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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32호 미디어운동] 황새울에서 밝힌 저항의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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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32호 / 2006년 5월 30일

황새울에서 밝힌 저항의 스크린
 
여은 ( 인권영화제 자원 활동가 )

황새울의 노을은 특히나 아름답다고 한다. 대추리는 그동안 인권영화 정기상영회인 ‘반딧불’ 을 계기로 뜨문뜨문 몇 번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지만, 말로만 듣던 노을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곳을 사랑하는 사람 그 누구도 원치 않는 흉물스러운 철조망이 둘러쳐진 황새울의 들판 위로, 오늘도 어김없이 황금빛 노을은 말없이 지고 있다. 드넓은 들판 위로 너울너울 넘어가는 그 노을은 마치 황새울 영화제가 곧 시작할 것임을 알리는 것만 같아, 난 촉각을 한껏 곤두세운다.
여기까지 들어오는 것은 만만치 않은 과정들의 연속이었다. 평택역에서 모인 관객들과 스탭들은 어젯밤 비밀리에 기자재를 싣고 먼저 대추리로 향한 선발대 스탭들의 연락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난 한시라도 빨리 대추리로 들어가서 영화제를 준비하는 손길에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야속하게도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기다림의 시간은 기약 없이 길어지고, 연락은 언제 올지 알 수 없고, 그날따라 햇볕마저 유난히 따가웠다. 막간을 이용해 문화연대의 유인물을 함께 배포하기로 하고 평택역 주변을 돌아다녔다. 평택 시민들의 반응은 역시 각양각색이었다.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는 오늘 열리는 황새울 영화제를 홍보하기까지 했지만, 유인물의 제목을 보자마자 다시 가져가라면서 고함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주류 언론에서 ‘평택 미군기지’ 라는 단어를 쓰는 빈도수는 점점 늘어나지만, 막상 그곳에서 살아온 대추리 주민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주류 언론의 철저한 무관심을 반영하듯, 평택역의 분위기는 핏빛으로 얼룩진 대추리의 절박한 상황과는 너무나 괴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선발대로부터 연락이 왔다. 영화제 자원 활동가들은 4인 1조가 되어 택시를 타고 ‘평화공원’으로 향했다. 예상했던 대로, 택시는 그곳에서 막히고 말았다. 굳게 막아선 경찰들의 무리 앞에서 더는 전진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그들에게 ‘말’이 통할 리가 만무하다. 중대장인지 소대장인지 하는 사람은 ‘대표’ 한명만 들어와서 협상을 하자는 어이없는 요구를 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또 다시 지루한 시간을 그 앞에서 허비해야 했다. 그 사이에 경찰은, 마을 안으로 차를 타고 들어가는 주민인 듯한 사람들에게 불심검문을 하거나 몰래 채증을 하려고 하는 등, 기다리는 사람들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사람들을 ‘무조건 통제’하기 위해 막무가내로 우리를 막고 있는 경찰들의 행태는 그들의 부당함을 반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황새울영화제를 관람하시는 주민분들 (사진:평화바람)
우여곡절 끝에 영화제에 합류하게 되었을 때는,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주위는 온통 깜깜했다. 나는 시선을 무대로 고정한다. 촛불문화제가 끝난 후에 시작된 영화제의 첫 번째 순서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던 인권차력쇼. 고무줄을 들판을 둘러싼 철조망이라고 하며 이빨로 끊기, 장난감 굴삭기 끌기 등, 현재 평택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권침해의 온갖 폭력들을 차력이라는 웃음코드로 씹으면서 분위기를 돋구어준다.
△ '인권차력쇼'의 한장면 (사진:평화바람)
다음으로는 대구함 세상의 마당극과 인권영화제에서도 공연한 바 있는 필리핀 민중가수 JESUS M. SANTIAGO, 버마 민중가수 Som Khom Huenn의 노래가 이어진다. 노래로 차
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정일건 감독의 <대추리의 전쟁>이 상영된다. 관객 중의 대다수는 주민들이었고, 때문에 호응도 높을 수밖에 없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쭉 이어지는 영화를 따라서 관객은 영화 속에 등장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함께 욕하고 웃는다.
△ 황새울영화제의 관객들 (사진:평화바람)
영화 속의 ‘현장’, 대추리에서 실제로 밝혀진 스크린. 그리고 스크린에서 보이는 모습들은 분명 어느 정도의 시간차가 있다 하더라도 얼마 전까지 이곳에서 일어났던 생생한 현실 그 자체이다.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땅에서 있었던 ‘전쟁’과 같은 처참한 현실들을 목도하는 것은 가슴 먹먹해지는 일이었지만, 대추리의 공기를 직접 느끼며 주민들과 함께하는 시간이었기에 그 의미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인권영화제의 마지막을 굳이 무리하면서까지 대추리에서 마무리했던 이유는, 현재 이곳이 인권영화제가 말하고자 하는 인권의 현주소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일정 기간 선보이는 일회성 행사에 가까운 인권영화제가 시의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부분들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때로는 부피를 축소해서, 움직이고 찾아가는 영화제로 거듭나, 영상을 통한 저항을 펼치는 것. 극장 안에만 갇혀 있는 영화제가 아니라 대추리로, 그 밖의 운동의 주체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 스크린을 밝히는 것. 그것이 인권영화제가 추구하는 가치와도 부합하는 것이라 믿는다.
대추리는 너무나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오늘의 경험을 통해서 깨닫는다. 언제나 그러하듯 주류 언론은 진실을 외면하고 있고 경찰과 국가의 폭력이 점점 극에 다다르고 있는 시점에서, 대추리를 향한 연대의 움직임은 절실하다. 황새울 영화제는 인권영화제가 평택 투쟁과함께 하기 위한 나름의 역할이었고, 그것이 조금이나마 연대를 위한 힘에 보탬이 되었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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