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올해 ACT! 인터뷰는 독립영화와 대안미디어 분야의 활동가들을 찾아갑니다. 가능하면 이제 막 이곳으로 진입하여 자기 자신과 그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신입활동가’를 자주 만나보고자 합니다. ‘활동’에 대한 호기심과 욕심, 실망과 의지를 고루 안고서 자기만의 영역을 일구기 시작한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찬찬히 나누며, 현재의 장을 환기시키고 새로운 가치와 욕구를 전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ACT! 112호 인터뷰 2018.12.14.]


    “계속 걷고 싶은 사람의 산책법”

    - 변규리 (연분홍치마)


    차한비 (ACT! 편집위원)


    라디오 스튜디오에 SK브로드밴드 통신설치 수리 기사들이 등장한다. 각자 마이크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일의 고단함과 부당한 노동환경에 대해 말한다. 정규직 전환을 위한 파업 소식을 알리기 위해 구로FM에서 ‘노동자가 달라졌어요!’ 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한 그들은 라디오라는 창구를 통해 세상과 접속한다. 그들의 목소리는 균일하지 않다.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어색하다. 진지한 와중에 웃음이 튀어나오는 순간도 있다. 스크린에는 라디오 방송 현장과 파업 현장의 장면들이 교차되고 노동자들의 표정은 계속해서 달라진다. 3년 여간 이 ‘신생 노동조합’의 곁에서 카메라를 든 이가 있다.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의 활동가이자 다큐멘터리 <플레이온>을 연출한 변규리 감독이다. 


    * * *


    ▲ 연분홍치마 사무실에서 만난 변규리 활동가


    차한비(이하 한비) 월요일 저녁 시간 내주어서 고마워요. 말이 나온 김에 규리 씨의 일주일 스케쥴은 어떻게 되나요. 작업과 활동을 병행하려면 바쁠 텐데요.


    변규리(이하 규리) 월요일 오전에는 활동가들이 전부 모여서 대청소를 해요. 모두 사무실에서 상근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외부 활동이 잦다 보니 모이는 시간대가 다르거든요. 월요일 하루만큼은 오전에 다 같이 만나서 청소하고 밥 먹고 2시부터는 전체 회의를 해요. 회의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요. 각자 맡고 있는 프로젝트가 다르고 연분홍치마 성격상 업무나 활동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개인 생활도 맞물려 있다 보니 서로 간에 해야 할 이야기들이 많은 편이죠. 오늘도 6시까지 회의했어요(웃음).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각자 포함된 연대단위의 회의를 소화하거나 작업을 진행하고, 저의 경우 촬영은 보통 주말에 나가는 경우가 많아요. 현재 촬영 중인 분들도 직업이 있으시다 보니 주중보다는 주말에 많이 하게 돼요. 물론 이런 식으로 일주일을 보내면 힘드니까 하루 정도는 푹 쉬려고 노력하는 편이고요. 


    한비 규리 씨는 원래 무엇에 관심을 갖던 사람인지, 어떻게 다큐멘터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규리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나서 꽤 오래 휴학을 했어요. 사실 자퇴를 고민하던 시기였는데 친구가 “최대한 휴학을 해보고 그 다음에 자퇴해도 늦지 않다”며 만류하더라고요. 2년 반 정도 되는 휴학 기간 동안 가족이나 진로 문제로 고민이 무척 많았어요. 돈도 없어서 늘 알바를 해야 했는데, 생계를 책임지는 동시에 마음을 채워줄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일이 뭔지 모르겠는 거죠. 여러 군데에서 일을 해봤는데 계속 갈증이 생기더라고요. 

      그러다가 어느 날, <두 개의 문>(연출 김일란·홍지유, 2012)을 보게 됐어요. 물론 그때는 연분홍치마 작품인 줄도 몰랐고 연분홍치마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죠. 다만 영화를 보면서 ‘저런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 되면 나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대학에서 답답했던 것 중 하나가 책상에서 배우는 학문이 과연 현실에서 어떤 실천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점이었거든요. 그때의 나는 나 자신을 잘 기다려주지 못했던 것 같아요. 책만 읽는 시간은 지루했고, 당장 뭔가 실천적인 일을 하고 싶었어요.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으니까요.

