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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47호 읽을거리] 세계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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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8. 12.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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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47호 / 2007년 11월 29일

 

 

[읽을거리] 세계만화

김 윤 진 (ACT! 편집위원)

 
0. 사춘기 

버스가 회현역 앞 고가도로에 접어들었을 때 권인하는 말을 이었다. 
‘....김현식 씨의 명복을 빕니다.... 그의 곡을 듣겠습니다....'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MBC FM에선 가수 권인하가 프로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둔탁한 목소리를 전파를 통해 내보내고 있었다. 울고 또 울어 잠겨버린 그런 목소리 말이다.
[잠시] 
[창밖이 하얗게 비쳤던 것 같다.]

간경화로 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었지... 결국은....별로 좋아했던 가수도 아닌데. 어차피 갈 사람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웅얼거리는 김현식과 울고 있는 권인하.

이 두 남자의 걸죽한 목소리가 나를 괴롭혔던 모양이다. 스팀도 들어오지 않을 늦가을의 추운 콘크리트 교실이 두려웠던 모양이다....아니 엄마에게 짜증 부렸던 아침의 현관이 날 죄책감으로 몰아넣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보단....]
[진짜 대화를 나눌 친구가] [하나도 없는 학교가]
[나를 너무 비참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앞좌석 등받이에 얼굴을 묻은 나를 싣고 버스는 종로를 지나 명륜동으로 달려갔다. 
그것은 1990년 11월 1일 아침 7시 10분경의 일이다.

- 이 진 경 作 '사춘기(四春期)' 中

1. 상상

우울한 기분으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워크맨으로 FM 라디오를 듣던 버스 안, 뿌연 창밖으로 지나치는 종로 그리고 명륜동, 아침 라디오 DJ의 우울한 목소리와 그보다 더 우울한 김현식의 노래, 엄마에게 짜증 부렸던 아침의 현관..... 이 모든 것은 차가운 1990년 11월 1일 아침 7시 10분경 버스를 타고서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학교에 가는 중 있었던 이야기. 이진경은 [사춘기]를 이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90년 11월을 지나고 있는 여자아이의 학교 가는 작은 시간에서 이 이야기의 프롤로그를 가만히 꺼내어 보는 것이다.
나도 가만히 90년과, 대학과, 그 사이를 지나는 여자아이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펜이 만든 거친 선과 분절된 칸, 구도,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언어들은 이상한 힘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작가가 사춘기라고 명명한, 혼란스럽고 이유 없이 아프면서도 성장하게 되던 그 시기를 나도 모르게 작가의 호흡대로 따라갔던 걸 기억한다. 이상하지. 이상한 건 알지만, [네 여자아이들의 감정과 경험에 관한 회고록]을 보며,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고 말해 본다. 
2000년대를 살아가려는 내가 1990년의 네 여자아이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들을 상상할 수 있는 건, 그리고 작가의 그림 안팎에서 그들의 공허한 내면과 외면을 바라보며 상상할 수 있는 건, 만화의 본질적인 매력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모든 만화작품이 [사춘기]와 같은 힘을 갖는 것은 아니겠지만, 분명 [사춘기]는 만화가 가진 매력을 무채색의 찬란함으로 발현시킴으로써 그 이야기의 힘을 증폭시킨다. 

2. 만화의 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교차배합 



검은색 배경과 그 안팎에서 조금씩 닫히는 연속된 책상서랍, 그에 비례하여 작아지는 그림과 칸, 그림을 잃고 사이에서 떠도는 문장까지. 짧은 방황의 끝은 그처럼 무심하게 닫혀져버리는 마음이며 까맣게 꺼져버리는 관계이다. 이렇게 그림은 칸으로 나뉜 채 이야기를 만나면서 한 페이지 위에 하나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림 안의 서랍은 닫히지만 그 마음은 배경의 폭발하는 빛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보이는 서랍과 보이지 않는 마음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생성되는 힘, 칸과 페이지와 그 사이의 이야기가 건네는 힘, 이것은 만화가 갖는 만화만의 힘이다. 
이러한 만화의 힘에 대해 [세계만화]의 저자 성완경은 이렇게 말한다.

