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113호 인터뷰 2019.03.14.]


    “아마 좋아하게 될 걸요?”

    - 민지연 오렌지필름 대표


    차한비 (ACT! 편집위원)



      독립영화를 즐겨 보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보았을 이름이다. ‘오렌지필름’은 매달 새로운 주제로 단편영화를 선정하여 관객들에게 소개한다. 사실상 영화제를 제외하면 쉽게 만나기 어려운 독립단편을 모아 꾸준히 상영하며, 영화에 참여한 감독, 배우, 스태프 등과 함께 하는 자리를 만들고 있다. 작은 카페에서 시작했던 상영회는 어느덧 4년차에 접어들었고, 지금은 전국 7개 극장에서 진행된다. 상영작은 현재 장편영화를 작업 중인 기성 감독의 초기작부터 이제 막 세상에 영화를 내놓은 신진감독의 작품들까지 다양하게 구성된다. 이쯤 되면 꽤 규모 있는 단체일 것 같지만, 실제로 오렌지필름은 1인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봄기운이 느껴지는 토요일 오후, 오렌지필름 상영회를 총괄하는 민지연 대표를 ACT!에서 만났다. 정말 바쁘겠다고 인사를 건네니 웃음과 함께 “좋은 영화를 만날 때 제일 기뻐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렌지필름, 그리고 민지연은 오늘도 “까봐야 안다!”는 슬로건답게 신선한 기획으로 관객의 마음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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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지연 오렌지필름 대표



    차한비(이하 한비)  자기소개를 듣고 싶어요. 오렌지필름이 어떤 곳인지, 지연 씨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보통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는 편인가요.

    민지연(이하 지연)  반갑습니다. 저는 ‘기획자’라고 소개해요. 영어로는 independent film curator라고 합니다. 아마 정확히 노출되는 감독, 배우와 같은 일이 아닌데다 프로그래머, 홍보와 같이 세분화 하는 일로 제가 하는 일을 소개할 수 없기 때문에 질문을 많이 받는 편이에요. 좋아하는 단편영화 3편을 1개의 기획으로 한 달간 전국 7개의 극장에서 상영하는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끔 타의에 의해 가끔 배급사로도 소개가 되는데, 배급사를 운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웃음). 

    한비  본업이 따로 있나요?

    지연  작년 여름까지는 회사를 다녔어요. 퇴사 후 올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이론과에 입학하게 됐고요. 오렌지필름을 운영하면서 해가 지날수록 ‘내가 영화를 잘 모르는구나’ 하고 부족함을 느낀 부분이 있거든요. 오랜 시간 고민 끝에 공부를 시작했어요.

     

    한비  오렌지필름을 만들게 된 배경이 궁금해요. 왜 하고 싶었나요.

    지연  스물세 살 무렵부터 영화를 좋아했어요. 대학에서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는데 영화 연출부에서 스크립터로 일하기도 했고, 인디다큐페스티발 자원활동과 배급사 인턴도 경험했어요. 어느 날, 배급사에서 만난 분이 미국에 가보면 좋겠다고 추천하시더라고요. 저한테는 너무 먼 얘기처럼 들렸는데, 찾아보니 학생 신분으로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꽤 있었어요. 그렇게 미국을 갔고, 운 좋게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Roxie theater에서 인턴을 하게 됐어요. 오래된 비영리 극장인데 프로그램이 좋았어요. 35미리 필름도 상영하고, 워낙 오래 일하신 분들이 많아서 배울 점도 많았고요. 당시 프로그래머님이 기회를 주신 덕분에, 상영작 선정부터 정산까지 진행하며 지금의 오렌지필름과 거의 동일한 형태로 일해 볼 수 있었어요. 한국에 와서도 그런 일을 계속 하고 싶었는데, 우연히 그때 근무하던 광고회사 근처 카페에서 제안을 주셨어요. 그렇게 조금씩 시작하다보니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이유를 물으면 “좋아서”라고 답해요. 영화 안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니까요. 

    한비  ‘오렌지필름’이라는 이름과 “까봐야 안다”는 슬로건은 직접 지었나요?