      <두 개의 문>을 보고 나서 다큐멘터리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이곳저곳을 찾아보다가 2014년에 미디액트의 독립다큐멘터리 제작 수업을 수강했어요. 4개월 과정이었는데 교육 기간 동안 김명준 소장님한테 많은 자극을 받았던 것 같아요.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랄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행위에 대해 배워가는 과정이었어요. 하지만 교육은 어느 시점에서 종료되는데,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건 사실 그때부터 시작이잖아요.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수업을 함께 들었던 동기들과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삼척’ 프로젝트에 참가했어요. 5일 동안 삼척에 묵으면서 핵발전소 유치를 놓고 찬반투표를 하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작업이었어요. 운이 좋게도 그 작품이 2015년도 인디다큐페스티발 개막작으로 상영되었죠. 어찌 보면 함께 작업을 하고 좋은 성과를 얻은 첫 경험이었어요. 그렇게 하나 둘씩 시작하게 되었어요. 


    ▲ <플레이온> (연출 변규리, 2017)


    한비 <플레이온> 작업에 들어간 시기도 그 무렵이었죠? 주인공들과 만나게 된 과정이 궁금해요.


    규리 독립다큐멘터리 제작 수업에서 김명준 소장님이 마을미디어에 대해서도 소개해주셨어요. 마을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며 콘텐츠를 기획하는 매체라는 점이 매력적이더라고요. 혹시나 해서 학교 근처의 마을미디어를 찾아봤는데 구로FM이 있었어요. 어떻게 연락해야 할지도 몰라서 그냥 구로FM에 방송을 해보고 싶다고 페이스북 쪽지를 보냈어요. 그랬더니 일을 해보라고 연락이 오더라고요(웃음). 

      <플레이온> 주인공들과는 2014년 11월에 처음 만났어요. 파업하려면 회의 장소가 필요하잖아요. 구로FM 사무실에 회의하러 온 분들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이제 막 시작한 노동조합이라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당시 신생노조에 관심이 많았고 집행부가 아닌 노조 구성원들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고 생각하던 터라 호기심이 생겼어요. 조심스럽게 라디오 출연을 제안했는데 다행히 방송을 너무 즐거워 하셨어요. 그래서 아예 파업하는 기간 동안 이 방송을 계속 해보자면서 ‘노동자가 달라졌어요!’를 시작하게 되었죠.  



    [연분홍치마와의 만남]


    한비 그럼 시기상 <플레이온> 제작 중 연분홍치마에 합류하게 된 건데, 다큐멘터리를 시작하고 나서 연분홍치마와의 접점은 어떻게 생겼던 건가요?


    규리 2014년 겨울에 서울시청을 점거하는 무지개농성이 있었어요. 당시 서울시민인권헌장의 발표를 둘러싸고 성소수자 차별금지조항을 반대하는 혐오세력의 비난이 거세지자 서울시는 인권헌장의 폐기를 결정했어요. 농성 참여자로부터 현장을 기록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때 서울시청에서 연분홍치마 활동가들을 처음 만나게 됐고 인연이 시작됐어요. 처음에는 아르바이트를 같이 했고, 2015년에는 <안녕 히어로>(연출 한영희)의 조연출을 1년 정도 맡았다가 2016년부터 연분홍치마 활동가로 함께 하게 되었어요.


    한비 연분홍치마에 합류하게 된 계기는 뭐였어요? 새로 단체를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는 조직으로 합류한 규리 씨 입장에서는 어떤 부분에 가장 마음이 동했을까 궁금해요. 


    규리 <플레이온>을 연출하면서 같이 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영화 제작과정을 명확히 알고 있거나 현장에서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모든 걸 혼자서 해나가기가 막막하더라고요. 무엇보다 이야기 할 사람이 필요했어요. 토론하고 의견을 주고받고 할 그룹이요. 미디액트 수강생들에게 제안해보기도 했는데 각자 그룹의 방향성이나 결속 정도에 대해 생각하던 상이 달랐기에 제가 원하는 것처럼 진행되기는 어려웠어요. 

