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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40호 현장] 카메라를 통해서 느끼는 자유 : 이주여성들이 들려주는 영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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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40호 / 2007년 4월 9일

 

 

카메라를 통해서 느끼는 자유 

: 이주여성들이 들려주는 영상이야기 

김일란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 

밤새 내린 눈은 온 세상을 무채색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아름다운 설경을 반기기보다는 길이 막힐 것을 걱정했다. 이주여성들이 당진문화원까지 먼 길을 무탈하게 와야 하는데…. 한 달 동안 너무나 고생하면서 만든 작품이 드디어 빛을 보는 날인데…. 누군가는 어떤 이주여성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보는 듯도 했고, 누군가는 이주여성들의 작품들을 상영할 준비를 하기도 했다. 또 미디어 워크숍을 진행하는 과정을 꼼꼼하게 영상으로 기록한 활동가들은 오늘 상영회를 위해 마지막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행여 오는 길이 막히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질까 조바심을 내며, 창가를 어슬렁거렸다. 그러나 상영회가 두 시간 남짓 남았을 때, 창밖으로 이주여성들이 자신들이 만든 전통음식과 상영회장에서 입을 전통의상을 준비해서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 보였다. 당진문화원으로 들어오는 이주여성들의 얼굴에서 설레임이 가득했었다. 그녀들의 얼굴을 보면서, 우리 역시 들뜨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문뜩 우리는 “마음 꽃 피는 영화제”라는 상영회의 제목이 상투적이기는 하지만 꽤나 적절하다고 느꼈다.지난 1월, 우리는 서울여성영화제가 “여성, 그 안의 소수자를 만나다”라는 주제에 맞추어 당진문화원과 함께 실시한 ‘이주여성이 만드는 여성영화제워크숍-이주여성이 직접 들려주는 영상이야기’에 강사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미디어 워크숍을 준비하면서 예전보다 훨씬 이주여성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자, 길거리의 플래카드를 더욱 눈여겨보게 되었다. 커다란 고딕체와 노골적인 문구라니! ‘ooo여성과 결혼하세요. 후불제, 환불 가능,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중개업체를 통한 국제결혼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한편, 이주여성들이 놓여있는 현실적인 위치를 고려하면서 미디어 워크숍의 프로그램을 고민하였다. 사전준비 과정에서 주요 쟁점은 ‘이주여성에 대한 배려’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동안 진행했던 기존의 미디어 교육이나 제작과정을 어떻게 이주여성을 고려한 프로그램으로 바꾸어 진행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주여성들이 미디어를 제작할 때 고려해야 할 장비나 커리큘럼의 문제, 언어소통의 문제(통역), 사회?문화적 차이 등과 같은 실질적인 부분들 뿐 아니라, 이주여성이 미디어를 향유할 수 있는 권리에 관한 문제까지 파악하고자 하였다.
우리에게 고민이 되었던 또 다른 하나는 이주여성들의 교육을 통한 기대효과의 지점을 무엇으로 상정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이주여성들이 자신들의 이주 과정과 경험에 대한 거리두기를 통해 자신의 선택이 소위 ‘매매혼’임을 인정하고, 저개발국가 출신 여성들의 이주 메커니즘을 비판하는 것, 이런 것을 목표점으로 둘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러한 목표점이 몇 차례의 프로그램을 통해서 가능할지 만무한 것이지만, 또한 이러한 목표점을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일방적일 수 있다.
이러한 고민들은 두어 차례 진행된 자문 회의에서도 많은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대체로 자문회의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는 결혼을 통해 이주하게 된 이주여성의 사회?문화적 위치 및 이주여성의 상이한 사회?문화적 특성을 이해하는 문제, 서로 다른 국적과 언어를 지닌 이주여성들을 함께 교육함에 있어 그녀들 간의 차이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제, 그리고 교육의 속도, 이해도, 참여도 등에 관한 조언들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언어적 차이에서 예견되는 소통의 어려움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부분이었다.
이러한 사전준비 과정을 통해서, 미디어 워크숍을 진행할 때 우리가 상상했던 것 보다 더 섬세한 언어적 배려가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참여여성들의 국가별로 통역해줄 수 있는 간사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강사들의 ‘언어’에 대한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한국어의 특권적 지위를 인식하고 그것을 희석시켜가는 태도와 방법을 고민해야했다. 이주여성들이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한국어를 빨리 습득하여 스스로를 표현함에 어려움이 없어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 그다지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즉 서로 다른 국가의 사람들 사이에서 언어의 교환은 대등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 우선적이라 여겼다. 다수어가 한국어라 해서 한국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이주여성들의 조건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주여성들의 해당 국가의 언어를 존중하는 강사들의 태도는 단지 서로 대화할 수 있는 물꼬를 트는 역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주여성들의 사회적?문화적 지위를 높이는 과정이자 스스로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주여성 미디어 워크숍에서 또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유쾌함’에 관한 것이었다. 이주여성들에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로서 영상을 익히는 과정도 중요하겠지만, 집안에서 벗어나서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고민하였다. 프로그램의 참여가 한국 사회와 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고단해진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이주여성들은 전업주부들이었는데, 이들은 낯선 공간에서 낯선 가족들과 낯선 언어를 쓰며 하루 종일 집안에서 낯선 가사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여성들이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놀이를 하면서, 무언가 재미난 게임을 익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되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하였다. 또한 이주여성들이 프로그램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보육 도우미를 배치하였다.

