떤 맛을 어떻게 낼 것인지는 제작이다. 기술 교육도 마찬가지다. 서랍을 정리할 때처럼 칸별로 뭘 넣을지 정하는 게 폴더 정리라고 말한다. 세탁기를 계속 쓰니까 사용법을 아는 것처럼 기술도 계속 하면 된다고 말한다. 살림을 예로 들면 특히 여자 어르신들은 정말 잘 이해하신다. 


= 제작은?

- 내 꿈이다.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진행형 꿈. 꿈은 꾸지 않으면 슬퍼진다. 바라만 보거나 포기하는 게 아니라 내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내가 만족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영화로 성공하겠다는 집착은 없다. 하지만 안 하면 슬플 것 같다. 내 소통의 도구로 평생 가져가도 행복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영화는 내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그 영화에 한 두 명이라도 공감해준다면 외롭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더 이상 외계인이 아닌 것이다.


= 다른 취미는 없나?

- 한 동안 주말마다 친구 집에 가서 농사를 도왔다. 흙을 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다. 반복 작업이라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어 잡생각을 떨치게 된다. 여행도 좋아한다. 돈 생기면 가야지, 시간 되면 가야지 하면서 계속 미뤘는데, 그러다가는 평생 못 갈 것 같았다. 노인 미디어교육 하면서 더 절실히 느꼈다. 무릎 아파서 못 다니고 이 시려서 못 먹기 전에 일단 카드 긁고 여행 갔다 와서 갚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웃음) 여행을 가면 오로지 이방인으로 있을 수 있어서 좋다. 남들 일할 때 낮술 마시며 노는 것도 좋고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즐거움도 있다. 역사가 깊은 곳에 가서 100년 200년 전 사람들이 뭘 했을까 상상하는 것도 재밌다. 여행으로 일상을 벗어날 때 생기는 에너지가 많은 도움이 된다.


▲ 정소희 AMC팩토리 활동가, 독립영화 감독, 미디어교육 교사



= 자기만의 활동 원칙은?

- 보여주기 위한 활동을 하지 말자. 내가 즐겁지 않은 건 하지 말자. (웃음) 행사할 때 다른 사람들은 즐겁지만 스태프들은 아닌 경우가 있다. 규모가 커지면서 처음 의도와 달라지거나 행정만 쌓이는 경우도 있다. 돈이 없더라도 하는 사람이 즐겁지 않은 건 과감하게 버리려고 한다. 또 다른 원칙은 구질구질하게 보이지 말자는 것. 시혜적으로 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주민 사업이라고 하면 불쌍하게 보는 경우가 있다. 이 세상 어디도 불쌍하기만한 사람은 없다. 어떻게 사람이 불쌍하기만 하나. 안 불쌍하다. 기회가 다를 뿐이다. 기회를 열어두지 않은 시스템이 문제이고 그 시스템에 분노하며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난 이주민 당사자는 아니지만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있다. 당사자라면 괴로워서 할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 활동에 있어 바라는 바가 있다면?

- 이기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다르다. 개인주의적인 삶은 중요하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가 행복해야 타인을 혐오하지 않을 수 있다. 이주민 활동에 있어 비자 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누구나 어디든 갈 수 있어야 하고,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살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모자란 곳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더 제한을 받는다. 가능성과 기회를 차단한다. 법은 사람을 위해야 하는데 오히려 법이 사람을 배제하고 있다. 자신을 사랑하면 세상도 사랑하게 될 것이고, 최소한 사람에게 함부로 하지는 않을 것 같다.


=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

- 모두 자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의무감에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지 말고, 내가 즐겁고 행복한지를 먼저 생각하면 좋겠다. 행복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자기도 건강하고 이 판도 건강해진다. 자기가 즐겁지 않으면 다른 걸 찾으려고 하는데 이 판에는 돈이 없으니까 권력을 잡으려고 한다. 꼰대가 되기도 한다. 뭐든 지나가면 괜찮다는 얘길 하는데, 그 사람에게는 그게 제일 심각한 고민이고 당장 지금이 괴로운데 지나가면 괜찮은 게 무슨 소용인가. 이 세상 변화 다 좋다. 하지만 내가 있어야 변화가 있다. 내 한 몸 희생해서 세상 좋아지면 무슨 소용인가. 내가 누리지 못하는데 말이다. ‘즐거우세요. 행복하세요. 자기를 먼저 찾으세요. 누리세요.’라고 말하고 싶다. 나도 내가 누리면서 살 거다. 


= 앞으로의 계획은?

- 빚을 갚자? (웃음) 경제적 압박이 심해졌다. 그 동안 임시로 막아둔 일들이 요즘 터진 것 같다. 어릴 때는 버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일에 대한 고민은 줄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게 확실해졌고 일도 재밌다. 나는 이미 뿌리를 박기 시작했다. 지금 같은 삶에 익숙해졌다. 내 정체성이나 살아가는 방식을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고, 마음 맞는 동료들과 같이 일할 수 있어 다행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지 않나. 그곳은 나에겐 지옥일 것이다. 삶이 지옥이겠지. 


= 장기적으로는?

- 할머니가 됐을 땐, 시골에서 친구들과 함께 소소한 재미를 느끼며 살고 싶다. 농사도 짓고, 맛있는 것도 해먹으면서, 틈틈이 작더라도 영화를 만들고 싶다. 숲에 스크린을 펼치고 같이 영화를 보는 소소한 작당모의도 해보고 싶다. 그래서 오래 살기로 결심했다. 건강도 조금씩 신경 쓰고 있다. 모든 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서 최대한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고 한다.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할 것 같고 다른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 갑작스레 떠난 미누 영향일까.

- 원래 미누와 네팔에서 예술제를 같이 하려고 했었다. 노동자들과 미디어교육도 하고 미디어운동에 대한 논의도 해보자는 얘기를 나눴다. 여러 여건이 안 맞아 미뤄졌고,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때도 만나지 못했다. 서로 바쁘기도 했고 어렵게 입국해 조건이 제한되어 있기도 했다. 그런데 미누가 죽고 나니 모든 게 후회됐다. 심지어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있었는데 왜 못 봤지, 네팔이든 한국이든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자고 했는데 왜 미뤘지. 안타깝고 속상했다. 보고 싶다고 말하면서 미루고 미루다가 끝내 못 만났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 모두 오래 사시고. 갑자기 가시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친구는 미루지 말고 바로 바로 만나시고. 특히 우리 나이 대는 보장할 수 없다. 미루지 맙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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