‘만화는 인쇄지면이라는 공간 속에 특유의 방식으로 이야기와 그림을 분절시키고 배열하면서 시공간의 연속체를 만들어낸다. 연속된 칸 그림으로 지면을 구성한 인쇄된 만화 형식이 우리를 사로잡은 힘은, 그것이 칸과 그림과 텍스트로 구성된 지면 위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교묘한 교차배합을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끌어들이는 특이한 힘을 떠나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 성 완 경, [세계만화] p. 20-21

이미지와 언어의 결합이라는 원천적 자력만으로도 만화는 가장 대중적인 호소력을 가진 전달형식을 취한다. 이에 더하여 칸과 페이지, 그리고 그 경계 안팎으로 결합하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만화의 힘은 극대화된다. 이렇게 대중적인 형식과 대중을 자극하는 상상력을 갖춘 만화양식은 현대적 태생에서부터 대중적인 소비와 참여를 유도하기 시작했다.

3. 파괴와 전복과 폭로의 제 9 예술



현대적 의미에서 본격적인 대중만화의 첫 인기주인공인 [Yellow Kid]는 신문사간 구독자 확보경쟁의 산물로 태어났으며, 이후로도 철도망의 확장과 함께 그 안의 승객들을 대상으로 만화산업은 확대되었다. 태생과 발전에서 대중사회와 인쇄매체의 발전과 뗄 수 없는 연관을 갖게 된 만화는 만화 특유의 시각적 서사형식을 기반으로 흡입력과 재미를 갖게 되면서 더욱 대중사회에 밀착하게 된다. 
하지만 만화가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은 이야기의 흡인력과 재미를 통해서만은 아니다. 마치 칸의 경계를 허물고 배경에 그림을 그리듯, 만화는 만화의 유쾌한 상상력을 통해 세상의 경계를 허물고 경계의 바깥의 공간을 독자에게 열어두기도 한다.

‘만화는 상식의 바깥으로, 제도화한 상상력의 바깥으로 우리를 내던지는 위험한 그래피티(graffiti: 낙서)이자 파괴와 전복과 폭로의 예술이기도 하다. 만화의 풍자정신은 우리의 늑간살을 흔들어 하이에나처럼 비통하게 웃게 한다. 만화는 위험하고 지적인 유머와 종횡무진의 상상력으로 우리의 정신을 흔들고 상식의 허를 찌르며 문화의 상투성을 깨뜨린다. 
- 성 완 경, [세계만화] p.19

이처럼 저자는 [세계만화]의 1부에서 영화와 TV에 이어 ‘제 9의 예술’이라고 불리는 만화에 대해 19세기에 만화가 현대적 예술로서 구성되는 과정과 함께 만화의 구체적인 특성을 개괄적으로 서술한다. 하지만 저자가 스스로 밝히듯이 [세계만화]의 중심부분은 세계만화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스물세 명의 만화가와 그들의 대표작을 소개한 3부이다. 여기에서는 초창기 신문만화부터 슈퍼영웅만화까지 만화가 대중문화산업으로 발전한 과정과, 탐정, 모험, 공상과학, 정치만화 등 다양한 장르로의 발전양상, 그리고 언더그라운드 만화 이후 작가만화의 등장, 그래픽 노블에 이르기까지 세계문화사의 흐름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그 중 여기에서 몇 작품을 소개한다.

- 브레시아의 [빼라무스]
1976년부터 1983년까지의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기간 동안 브레시아는 권력의 광기와 위협을 경험하면서도 아르헨티나를 떠나지 않은 채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는 군부독재하의 아르헨티나 현실과 그 속의 민중의 숨결과 지식인들의 고뇌를 그려냈다. 군부독재의 폭력과 그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빼라무스]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빼라무스]의 주인공 빼라무스는 지식인으로 반정부활동을 벌이다가 혼자 살아남기 위해 동료들을 버리고 도망치지만 두려움과 배신에 대한 자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망각의 의식을 행하고 기억을 지운다. 두려움과 배신, 그리고 망각에서 시작하지만, 이야기는 기억을 잃어버린 주인공이 거꾸로 현실을 되찾아 가는 내러티브 구조를 갖는다.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이 브레시아는 의도적으로 압제자의 얼굴을 해골로 묘사되며,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짐작되는 가공의 도시 산타마리아는 회색으로 그려진다. 잿빛 도시에서 망각의 주인공이 자신과 현실을 찾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 은유임을 알 수 있다.



