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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39호 연재] 사람이 있는 ‘만화경의 미디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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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 acteditor 2016. 8. 1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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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있는 ‘만화경의 미디어역사’

윤상길 (꿈꾸는 미디어史家, cyrus92@dreamwiz.com)

이제부터 우리는 미디어의 다채로운 과거모습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렇다고 신문이나 방송 따위에 국한하여, 대학 역사서의 한 귀퉁이에 처박혀 있는 따분한 이야기를 ‘재미’라는 포장지로 그럴싸하게 포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역사를 그저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 정도로 치부해왔던 필자의 과오를 기만적으로 반복하는 것이기에, 그렇게 하고 싶지 않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를 살아나가면서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나름대로 진지한 역사이야기인 동시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역사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필자가 연재를 하기로 결정한 이후 줄곧 해왔던 고민이기도 하였다. 고민의 결과, 편안한 잠자리에 누워 꿈꾸길 원하는 불면증 환자에게 수면제 없이 잠을 청하도록 요구하는 냉혹한 의사처럼, 필자는 독자에게 수면제 없이 잠을 청할 때의 괴로운 뒤척임을 요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렇다고 너무들 괴로워하지는 마시라. 일단 한번 잠이 들면 부담 없이 푹 잘 수 있을 테니까. 이제 우리는 몇 번의 뒤척임을 통해 서서히 ‘미디어의 역사’라는 잠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첫 번째 뒤척임 : 미디어 개념의 확장

‘미디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떠올릴 것이다. 혹자는 라디오를 떠올릴 수도 있고, 또 혹자는 잡지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이 미디어라는 용어를 특정한 하드웨어를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하다보면 사실 한도 끝도 없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라곤 단지 영어 'media'가 'medium'의 복수형이라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medium'이란 무엇인가?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미디엄(medium)은 “중간에 있는(intermediate) 어떤 것....중간상태....효과가 만들어지는 개입하는 사물”이다. 이러한 사전적 뜻을 통해 미디어의 의미를 좀더 유추해 보면, ‘양쪽 가운데 위치해 있으면서 특정한 작용을 하는 것’이라는 잠정적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질문하게 될 것이다. 그 ‘특정한 작용’은 무엇이냐고. 
문제는 여기서부터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그 특정한 작용을 규정하기에는 너무도 다양하여, ‘감정을 전달하는 것’ 일수도 혹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일 수도 혹은 ‘상품을 전달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세심한 독자들이라면 문제가 그리 복잡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특정한 작용’을 어떤 것으로 상정하든지 간에, ‘양쪽 사이에 존재하는 사물’이라면 일정정도 그것은 미디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할 경우, 그 특정한 작용을 신의 뜻을 전달하는 것으로 상정하게 되면, 신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목사나 점쟁이 또한 미디어라 할 수 있다. 물론 인간주체인 나와 외부세계 사이에 위치해 있으면서 세상의 소식을 전해주는 신문이나 방송이 미디어인 것은 더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만약 미디어 개념을 엄격성을 요구하는 보수적인 학술 언어로 이해하려 들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미디어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들이나 혹은 미디어란 말 대신 다른 말로 표현했던 것도 미디어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류는 태초부터 수많은 미디어들을 발명해내고 사용해 왔음에 틀림없다.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부터 고대인들의 그림벽화, 누군가 마구잡이 식으로 그려놓은 낙서(graffiti), 상인(商人), 벽서(대자보), 배나 비행기 혹은 자동차/철도와 같은 교통수단, 도시, 삐라, 전단지, 편지, 그리고 최근의 인터넷까지. 이 연재글은 이렇게 평소 미디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미디어의 역사’ 속으로 편입시켜 생각해 볼 것이다.


두 번째 뒤척임 : 미디어의 역사? 역사 속의 미디어?

그러면 왜 미디어의 역사를 보려고 하는가? 아니 다시 질문하면, 왜 미디어 개념을 좀더 확장하여 이해해야만 하는가? 
“역사는 승자들의 역사이다”라는 혹자의 말처럼,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역사가들의 해석은 그 역사가가 몸담고 있는 현재시점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권력관계를 반영하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한 사회 내의 권력층을 대변하는 역사가는 그 권력층의 이해관계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역사에 대한 인식(흔히 줄여서 ‘역사인식’)은 비록 과거에 대한 인식이기는 하지만 역동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현재의 삶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역사적 작업은 (이미 지나가 사라져 버린 無化된 과거를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라) 과거를 지나 현재 속에 와 있는 과거, 즉 현재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과거를 파악하는 작업인 것이다. 여기서 다시 질문을 해보자. 그러면 왜 우리는 여태까지 ‘미디어의 역사’라고 하면 주로 ‘신문의 역사’, ‘방송의 역사’만을 생각해 왔는가? 다소간의 단순화의 오류를 무릅쓰고 얘기하자면, 그 이유는 바로 이 미디어들이 주로 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디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미디어들의 과거만이 주로 선택되어 파악될 수밖에 없는 반면,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반(反)하는 미디어들의 과거는 서술될 필요성조차 없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기묘한 역사적 우연성(혹은 필연성)이 겹쳐진다. 인류역사상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게 되면 그 미디어는 대부분 물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지배층의 수단이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반대논리로서 뉴미디어를 잘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지배층으로 상승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많은 시간과 돈이 소요되는 뉴미디어를 현실적으로 소유하고 운영할 수 있는 계층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반대논리의 설득력은 떨어진다. 반면,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 제한이 있는 피지배층이나 도전세력은 상대적으로 올드한 미디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동서양의 역사를 막론하고, 인쇄시설을 소유할 수 있는 자본력이 부족했던 피지배층은 이전형태의 수작업인쇄술인 등사판을 이용하여 유인물 또는 전단지를 대안미디어로 사용했던 예를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물론 특정 미디어의 등장에는 항상 ‘보수적 가능성’과 ‘혁명적 가능성’이 병존하게 마련이지만, 과거 인류역사가 보여 온 패턴의 다수는 ‘보수적 가능성’으로의 선택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미디어’ 개념을 확장하여 그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간과되어왔던 미디어들을 살펴보는 것을 넘어서,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올드미디어가 가졌던 혁명성을 복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행히도 (디지털문화의 등장이 아날로그를 완전히 대체할 수 없듯이) 인류사회 속에서 미디어의 역사는 완전한 대체의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축적의 방향으로 진행되었기에 이러한 작업은 충분히 가능하리라 믿는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미디어의 역사는 미디어 그 자체의 궤적을 살펴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인간사회의 역사 속에서 미디어가 어떻게 활용되었는가를 살펴보는 작업이다. 다시 말하면, 진정으로 의미 있는 미디어의 역사는 ‘미디어 그 자체의 역사’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인간들이 그 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하였는가의 역사인 것이다. 따라서 그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생되는 일종의 변화무쌍한 만화경을 이룬다.

드디어 우리는 두 번의 뒤척임 끝에 ‘미디어의 역사’라는 잠에 빠져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꿈 속에서 인류 최고(最古)의 미디어인 소문(rumor)을 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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