    지연  네, 오렌지는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과일이라서요(웃음). 주변에서 잘 어울리는데다가 기억하기 쉽다고 해주셔서 만족합니다. 줄여서 ‘오렌지’나 ‘오필’이라고 불리기도 해요. 음, 처음 시작할 때 단편영화 상영은 한 번의 큰 성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래 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힘들 거라고 생각해서 ‘잘 버텨보자’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리고 이건 어디서 말한 적 없는 이야기인데, 독립영화라고 하면 으레 팔짱 끼고 보는 시선이 있잖아요. 실제로 보기도 전에 재미없고 시시할 거라고 먼저 판단해버리는 경우도 많고요. 직접 와서 영화를 보면 좋아하게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열심히 정성스레 고른 작품이니 와서 봐주신다면 아마도 좋아하게 될 걸요? 하는 마음으로 “까봐야 안다!”는 슬로건을 지었어요. 

    한비  슬로건이 매력적이에요. 패기랄까요, 씩씩함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창구가 부족한 독립단편영화와 잘 어울리는 문장이에요. 

    지연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독립영화’에 관한 일종의 선입견이 있더라고요. 어둡고 심각하고 재미없다는 편견이요. 그래서 오렌지필름 초기에는 의도적으로 밝은 영화들을 상영했어요. 문턱을 낮출 수 있는 영화는 무엇일지 고민하면서 상업성이 있는 영화 위주로 선정하기도 했고요. 일단은 ‘편견을 깨자!’ 싶었거든요. 상영회에 친구들도 자주 초대하고 이야기 나누면서 그런 결을 맞추려고 했어요. 보고 얘기해라, 라는 마음이었죠(웃음). 

    한비  왜 하필 독립단편영화인가요? 특별히 ‘애정’하는 이유가 있나요. 

    지연  사실 영화에 경계를 두지는 않아요. 단편이나 장편이나 독립이나 상업이나 좋은 영화가 좋은 것 같아요. 단편영화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고 구분하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좋은 단편영화를 만나면 ‘아, 이건 정말 장편보다 훨씬 낫다’ 하고 생각하기도 해요. 결국 아니라고는 하지만 단편영화를 ‘애정’하는 부분은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특히 한 감독의 전작을 묶어서 상영하면, 마치 가수의 앨범을 1집부터 차례로 듣는 것처럼 그 감독만이 지닌 무엇인가가 보이거든요. 그럴 때 단편영화의 매력을 확 느낄 수 있죠.


    한비  오렌지필름을 혼자 운영해오고 있어요. 장단점이 확실히 있을 것 같아요.

    지연  아마도 미국에서 영화 일을 시작했을 때, 혼자 프로젝트를 맡아서 진행한 경험이 계기가 된 것 같아요. 1인 시스템이라고는 하지만 주변 친구들이 와서 많이 도와줬어요. 의자도 같이 나르고 홍보도 함께 해주고요. 극장이나 디자이너의 도움도 받고 있으니까 완벽하게 혼자서 한다는 느낌은 아니에요. 그래도 장점이라면 회사 생활과 달리 누군가에게 따로 결재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웃음)? 단점은 뭔가 힘든 일이 있을 때 공감받기 어렵다는 점인 것 같아요. 정확히 저와 같은 입장에서 일을 경험한 사람이 없으니까요.

    한비  오렌지필름에서 지연 씨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일은 무엇인가요. 

    지연  업무를 순서대로 얘기하자면, 영화 선정 > 상영 일정 조율 > 홍보물 제작 > 상영본 관리 > GV 일정 조율 > 상영 결과 및 정산, 이렇게 진행되는데요. 제일 중요하고도 좋아하는 일은 영화 선정이에요. 좋은 영화를 만나면 기뻐요. ‘아! 이 영화를 언제 어떻게 상영하지?' 하고 고민하는 순간이요.

    한비  작품 선정을 위해서는 상영작의 몇 배에 달하는 여러 작품을 볼 텐데, 프로그래밍을 기준과 과정이 궁금해요.

    지연  영화는 평소에도 자주 보는 편이고, 최근에는 극장에서 오래 시간을 보낸 것 같아요. 저는 관객들이 똑똑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좋은 영화, 함께 보고 싶은 영화가 선정기준이에요. 한편으로는 제가 ‘오렌지 에인절(angel)'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계신데, 그 분들께서도 영화를 추천해주세요. “이 영화 보셨나요? 오렌지가 좋아할 것 같아요” 라면서요(웃음). 제가 모르는 영화를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물론 스크리너로 볼 수도 있지만, 극장에서 관객과 함께 보는 경험 없이 영화를 선택하면 위험하다고 느껴서 영화제에도 꾸준히 참석하는 편이에요. 

