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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50호 읽을거리] ‘감시’에 반대하는 ‘자유민주주의적 시선’ - 렉 휘테커의 『개인의 죽음 The End of Priv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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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50호 / 2008년 4월 17일

 

 
‘감시’에 반대하는 ‘자유민주주의적 시선’
- 렉 휘테커의 『개인의 죽음 The End of Privacy』- 


김학재*1)
 
‘감시'와 ‘프라이버시'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다. 서울의 ‘강남지역'에 방범을 이유로 CCTV가 설치되고, 핸드폰으로 노동자의 행적을 추적하며, 유명 연예인의 미니홈피가 해킹당하고, 생체정보를 수록한 신분증을 도입하기 위한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감시'가 가장 노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한국일 것이고, 수많은 논란이 발생하고 새로운 제도가 실험되는 곳도 한국 사회일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잘 살아가고 있는 놀라운 곳도 바로 이곳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일반화된 감시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국가권력에 의해 제도화된 감시, 혹은 일상의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감시의 문제를 지적하고 문제삼아온 노력이 시작된 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감시'라는 단어에 일일이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기 보다는, 감시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해보고, 역사적 흐름과 쟁점들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 점에서 렉 휘테커의 『개인의 죽음 The End of Privacy』은 ‘감시'문제를 둘러싼 수많은 사례들과 다양한 주장들뿐만 아니라 여러 이론적, 정책적, 정치적 쟁점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 권력의 문제와 20세기 첩보국가


저자는 ‘정치학자로서 권력이 어떻게 발동되며 누구에 의해서 행사되는가'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잘 알려진 푸코의 ‘파놉티콘' 논의에 따라 권력장치의 하나로 ‘감시'를 이해하려는 것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관점이다. 특히 ‘정보사회'의 도래로 과거의 권력형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감시' 현상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책의 가장 큰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가장 먼저 다루고 있는 것은 ‘국가에 의한 감시'의 대표적 사례인 ‘첩보 intelligence'의 문제이다. 20세기는 '첩보의 시대‘로 불렸고, KGB와 CIA 등 국가 정보기관의 활동은 대중문화를 통해 신비하고 매혹적인 이미지로 수없이 다루어질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자행되는 각종 비밀스럽고 무자비한 권력행사의 상징이기도 했다. 20세기의 국민국가들은 다른 국가들, 특히 적대적인 국가들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 수집을 해왔고, 이 과정에 많은 학자들이 관여해왔다. 저자는 국가가 권력유지를 위해 지식을 동원하는 문제, 스파이와 학자의 관계, 20세기 첩보전을 수놓은 여러 속임수들과 거짓 정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2)
국가가 주도하는 감시는 오늘날 위성과 같은 첩보수집기술의 발달과 확장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첩보원에 의한 정보 수집(Humanint: human-source Intelligence)과 기술에 의한 정보수집(Techint : Intelligence gathered by technical means)이 여전히 동시에 발달하고 있다. ‘전체주의'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큰 기여를 한 대표적인 첩보기구인 KGB와, 나치의 잔악성을 대표적으로 고발하는 게슈타포도 역시 국가 안에 존재하는 ‘비밀국가'로서 국내안보 유지와 내부의 적에 대한 두려움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물론 소위 ‘자유주의 국가'도 예외는 아니어서 비밀경찰과 국내 첩보기관이 설치되었다. 냉전시기 미국의 ‘보안심사'는 매카시즘적인 탄압과 배제의 수단이었고 이를 ‘국가안보'로 정당화하는 ‘유사 전체주의' 국가의 감시 방식이었다. 저자는 미국이 CIA의 첩보기술을 사용해 관련 국가의 정치에 수없이 개입해왔으며, 현재 ‘전세계적 치안유지'를 이유로 감시기술을 활용하고 있는 상황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오늘날 ‘기억되고 있는 전체주의' 국가의 이미지는 지나치게 이상적이며, 실제 전체주의 국가는 사상 통제에 있어서 결코 완전하지 못했으며, 동의를 얻어야 하는 일상의 권력행사에도 서툴렀다는 점을 지적한다. 전체주의에 대한 이미지는 일종의 ‘전체주의에 대한 환영'으로서 이는 ‘21세기에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이는 중앙집중적인 ‘감시 국가'에서 점차 분산된 권력 복합체로서 ‘감시 사회'로 변화되고 있다 는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2.‘감시사회'로서의 근대와 사이버 공간의 정치경제학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저자는 푸코의 권력이론과 ‘감시' 개념을 가져온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을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벤담의 파놉티콘(Panopticon : 원형감옥)은 근대사회 전체를 규정한 근대 규율권력의 상징이었고, ‘감시'기술의 발전과 ‘감시사회'의 등장은 근대 국가와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이 서로 맞물리는 지점이었다. 감옥이나 학교 등을 통해 확산된 ‘감시'는 시선의 비대칭성과 시공간 분할, 육체에 대한 훈육 같은 권력 기술들을 통해 근대적 주체들을 만들어 냈고, 이들은 근대 산업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자들이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원형감옥의 등장이후 ‘감시 공장'이 형성되고, 근대의 ‘감시 국가'가 점차 수많은 ‘정보'를 수집, 처리, 저장, 검색하는 과정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또한 소위 ‘사이버 공간'이라고 불리는 네트워크에서의 변화에 대한 네 가지 입장을 분류하며, 오늘날의 감시문제가 어떠한 배경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첫 번째는 디지털 미래학자들의 입장으로, 이들에게 ‘정보혁명'은 인류를 ‘밝은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밝혀주는 횃불이며, 이것을 가능케 하는 기술변화의 원천은 자본주의이다. 두 번째는 ‘보수주의 혁명가들의 요란한 합창에 대항하여 수적으로 훨씬 열세이면서 전자공학 지식은 떨어지고, 매체엔 더 서투르면서도 신기술에서 사회혁명의 씨앗을 찾는, 보수주의자들만큼이나 열정적인 좌파 예언자들‘로, 이들은 네트워크에서 민주주의가 싹틀 것이며, 국가와 기업이 정보의 흐름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것이고, 시민들이 인터넷을 장악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세 번째는 비관론자들로, 이들은 기술의 결과가 악용되어 일자리가 없어지고, 가치가 타락하고 문화의 발달을 방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이상의 기술결정론을 거부하고 정보혁명은 질적 변화가 아닌 점진적 변화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이 모든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불편하지만 회피할 수 없는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즉, ‘정보혁명이 가난이나 저개발에 대해 마법 같은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라고 생각할 어떤 합리적 근거도 없으며' 오히려 ‘부유한 소수의 사람들이 가난한 대다수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을 영속화,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민주의자들도 컴퓨터가 만능인 것처럼 떠드는데 있어서는 ‘공범'이며, 신자유주의자는 애초에 이를 통해 부와 권력을 재분배하는 것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사이버 공간은 '사유화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공유지'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3. 새로운 감시기술과 ‘작은 독재자'들의 대두


