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36호 / 2006년 11월 16일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 , 멕시코 와하카의 민중 봉기와 인디미디어 |
김해숙 (gomediaction.net) 1. 와하카는 멕시코 남부에 위치한 전통적인 마을로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지리적 환경과 마을 중심에는 역사적 유물이 많아 관광객도 끊이지 않는 지역이다. 그러나 지난 5개월 동안 이 마을에서는 목숨을 건 저항이 계속되었고, 모두 15명이 총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여성을 포함한 수많은 부상자를 발생하였다. 미국 정부는 와하카를 위험지역으로 선포하고 자국민의 여행자제를 촉구하고 있다. 시위로 인해 와하카로 가는 수많은 길이 봉쇄되기도 했다. 와하카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사건의 개요 설명).2. 지난 5월 22일 와하카 지역의 교사들과 교육종사자 약 7만여명은 교사의 임금인상과 와하카 주의 관료인 '율리세스 뤼즈(Ulises Ruiz)'의 사퇴를 요구하며 총파업에 나섰다. 이 인물은 과거 70여년간 멕시코 정치를 독점해 온 제도혁명당에 소속되어 있다. 오랫동안 우파가 득세하며, 저항세력을 탄압해온 멕시코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기실 이것은 지난한 투쟁의 길의 선포임에 다름 아니었다. 5개월 간의 투쟁과정에서 방송국을 점거하여 주민들이 촬영한 비디오를 방영하기도 했다 (참조).그동안 와하카 지방정부와 멕시코 정부의 탄압과 폭력 진압은 더욱 가혹해졌다. 지난 5월 22일 총파업을 선언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열 명 정도가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사망자 기록은 8명에서 최고 15명까지 되고 있다. 현재 이 사태에 대한 희생자의 통계에 대한 수치는 그 편차가 심한 편이다. 즉 이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정확한 진상파악이 어렵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또한 강제 연행되어 군감옥에 수감된 인원도 수십명에 이른다..(자료사진 : 멕시코 인디미디어센터) 3. 지난 10월 27일은 민중의 저항이 무엇보다 그보다 거세게 이루어진 하루였다. 와하카 지방정부는 물론 멕시코 정부도 연방경찰을 투입하여 진압에 나섰다. 와하카 지역에서는 수 대의 헬기가 마을 주변을 정찰했으며, 약 4천 명의 경찰이 강제 진압에 동원되었다. 시위 중인 교사들과 시민들은 계속적으로 율리시스 뤼즈의 해임을 요구했으나, 사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호하게 시위대의 요구 사항을 거절하고, 이러한 사태가 오래가지 못하고 종결될 것이라 단언했다. 10월 28일, 멕시코 정부 역시 평화 운운하며 시민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경찰투입으로 사태의 종결을 서둘렀다(연방경찰의 투입 | 와하카에 투입된 경찰을 희화한 사진들 - 제목: 새로운 관광). 10월 26일 사망 전 날, 와하카에서 브래드 윌의 모습 (자료사진: 뉴욕인디미디어센터) 4.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와하카의 투쟁은 멕시코 국내는 물론 국제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물론 결정적인 운동의 흐름을 만들어낸 사건은 단연 '브래드 윌(Bradley Will Roland)의 죽음이었다. 그는 10월 27일, 사복을 입은 무장괴한에게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그는 뉴욕의 인디미디어센터의 다큐멘터리 활동가로, 멕시코 이전에 이미 볼리비아와 브라질에서도 활동한 바 있었다. 그는 당시 시위대의 약간 뒷부분에서 촬영을 진행하고 있던 상태였으며, 정확하게 가슴 아래쪽에 총격을 입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있던 그가 총격을 받고, 그것도 급소가 정확히 맞고 사망한 것에 대해 표적 사격이라는 의구심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브래드는 총파업이 시작되고 한 달 뒤에 와하카 지역에 도착하여 약 4달 이상을 그곳에서 촬영 활동을 했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카메라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가 의식을 잃는 순간 카메라는 땅에 떨어지면서, 우리는 땅에 떨어진 카메라의 렌즈가 낮은 각도에서 보는 스산한 거리와 총소리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면서 그의 죽음을 비통함 가운데 알게 된다. 이 비디오는 영어로 번역되어 인터넷에 상영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브래드 윌이 마지막 순간까지 찍은 비디오 - 영어자막).5.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기 시작했고, 그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저항과 투쟁의 대상이 보다 명확해지게 했다. 그러나 브래드에 대한 추모가 끊이지않는 가운데 또하나의 잊혀진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에콰도르 출신 인디미디어 활동가, '레닌 나제라(Lenin Cali Najera)' 역시 비슷한 상황에서 사망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브래드의 경우와 같이 큰 반향을 이끌어 오지 못했다. 예컨대 구글에서의 검색결과만 봐도 그렇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왜 같은 죽음은 다르게 기억되는가. 그것이 미국인과 에콰도르인의 것이라는 차이 때문인가? 혹은 그가 마지막까지 촬영했던 비디오가 주는 강력한 메세지 때문인가?(문제제기). 이러한 문제제기까지도 포함하여, 여하튼 브래드 윌의 죽음은 전세계 독립미디어 활동가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새로운 독립미디어의 활동과 전세계적 네트워크에 대한 논의의 촉발점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6. 