    한비  ‘오렌지 에인절’은 관객들인가요? 고정 관객층이 있으리라 생각은 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적극적인 관계네요.

    지연  관객보다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나 종사자들이 많아요. 아무래도 영화 정보나 수급경로를 알고 계시니까요. 관객 분들은 영화에 관한 의견이나 상영회 피드백을 많이 주시는 편이에요. 


    한비  상영회마다 주제가 다른데, 영화 선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지연  우선은 좋은 영화, 그리고 함께 상영하는 영화들의 밸런스도 중요한 것 같아요. 상영순서도 그렇고요. 영화를 보고 주제를 정하기도 하고, 주제를 정하고 영화를 찾기도 해요. 기획전 제목 짓기도 좋아하는 일이에요. 관객 분들에게 기획 의도나 제목이 영향을 주기 때문에, 크게 보면 가장 중요한 일이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좋은 작품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에 해당하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책도 많이 읽고 산책도 하고 수다도 떨고, 이것저것 많이 해요(웃음). 어딜 가나 항상 오렌지를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한비  매번 기획전 제목이 재밌어요. 2월에 진행한 “위대한 귀여움에 대하여”라는 제목도 상영작과 잘 어울렸고요.

    지연  제가 빠른 사람이 아니거든요. 줄임말도 잘 모르고 컴퓨터 타자보다는 노트 쓰기를 즐기고요. 광고회사에서 일했던 경험도 도움이 되고, 요즘 트렌드를 조금이나마 익히려고 ‘캠퍼스 씨네21’ 같은 잡지도 읽어요(웃음). 2월 기획전 제목은 제게도 의미가 남다른데요. 흔히 독립영화나 단편영화에 관한 감상을 물으면 “뭐, 귀여웠어.” 라고들 하잖아요. 하지만 진짜로 귀엽기는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귀여운 영화, 귀여움이라는 위대함을 지닌 영화를 모아보자는 의미로 기획하게 되었어요. 


    ▲ 2019년 2월 기획전 포스터

     

    ▲ 2019년 3월 기획전 포스터


    한비  다른 영화제나 상영회와 비교할 때, 오렌지필름만의 특징은 ‘매달 새로운 주제’로 기획한 ‘독립단편영화’ 상영회를 ‘전국 극장’에서 개최한다는 점이에요. 처음부터 현재 포맷을 상상했나요?

    지연  이렇게 차이점을 한 줄로 정리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누가 물어보면 이대로 말해야겠어요(웃음). 처음 카페에서 시작한 다음, 옥인상영관에서도 상영회를 진행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고민이 생기더라고요. 꾸준한 상영을 통해 창작자나 관객이 당연히 누려야할 것들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했는데, 수익은 미미하고 괜히 ‘나만 좋은 일’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되었고요. 당시 옥인상영관을 운영하던 분과 이런저런 고민을 나누다가 극장에 상영회를 제안했어요. 오렌지필름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극장에서 개봉하는 다른 영화들과 동일한 조건에서 관객을 만나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거든요. 그렇게 오오극장과 KU시네마테크에서 상영회를 열게 되었고, 지속하다 보니 다른 극장에서도 함께 하고 싶다고 연락을 주셔서 지금은 총 7개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어요. 

    한비  영화로 일종의 패키지 상품을 만드는 사업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공공적 성격을 띠는 무브먼트라는 생각도 들어요. 결국 수익도 수익이지만, 극장의 가치와 오렌지필름의 방향성이 맞기에 지속해올 수 있던 것 같아요. 극장과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나요.

    지연  처음에는 극장에서도 가치나 방향성보다는 ‘그래, 한번 해보자’ 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반응이 괜찮으니 몇 번 더 해보자고 제안해주셨고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전국에서 해보자는 마음에 제주도나 광주까지 지역을 넓혔어요. 관객 중에 부산에 사시는 분이 있는데, KTX를 타고 대구까지 와서 오오극장 상영회에 참여하셨거든요. 그 분이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도 하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인디플러스에 제안했더니 흔쾌히 같이 하자고 하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우연에서 시작한 일들이 지금의 결과로 이어진 것 같아요. 무브먼트적인 성격은 미처 인지하지 못한 부분이라서,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고요(웃음). 그런 의미로 봐주시니 감사한데, 저는 사실 굉장히 개인적인 이유에서 일을 시작했거든요. 좋아하는 일이고 해보고 싶은 일이라서 시작했고 지금도 잘하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이 활동을 기반 삼아서 배급사를 차리거나 영화를 제작할 생각은 없냐고 물어보는 분들도 있는데, 전혀 계획하고 있지 않아요. 