      그 무렵 연분홍치마에서 한영희 감독의 <안녕 히어로> 조연출 제안이 들어왔어요. 일단 연분홍치마로 함께 하자는 제안은 아니었고, 저는 나름대로 다큐멘터리 제작의 프로세스를 경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죠. 그 과정이 지나고 나서 연분홍치마 합류 제안을 받았는데 무척 기쁘고 반가웠어요. 충분한 경험을 쌓지 않은 상태에서 단독으로 작업을 이어나가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지금 당장 궁금하고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 있는데 대화를 나눌 사람을 찾기가 어렵고 그 역시 기회를 보아야 하는 일이 되니까 힘들었어요. 조직에 있으면 작업도 작업이지만 함께 살 궁리를 하잖아요. 그런 부분이 든든했어요. 적어도 지금보다는 아침에 일어날 때 덜 불안하겠다는 마음이랄까요(웃음).


    ▲ 카메라를 들고 있는 변규리 활동가


    한비 현재 연분홍치마에는 김일란, 넝쿨, 이혁상, 변규리, 한영희 총 다섯 명의 활동가가 함께 하고 있어요. 시기마다 구성원에 차이는 있겠지만 오랜 시간 동안 여성, 성소수자,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등 사회의 소수자를 지속적으로 카메라에 담아 왔고 그와 동시에 현장에서의 활동도 병행해오고 있어요. 규리 씨가 생각하는 연분홍치마의 목표랄까요, 활동방향은 무엇인가요?  


    규리 지금의 저에게는 무의미해진 표현이지만 연분홍치마 합류 제안을 받았던 당시에 ‘아, 여기라면 2년 이상은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겪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겠다는 확신 같은 거였죠. 조직의 목표나 방향을 정확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저한테 중요하게 다가왔던 부분은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도 현장과 멀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이었어요. 동시에 다큐멘터리의 역할에 대해서 굉장히 진지하게 고민하고요. 이 조직이 지닌 태도와 분위기가 저한테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진솔하게 와 닿았어요. 연분홍치마 활동가들을 보면서 ‘내가 상상하고 고민하는 삶의 형태에 대해서 한두 걸음 먼저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 무렵의 저는 현장과 괴리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했어요. 머리로만 생각하면 어떡하지, 고립된 언어를 만들어내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이 컸거든요. 연분홍치마라면 그런 감각을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깨워줄 수 있겠다는 기대와 지금 내가 가진 꿈과 욕구를 말하고 펼쳐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런 점에서 아직은 실망시킨 적이 없고요(웃음). 구성원 모두가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걸 알거든요. 오히려 요즘에는 ‘현장과 괴리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가 각자에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중인 것 같아요. 


    한비 사실 조직에서 개인의 꿈과 욕구를 펼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을 텐데요. 그런 확신은 어디서 왔을까요?


    규리 조직의 방향성이나 가치관 같은 것들도 영향이 있겠지만,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자유로운 분위기 같아요. 만약 이 조직이 활동가의 욕구를 통제하는 시스템이었다면 오래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토론하고 조율하고 조정하는 장이 있기 때문에 개인의 미래가 계속 상상될 수 있는 거죠. 각자 하고 싶은 바와 나아가고 싶은 길을 존중해주는 분위기가 있어요. 연분홍치마가 ‘너는 이것만 해야 한다, 이 이상은 네가 할 일이 아니다’는 식으로 규율을 강요했다면 힘들었을 거예요. 조직문화라는 것도 끊임없이 고민이 필요하고 변화해나가야 하는 부분이잖아요. 약속이나 책임을 명시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연분홍치마는 어떻게 하면 보다 평등한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요.



    [창작자와 활동가의 스위치]


    한비 연분홍치마는 소속 구성원들을 ‘활동가’라고 표현하잖아요. 독립다큐멘터리를 하는 많은 창작자들이 필연적으로 가져가는 정체성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규리 씨는 어떤 점에서 스스로를 ‘활동가’라고 생각하는지, 이런 부분에 대해서 고민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어요.