프로그램은 베트남, 중국, 필리핀 등 10명의 이주여성들과 함께 총 10회로 진행되었다. 본격적인 미디어 교육 이전의 사전 프로그램으로서 가벼운 몸 풀기 프로그램과 아트북 만들기, 마인드맵 그리기를 진행함으로써, 서로의 경험과 일상을 공유하고 스스로의 감정과 감수성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했다. 또한 다양한 이미지 카드를 통해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기초적인 이미지교육의 시간을 갖고, 이와 더불어서 다양한 상상력으로 종이에 쓴 일기를 영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경험했다.


미디어 워크숍 참가자 중에 우리들이 두고두고 이야기하며 마음에 담게 된 분들이 있다. 한 분은 48세의 필리핀 여성으로, 한국에 이주한지는 벌써 십여 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한국어가 서툴렀다. 이 여성이 유독 우리의 눈과 마음을 붙잡은 데에는 특유의 성실함과 유쾌함 때문이다. 그녀는 다른 국가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발표할 때, 쉽게 알아들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사려 깊게 다른 여성들의 경험에 경청하였다. 그러한 모습에 우리는 ‘듣기’의 태도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편집하는 동안에는 교육 요일이 아닌 날에도 아침 일찍 나와서 그 전날 밤새 계획했던 편집을 이것저것 시도해보았다. 그녀의 남편은 매일 밤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그녀에게, 제발 밤에는 그냥 자고 낮에 문화원 가서 편집하라고 타박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영상에는 소박한 일상과 그녀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컴퓨터를 다뤄봤다는 그녀는 다시는 미디어 워크숍이 하고 싶지 않다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는 그녀의 다짐이 곧 허물어질 것이라 확신하며, “언니가 제일 먼저 다시 하자고 할 것 같애”라고 농담을 던졌다.
혼자 카메라 앞에서 속에 있는 말을 다 털어놓으니, 가슴을 꽉 막고 있었던 무언가가 확 풀어지는 것 같았다고 말하던 베트남 여성도 있었다. 한국에 와서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적당한 상대가 없었는데, 혼자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를 하니 위로 받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어떤 여성은 프로그램 기간이 너무 짧아서, 편집을 충분히 배울 수 없었던 점에 대해서 무척 아쉬워했다. 촬영은 그럭저럭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편집은 너무 어려워서 다시 한 번 정확하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어떤 베트남 여성은 자신이 직접 노래를 불러 뮤직 비디오를 만들었는데, 너무나 애달파서 마지막 상영회날 그 영상을 본 다른 베트남 여성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길을 걷다가 보면, 여전히 노골적인 플래카드에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ooo여성과 결혼하세요. 후불제, 환불 가능,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특정 국가출신의 여성과 결혼을 권하는 이 문구는 더 이상 낯설지가 않다. 오히려 일상의 거리풍경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많은 문구들이 해당 국가의 문화를 폄하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국제결혼이 마치 한국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일이라도 되는 듯이 광고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결혼이 마치 이성애 남성 소수자들의 결혼대책에 최선이라고도 선전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주변에서 무수히 보았던 국제결혼에 대한 광고가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조장하고 인간의 존엄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은 사실이다. 소위 ‘매매혼’의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과정은 그 나라 여성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여성이 속한 국가의 문화를 폄하하거나 왜곡하는 과정이며 나아가 여성-일반을 상품화하는 과정이기에 반드시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는 가운데, 이주여성들이 상처받는 경우가 있음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주여성 미디어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너무나 선명하고 노골적인 이 플래카드의 ‘문구’ 속에 가려진, 한국 사회의 한 주체로서 스스로 자리매김하려는 이주여성들의 현실적인 삶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주여성들이 한 사회의 주체로서 살아가는데 있는 너무나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하루 빨리 한국어에 빨리 익숙해질 것을 채근하지 않으며 한국 음식을 잘 만들게 되기만을 요구하지 않는 가족의 배려인 듯하다. 물론 한국 사회가 이들 이주 여성과 자녀의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고, 한국에서 타자가 아닌 주체로 사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정책이 마련되고 실행되는 가운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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