    한비  극장뿐만 아니라 배급사, 창작자 역시 오렌지필름의 주요한 협력단위처럼 보여요. 어떤 식으로 네트워크가 이루어졌는지, 수익구조는 마련되어 있는지 궁금해요. 

    지연  다들 취지를 좋게 봐주셔서 지속해올 수 있는 것 같아요. 진심으로 고마운 일이죠. 특별히 네트워킹이라기보다는 열심히 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쌓여간 부분이 많아요. 수익구조는 단순한 편인데요, 2019년도부터는 소액의 기획료를 가져가게 되었고요. 그 전에는 따로 책정하지 않았어요. 기획료를 제외한 나머지 티켓 수익은 극장과 배급사 혹은 감독님께 전부 지급하고 있어요. 

    한비  기획료를 올해부터 책정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는 해도, 혼자 실무를 담당하면서 개인의 시간과 에너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구조잖아요.

    지연  계속 고민하는 부분이에요. 작년에 저처럼 커뮤니티시네마 활동하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수익배분이나 노동조건에 관한 것들이 결국 생태계의 문제로 이어지더라고요. 예컨대 “오렌지필름은 기획료 안 받던데, 당신들은 왜 요구하느냐?” 라는 식의 부정적인 영향을 고려해야 하는 거죠. 저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좀 더 나은 환경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올해부터는 조정하게 됐어요.

    한비  일하면서 그런 순간들을 경험하는 것 같아요. 여러 사람과 만나다 보면 내 위치나 조건뿐만 아니라 타인이 놓인 환경도 같이 생각해야 하고, 결국 그 고민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요. 

    지연  혼자서는 전혀 알 수 없던 문제들을 왕왕 마주해요. 최근에는 ‘배우전’이라는 형식에 의문이 들어요. 영화를 보다 보면 눈에 띄는 배우들이 있고, 상영회를 매개로 관계가 생기기도 해요. 그 배우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배우전을 기획했는데, 어떤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특정 배우를 명시하고 영화를 상영할 경우, 영화에 나오는 다른 배우나 요소가 지워지는 경향이 있다고. 아무래도 배우 1인에게 초점이 집중되니까요.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충격 받았어요. 이 안에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소외감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당황스럽기도 했고요. 

    한비  아, 저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배우전은 그 자체로 관객의 진입을 도울뿐더러, 특히 독립영화에서 어떤 배우를 호명하고 조명해주는 일은 꼭 필요하다고 느끼거든요.    

    지연  그렇죠. 실제로 배우전을 진행하면 확실히 관객 유입이 늘어나요. 영화에서 배우가 맡는 역할도 생각해볼 지점이고요. 다만 다른 시각에서 이야기를 듣게 되니 좀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겠다 싶어져요. 그런 과정이 재밌기도 하고요. 만나보면 감독, 배우, 배급사, 극장, 관객 모두 생각이 달라요(웃음). 하나씩 알아가면서 시야가 계속 넓어지는 느낌이에요. 말씀하신 부분에도 공감해요. 그런 맥락에서 성과가 중요하지만 또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 감독, 배우와 함께 진행하는 상영회 


    한비  그럼 일하면서 가장 어려움을 느낀 부분은 어떤 건가요. 실무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혹은 관계에서 오는 고민도 있을 것 같아요.

    지연  맞아요, 참 어려울 때가 있어요. 저야 계속하는 일이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스쳐 지나가는 일이다 보니 거리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마음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모르겠다 싶은 순간이 있죠. 이름과 얼굴 정도만 아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은근히 신경 쓰이기도 하고요. 만나는 사람도 천차만별이라 저를 일하는 사람으로서 존중해주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너무 무례하게 행동하시기도 하고요. 한편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다 보니, 의도치 않게 실수를 저지르기도 해서 반성도 많이 해요(웃음). 