    규리 물론 고민한 적이 있죠. 지금도 계속 고민 중이고요. 어느 때가 되면 완료될 고민이 아니라 줄곧 이어질 고민 같아요. 해결이나 대안을 기대하기보다는 다큐멘터리를 하는 내내 질문해야 할 부분처럼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원론적으로는 ‘활동’의 정의부터 시작해서 나의 활동분야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고요. 영화를 하지 않을 때도 그 공간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고, 때로는 그 공간에서 영화를 하기 위해 양해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는 부대낄 때가 있어요. 같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몇 배씩 해내고 있는 와중에 ‘저는 영화를 해야 해서 여기까지밖에 못해요’ 라고 말하게 되는 순간이 있거든요. 역할의 균형을 맞추기가 쉽지 않고 이따금 ‘내가 활동가 맞나?’ 하는 반문이 들기도 해요. 거칠게 연출과 활동이라고 나눈다면, 연출을 할 때와 활동을 할 때에 각각 갖추어야 할 자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일의 종류와 성격이 달라지니까요. 그런 부분에 아직 능숙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 


    한비 결국 사람은 한 사람이니까요. 어떤 ‘프로다움’이 요구되는 한편으로는 창작자와 활동가라는 정체성이 과연 모드를 전환하듯 스위치를 켜고 끌 수 있는 부분일까 싶기도 해요.


    규리 맞아요. 저는 그 스위치라는 것이 늘 헷갈리더라고요(웃음). 지금은 연출 스위치를 켜야 하나, 활동 스위치를 켜야 하나, 어느 쪽에 더 가까워야 하나. 활동가로서 자기 자신의 포지션을 점검하고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는 일에 숙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겠죠. 연분홍치마의 지향 중 하나는 그 스위치를 보다 유연하고 정확하게 다루는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실은 활동이란 무엇인지 연출의 역할은 무엇인지, 그런 기본적인 질문을 이제야 비로소 직면하고 있어요. 


    ▲ 인디다큐페스티발2017에서 <플레이온> 주인공들과 함께


    한비 <플레이온>을 연출하면서 연분홍치마 구성원들과는 어떤 논의를 했나요. 규리 씨에게는 첫 장편이자 소속이 생긴 이후의 첫 영화이기도 했잖아요. 작업의 성격이나 방향뿐만 아니라 구성원 각자의 역할 배분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 같아요.    


    규리 일단 편집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다는 점에 굉장히 감사했어요. 물론 그 시간이 서로에게 평탄하지만은 않았죠. 제가 작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구성원 모두가 노력해주었던 거니까요. 다른 활동가들은 전보다 감당해야 할 아르바이트나 연대 활동이 늘어나고, 저는 모두의 어깨가 좀 더 무거워진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여러 감정이 들었어요.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진행 과정에서 무엇보다 힘이 되었던 점은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할 파트너가 곁에 있다는 거였어요. 정말 질려 할 때까지 가편집본을 보여줬는데(웃음) 그 과정을 재차 거치면서 여러모로 도움을 받은 것 같아요. <플레이온> 작업 시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객관화였거든요. 첫 장편을 하는 입장에서 나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인지, 내 작품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연분홍치마 활동가들과 대화하면서 나와 내가 만든 영화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되었어요. 조언이나 지적도 물론 도움이 되었지만 독려 받고 있다는 느낌이 크게 다가왔어요. 영화제에서 상영하고 관객상을 수상했을 때는 모두 너무 진심으로 좋아해주는 거예요. 함께 축하해주는 분위기에서 첫 장편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비 지금 두 번째 영화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어요. 어떤 영화인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소개 부탁드릴게요.


    규리 성소수자의 부모님들을 찍고 있어요. 그분들의 마음의 여정을 그리는 영화가 될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사전 과정이었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에요. 2020년 정도에는 완성하면 좋겠다는 정도의 계획을 갖고 있고, 아마 내년에는 저뿐만 아니라 연분홍치마로서도 이 작품에 집중하게 될 것 같아요. 연분홍치마는 국내 성소수자 운동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고 어떤 역할을 해내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고, 이 다큐멘터리가 완성되고 나서 관객들과 만나는 방식이나 배급판로에 대해서도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구체적인 고민과 정확한 선택]


    ▲ 연분홍치마 사무실에 모여 있는 상패들. 맨 윗줄 <플레이온> 관객상이 눈에 띈다.