- 브레테셰의 [욕구불만자들]
퇴근하여 들어온 여성이 심각해 보이는 남편을 걱정하여 무슨 일인지 묻지만 아무런 대답 없는 남편은 여성의 불안한 심리를 가중시킨다. 결국 여성은 신경안정제까지 먹고 다시 한 번 물어보지만, 남편을 걱정하는 여성에게 그가 던진 마지막 한 마디. 
“내 문제로 당신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아.” 
- [욕구불만자들] 중 ‘약혼자’

이를 두고 성완경은 ‘자신의 약점을 심각함으로 위장한 채 직장생활을 하는 동거녀에게 심리적 부담을 전가시키는 간교한 남성의 권위주의, 그 앞에서 쩔쩔매는 여성의 심리’를 표현했다고 해석한다. 
작품 속의 욕구 불만자들은 자기모순과 자기 합리화에 둘러싸인 자기중심주의의 전형들로 제시되며 이들을 통해 브레테셰는 직장과 생활, 연애, 섹스, 결혼, 육아, 문화생활과 레저, 교육, 정치 등에서 여성문제의 미묘하고도 복잡한 현실과 파리지앵들의 지식인적인 삶, 그리고 모순을 지적한다. 
남성의 전유물이었으며 남성적 상징물로 넘쳐나며 남성중심주의의 세계관을 반영하던 만화의 역사에서, 브레테셰는 가부장적 질서에 길들어진 지식인 여성들의 저항과 좌절을 통한 자기모순을 그림으로써 남성시각 중심 만화의 내적 전복과 함께 정체된 여성 스스로의 전복을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도 미국만화 최고의 시적 향기라는 헤리만의 [크레이지 캣]이나 민중을 대변한 키노의 [마팔다], 무정부주의적 풍자와 유머를 그린 레제르의 [빨간 귀], 아우슈비츠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만화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슈피겔만의 [쥐] 등, 소개하고 즐겁게 이야기하고 싶은 걸작들이 많지만 여기에서 더 이상 소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세계만화]의 4/5 이상이 이러한 작가-작품론을 소개하는데 할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조용하게, 그리고 묵묵하게 성완경의 [세계문화]를 읽어보길 권해 본다.

4. 만화경으로 보는 이상한 세상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은 단지 [세계만화]를 읽어볼 것을 권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기도 했던 만화에 대한 상상력을 다시 한 번 사유해보고 즐겨볼 것을 권하는 데 목적이 있다. [세계만화]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사춘기]로 이 글을 시작한 것도 이 글을 책에 소개된 북, 남미와 유럽의 만화에 가두지 않고 만화 전반에 대해 열어두기 위함이었다. 
현실과의 어떠한 연관도 없는 환상을 배경으로 하는 만화도 결국은 현실을 지지하여 만들어진다. 만드는 이도, 보는 이도 모두 현실을 바닥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매체로서의 만화는 현실의 껍질을 쌓아올려 만든 구조물이며, 동시에 현실의 중력을 무시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품고 있다. 물론 이는 만화만의 고유한 특성은 아니다. 다른 매체들도 현실을 딛고서 상상하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만화의 고유한 시각적 서사양식과 상상력을 상기한다면, 다른 어떤 매체보다 만화가 현실세계와 그 경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세계만화]에서 소개하는 만화 중 상당수가 너무 매력적이었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현실세계에 대한 파괴와 전복을 감행하며, 은유와 풍자와 해학으로 현실의 중력을 가뿐히 무시하는 [세계만화] 속 작품들은 분명 읽는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동시에 우리의 현실에서 그런 만화를 찾아내고 만들어내고 싶은 자극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5. 몽상

상상해본다. 마치기 전에 잠깐의 몽상으로 그냥, 상상해본다.
명륜동을 지나 종로를 들어서는 273번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의 음악을 들으며 의자에 깊숙하게 몸을 기댄 나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본다. 손에 들린 만화책에는 나의 상상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그 날이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경의 일이라 적혀있었다. 궁금하지만 애써 펴보지 않는다. 상상 속의 나는 이미 이 모든 것이 상상임을 알고 있다. 나는 아직 펴보지 않은 그 만화책을 가만히 덮어두고 대신 희미한 창밖을 바라보기로 한다. 마침 누군가의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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