    사실 작년에 많이 지쳤거든요.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어요. 비단 일 때문만은 아닌데, 사람에게 이리저리 치이고 기운이 빠진 상태라서 새로운 계기가 필요했어요. 가끔은 ‘아무도 볼 마음이 없고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나 혼자 계속하는 것은 아닐까?’ 하며 불안해지기도 해요. 처음에는 그 생각을 동력으로 삼기도 했는데, 지금은 ‘현타’로 오는 거죠(웃음). 하지만 잘 해보려고요. 영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길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이것저것 경험해보는 편이 훨씬 좋잖아요.

    한비  긍정적인 기운이 느껴져요. 개인적인 동기에서 출발했다고는 해도, 4년이라는 시간을 지속해오는 데에는 그만큼 깊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했겠구나 싶고요.

    지연  사실 처음에 시작할 때, 주변에서 모두 말렸거든요. 안 그래도 초조한데 먼저 시작한 사람들이 만류하니까 불안감이 더 커지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일단 해보고, 나중에 결정하자”는 성격이거든요. 덕분에 좀 피곤해지지만 나름 좋기도 해요(웃음). 이 일도 그렇게 선택했고, 후회는 없어요. 만약 줄곧 영화 일만 했다면 일반 회사 생활에 대한 아쉬움이나 미련이 있을 텐데, 제 경우엔 이미 직장 생활도 경험해봤고요. 비교적 빠른 시간에 원하는 바를 이루기도 했어요. 각자 사정이 다르기에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 이 일을 시작할 때 그만두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거 해도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물론 하세요, 합시다, 라고도 못하겠지만요(웃음). 그저 나름대로 꿋꿋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려고요.


    ▲ 2017년 10월, Roxie theater에서 진행한 기획전 포스터


    한비  일을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이 느껴지네요. 가장 만족감을 느끼는 부분은 뭐예요?

    지연  좋은 작품을 만나고 기획하는 일이 제일 즐거워요. 해마다 만족감을 느끼는 부분이 계속 변하는 것 같아요. 첫 해에는 극장 상영이 목표였기 때문에 티켓만 봐도 좋았어요. 오렌지필름 상영작이 관객과 만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기뻤어요. 다음 해부터는 스코어에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결과가 중요해지면서 관객 수에 예민해지고요. 그래서 3년차에는 뭔가 다른 일을 해보자 싶어서 미국에 갔어요. 인턴으로 근무했던 Roxie theater에서 제가 기획한 프로그램으로 상영회를 열었어요.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였는데 예전의 설렘을 다시 느끼고 재충전하는 시간이 되었죠. “SEOUL, ONLY”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 제작한 단편 네 작품을 상영했어요. 4년째인 지금은 ‘과연 다른 것이 뭘까?’ 라는 고민을 해요.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시작했거든요. ‘아니, 이 일을 왜 아무도 안 하지?’ 라면서요. 그런데 와서 보니까 이미 다 해봤던 일이더라고요. 저만 몰랐던 거죠(웃음). 새로움이란 과연 무엇일지 다시 고민하고, 기획에도 변화를 시도해보려고 준비 중이에요. 

    한비  알고 보니 예전에 다 해봤던 일일 때, 난감하죠. 괜히 시무룩해지기도 하고요(웃음). 내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과거의 역사나 경험이 현재 활동하는 사람들까지 잘 전해지지 않는 구조 같기도 해요. 그럼 지연 씨는 오렌지필름을 언제까지는 또는 언제까지만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지연  시작부터 오래 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야 가치가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요. 일을 잘하는 것보다 어떻게든 버티면서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그만큼 어렵겠다고 각오는 진작 했어요. 그런데 일을 해보니 정말… 너무 그렇더라고요(웃음). 어쨌든 스스로 새롭지 않거나 더 나아갈 지향이 없다면 그만두어야 한다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운 좋게도 취지에 공감해주시는 좋은 사람들을 만난 덕분에 지속해올 수 있었어요. 특히 제 또래의 연출, 배우, 극장 담당자, 배급사 담당자들을 만나서 함께 성장하는 느낌을 받는다는 점이 엄청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다들 잘 되면 좋겠어요!


    한비  대화를 나눠보니 기획자는 외롭고 부담스러운 자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주체적으로 일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기획자로서의 자질이랄까요, 어떤 점을 갖추면 좋을까요? 