    한비 또 한 번의 새로운 시기에 와 있는 것처럼 들리네요.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 연분홍치마라는 소속이 생겼다는 것,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정립해나간다는 것. 이 모든 과정이 자랑스럽고 든든한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불안과 고민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규리 조직 내 활동가로서 분명히 고민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예컨대 조직 특성상 공과 사를 분리하기가 어렵거든요. 어디까지가 활동이고 어디부터가 사생활인지 구분이 안 될 때도 있고, 사실상 양쪽이 맞물려서 돌아가기도 하고요. 그런 상태가 스트레스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한편으로는 어떤 안정감을 이루는 요소이기도 해요.

      작업자로서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연출에 대한 고민이 커요. 예전에는 ‘나도 저런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지’ 라고 막연하게 꿈꿨다면, 최근에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연출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라고 묻게 돼요. 구성하는 사람, 촬영하는 사람, 편집하는 사람 같은 식으로 단순히 구분될 수 없겠더라고요. 결국 연출은 작품에 대해서 뭔가를 제시하는 사람인데 내가 그 부분에 대해 정말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연출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할 수 있다고 해버린 건 아닐까, 하는 불안도 있어요. 

      하지만 이제라도 그런 고민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하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그 일을 하기 위해 숙지해야 할 능력과 충족시켜야 할 요건 같은 것들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격려해준 연분홍치마 활동가들과 후원회원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커요. 심정적인 지지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힘 역시 받고 있으니까요.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고 싶어요. 


    한비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간이네요. 오늘 대화를 나누면서 ‘다큐멘터리 감독'이나 '연분홍치마 활동가'라는 명명으로 전부 담아낼 수 없는 규리 씨의 여러 면모를 보게 된 것 같아요. 뜬금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규리 씨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나요. 어떤 삶의 모양과 관계들을 상상하는지 궁금해요.


    규리 재밌는 질문이네요. 음,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저는 나태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불안해져요. 뭔가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거나 삶이 느슨해질 때요. 하지만 그런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게을러지는 순간이 있잖아요. 한동안은 그런 마음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고민이었어요. 불안감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결국 제 불안의 정체는 욕망하는 바가 있으면서 그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더라고요. 불안이 싫으면 욕망을 포기하거나 타협하면 되는데(웃음) 그건 또 인정이 안 되고요. 20대에는 그런 모순적인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의 가장 큰 욕망은 평생 작업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꼭 다큐멘터리가 아니어도 뭔가 나 자신을 계속해서 표현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런 사람이 되는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갈 시기 같고요. 나 자신을 이끌고 또 견제하면서 내 욕망을 실천해나갈 수 있을까, 어떤 삶의 모양이 나에게 가장 행복한 길일까, 라는 고민을 해요. 꾸준히 하려면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호흡을 체득해나가야 할 테니까요. 그래서 두 번째 작품을 마치고 나면 한동안 공부를 할 계획이에요. 내가 연출에 재능이 있는 사람인지, 다큐멘터리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정확히 선택하는 과정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 * *


    변규리 감독은 걷기를 즐긴다. 걷기는 그에게 휴식을 취하고 기분을 전환하는 행위인 동시에 생각을 가다듬고 질문을 키워나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자신만의 산책 코스가 있는데 한 지점을 정해두고 그곳까지만 갔다가 돌아온다고 했다. 체력적으로는 더 갈 수 있는 상태라고 해도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다음 날에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걷지 않을 것 같아서다. 


    그야말로 지금의 변규리다운 산책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이 많으며, 그만큼 오래 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힘을 한 번에 소진시켜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경로를 확인하면서 내일도, 모레도 계속 걷고 싶은 욕망을 지닌 사람. 그만의 호흡으로 이뤄낼 다음 영화와 그의 영화가 거쳐 갈 여러 갈래의 길이 기다려진다. □




    글쓴이. 차한비



    어려도, 추워도, 가방을 내려놓지 않아도, 

    아무데나 걸터앉아서도 가능한 것들이 

    언제까지나 그랬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것을 지켜내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고 싶다.



    Posted by ACT! act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