와하카 사태와 관련하여 지역의 민중투쟁 동맹은 이 사태와 관련한 성명을 발표하고 정부의 태도를 강력히 비난했다. 사파티스타 민중해방전선 역시 성명을 발표하고, 와하카 민중의 투쟁에 적극 지지를 표시하고, 그들과 함께 투쟁할 것을 제안했다. 사파티스타 민중회의는 지난 2006년 11월 1일 멕시코와 리오 그란드 북부에서 시내 도로와 고속도록, 버스정류장, 공항 등 집회가 가능한 모든 것에서 기습시위를 기획했고, 지속적으로 투쟁을 함께 할 것을 다짐했다. 또한 와하카 시위대의 상황은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있기도 하다. 지난 27일 이후,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는 다소 소강상태로 돌아섰지만, 시민들은 계속 광장을 떠나지 않고, 밤을 지새우며 투쟁의 결의를 다지고 있다. 사실 교사들의 임금인상요구는 매해 봄마다 있었던 일이었다. 이것이 다른 지역 조합원과 교사들까지 합류하게 되면서 시위대가 보다 급진적이고, 강력하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좌파를 억업하는 것이 요청되었던 뤼즈오서는 6월 14일 이후 연방 경찰을 동원하여 폭력적 강경진압을 시도한 것이다. 멕시코 의회는 조사단을 구성하긴 했지만, 강한 영향력 없이 그저 간단한 설명을 요구하는 정도였다. 27일 시위 이후, 일부 교사들이 파업을 풀고, 학교로 들어가는 것에 찬성했지만, 아직 학교가 완전히 정상화된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8. 한국에서 와하카의 소식들은 매스 미디어에서는 거의 제대로 언급되지 않으며 , 일부 독립미디어 진영에서 소식을 전하고 있다 . 게다가 이러한 정보들의 절반이 스페인어여서 한국에서 이 소식에 대한 빠르고 정확한 정보들은 더더욱 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 그러나 우리는 멕시코의 상황에 주목하고 연대해야 할 여러 이유가 있다 . 멕시코에서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내용의 사건들이 종종 벌어진다 .와하카뿐만 아니라 아뗀코라는 지역에서는 평택과 같이 강제철거가 공권력에 의해 자행되고 있고 ,이 과정에서 14살의 소년이 사망 , 수십명이 수감되기도 했다 . 멕시코는 1968년에도 시위대를 향한 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수많은 인명이 학살된 경험이 있다 . 이 학살로 인해 400여명이 죽고 , 천명 이상이 심한 부상을 당했는데 , 이 발포는 멕시코의 정치상황에서오래 전부터 지속된 좌파에 대한 탄압이기도 했다 . 이후에도 멕시코의 정치 , 사회적 상황은 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를 비롯해 구조적으로 빈곤층을 양산해내는 경제구조와 정치권의 부정부패의 고리 등으로 매우 불안하게 이어져왔다 . 최근에 이루어진 선거에서도 좌파는 근소한 차이로 패하여 정치적 균형을 이루는 길에 진입하지 못했다 . 비판하고 , 저항하는 세력들에 총구를 들이대는 현실이 멕시코에서 수십 년간 지속되고 있다 .와하카에서 투쟁이 계속되는 사이에 미국 정부는 국경을 넘어오는 멕시코 이민자에 대한 문제해결의 하나로 국경에 높은 장벽을 세우기로 결정했고 , 멕시코 정부는 이에 대해 실효가 없으니 이 계획을 철회할 것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 미국이라는 제국에 종속된 멕시코의 정치적 상황과 민중의 삶이라는 관점에서도 이번 와하카 문제를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이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우리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명확한 연대의 이유가 있으니 , 그 이후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 □* 참고: 인디미디어센터 네트워크의 성명서 , 2006년 10월 29일 미국 저널리스트 윌리엄 브래들리 로랜드, 멕시코 와하카 무장단체에 의해 사망, 미국 대응 방침 계획중.미국 인디미디어센터 비디오 활동가인, 브래드 윌이라 불리는 윌리엄 브래들리 롤랜드가 어제 멕시코 와하카에서 전 멕시코 정권인 PRI와 연관된 무장단체에 의해 숨졌다. 윌은 와하카에서 교사들과 직원들이 PRI가 오하카 정부에 미치는 권력에 대한 투쟁을 취재하고 있었다. 뉴욕시 독립 미디어 센터와 라 조나다(La Jornada)에 의 하면 36세의 윌은 산타 루시아 바리케이드에서 30-40 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복 차림의 무장군인에 의해 복부 중앙에 총격을 맞고 적십자로 향하는 도중 숨졌다고 한다.윌의 복구된 비디오 테잎에서 추정된 살해범은 와하카 주의 Felipe Carrillo Puerto De Santa Lucia del camino의 전 대표인 페드로 카모나(Pedro Carmona)로 밝혀졌다고 멕시코 시티의 인디미디어센터(centero de medias libres)는 전했다.최근 이 멕시코시티의 인디미디어센터(http://vientos.info/cml)의 발표에 의하면 극우 민병대와 정부 경찰들이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무장난입하였고, 윌은 마지막 날에 숨진 다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며 이 외에도 17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전했다. 이 도시는 교사들이 지난 5개월동안 점령하고 있었고, 윌은 이 오랜 대립 끝에 희생된 첫 번째 미국인이다.오랫동안 저널리스트이자 운동가였던 윌은 미국의 태평양 북서지역의 토지 점령, 아르헨티나와 에콰도르의 폭동, 브라질의 토지 점령과 볼리비아의 반 민영화등 을 취재한 경력이 있다. 그는 미국에서 국제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앞장서서 활동하는 인물이었으며 안타까워 하는 많은 동료들을 남기고 떠났다.미국의 브래드의 친구들은 다음 날 미국 연방 정부가 멕시코 정부에 압력을 넣어 브래드의 살해를 조사하고 이를 가능하게 한 테러의 정황을 밝히도록 할 예정이다. 더 나아가, 이들은 브래드가 취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 멕시코의 민중 투쟁을 미국에 알리고 연대의 결속력을 단단히 할 것이라고 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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