    지연  기획자의 일은 ‘좋은 영화를 어떻게 소개할까’ 라는 고민이 첫 번째인 것 같아요. 좋은 영화를 찾아내고, 관객과 같이 보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것이 일이죠. 영화를 선정하는 것도 능력이지만,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필요해져요. 기획을 단계별로 나누면 1-2단계까지는 자유로운 편인데, 그 다음부터는 여러 관계자들과 만나서 요청하고 설득하며 진행되니까요. 원활한 의사소통이 중요할 것 같아요.

    한비  장기적인 목표가 있나요. 앞서 새로운 시도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성을 지향하고 상상하는지 궁금해요.

    지연  단편영화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고 싶어요. 가능한 자립적인 형태로, 가능한 새로운 일을, 가능한 잘 하는 것이 목표예요. 현재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해외에서도 상영해보고 싶고, 극장이 아닌 또 다른 상영공간을 찾을 수도 있고요. 최근에는 GV에 대해서 많이 고민 중이에요. GV가 어쩔 수 없이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면이 있는데, 관객과 만나는 시간을 좀 더 잘 보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올해는 포럼이나 세미나를 진행해볼까 싶어요. 개인적으로 아카이빙이나 평론에도 관심이 많아요. 유명한 기성 평론가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만들면, 그 역시 누군가에게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뭐, 사실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시작이 어려워요. 예전에는 ‘하다 보면 늘겠지’ 라는 배짱으로 밀어붙였다면, 지금은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가봐요(웃음). 시간이 지날수록 오래 하신 분들이 대단하게 느껴져요. 꼭 영화 일뿐만이 아니라요. 언젠가 5년, 10년 뒤에 뭘 하고 있을 것 같냐는 질문을 받았거든요. 진짜 모르겠다고 답했어요. 학생이었다가 직장인이었다가 지금은 오렌지필름을 하고 있으니까요. 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것만도 힘들고, 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비  “오래 해야 가치가 생기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게 떠오르네요. 오렌지필름의 2019년도 기대되는데요, 그럼 끝으로 민지연 기획자가 추천하는 봄 영화를 소개하며 인터뷰 마무리 할까요(웃음).

    지연  우선 3월에 오렌지필름은 기획전 “눈을 감아보면”을 열고요(웃음). 김희진 감독의 <수학여행>, 곽민승 감독의 <밝은미래>, 심민희 감독의 <홍제천 후리덤>을 상영합니다. 많이 와주시면 좋겠어요. 얼마 전 개봉한 <국경의 왕>과 <내가 사는 세상>도 함께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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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렌지필름을 만날 수 있는 곳


    서울 / 인디스페이스

    “인디스페이스는 이름만으로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10년 이라는 시간동안 지속적으로, 그것도 훌륭히 운영한다는 점이 해가 갈수록 대단하게 느껴져요.”


    서울 / KU시네마테크 

    “건국대학교에 있는 극장인데, 봉준호 감독이 추천할 만큼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어요. 아, 관람 시에 도장을 찍어주는데, 저도 상영할 때마다 도장 모양이 궁금할 정도예요!”


    부천 / 판타스틱큐브

    “부천시청에 있는 전용관. 영화 서적도 구비되어 있고, 카페 등 편안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서 찬찬히 시간을 보내고 싶어진답니다. 부천 시민들이 많이 찾아주시면 좋겠어요.”


    대구 / 오오극장 

    “대구 영화의 중심이 되는 곳이에요. 함께 영화를 제작하며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다른 지역에서도 좋은 모델이라고 생각하고요.”


    부산 / 인디플러스 영화의 전당 

    “영화의 도시답게 관객 참여도가 높아요. 극장 담당자가 마음을 다해서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요. 함께 일하면서 많이 배운답니다.”


    포항 / 인디플러스 포항 

    “얼마 전 대구에 갔다가 들렀는데, 극장 시설이 정말 좋아요. 근처에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거의 없는 지역이라,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곳이라고 생각해요.”


    광주 / 광주독립영화관GIFT 

    “인스타그램으로 항상 연락주시는 관객분이 계셔요. 광주에 이 극장이 있어서 서울까지 안 가도 되니 좋다고 하세요. 그만큼 필요하고 유의미한 극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렌지필름 홈페이지 http://www.theorangefilm.com

    ▶오렌지필름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orange_film/



    Posted by ACT! act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