오늘날의 감시는 더 이상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것을 사유화, 상품화 시키는 신자유주의 시기에 나날이 발전한 감시기술은 국가가 아닌 ‘작은 독재자', 즉 민간영역의 감시 기구들의 성장을 가져왔다.


아이를 돌보는 유모를 감시하는 카메라를 설치하고 이를 유지하는 사설 감시업이 새로운 사업으로 등장했고, 부모들은 실시간으로 어디에서나 유모를 감시 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의 주요 도시들에는 골목길마다 CCTV가 설치되었으며, 비디오 감시기술은 나날이 발전하여 사람의 얼굴을 실시간으로 비교분석하는 인식 기술이 등장했을 뿐 아니라, 사람의 옷 속에 숨겨진 물건을 식별하는 투시 기술까지 등장했다. 이렇게 방범 감시장치로 개발된 것들이 망명자나 정치적 반대자, 파업에 참가한 노조원을 향할 수 있으며, 새로운 기술들은 상품화되며 개인과 법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한 가지 사례는 냉전시기 사용된 위성정찰이 상업화되는 것이다. 인텔셑 (Intelsat)이나 영미 통신망(UKUSA)은 원격통신을 도청하며 전 세계 통신 전체를 관장하고 있고, 통신첩보시스템인 애셜론(Echelon)은 

방대한 통신을 감청 분석하는 가공할 감시시스템으로 활용되고 있다. 미국 국가보안국은 전 세계적인 통신위성을 이용하고 항공 여행정보를 이용해 수많은 사람들을 세계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 이 밖에도 가석방된 죄수들에게 채우는 전자수갑 같은 전자식 신원확인 장치들도 급속히 발전하고 있으며, 신용카드를 대체하는 신기술로 스마트카드가 도입되면서 지문과 망막 등 개인의 신체정보가 담긴 감시 체계가 구축되고 있다. 감시기술의 발달은 특히 노동 감시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노동자를 고립시키고, 노조 결성을 방해하는 것 뿐 아니라, 저자는 ‘재택근무'도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가정에까지 침투해 들어가 그들의 노동시간과 생산성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 조직의 확대된 감시능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처럼 감시기술의 발전은 신자유주의화와 더불어 국가가 아닌 기업들, 사적 자본이 ‘작은 독재자'로서 권력화 되는 기반이 되었다. 특히 저자는 감시에 의해 수집된 정보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오늘날 여러 기관들이 수집하고 연동될 뿐 아니라 판매되는 데이터베이스로 인하여 데이터 이용 감시(dataveillance) 가 가능해졌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데이터베이스 악용에 대한 통제를 위해 정보보호법이나 프라이버시 침해와 관련된 정책이 도입되었지만, 대부분의 정부들은 더 많은 데이터를 획득하여 연계, 집적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또한 기존의 정보보호법은 민간 부문보다 공공부문에 더 초점을 두고 있지만, 오늘날 공공영역과 민간영역이 뒤섞이고 있으며, 오히려 민간 정보중개업이 더욱 거대한 사업이 되고 있다. 정부는 공공정보를 ‘패키지'로 기업에 판매하는 것으로 재정 적자를 벌충한다. 대표적 정보중개사업자인 미국의 액시엄(Axiom)사는 1억 9천 6백만 명의 미국인들의 정보를 수집, 분류하여 이를 판매하고 있다. 각종 기록과 증명서 없이는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데이터베이스로 인한 소외는 고도화된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록들이 차별과 배제로 나아가는 것은 더욱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국가안보를 외치는 자들이 ‘국익'을 수호한다고 하듯이, 자본가도 ‘기업이익'을 위해 ‘위험요소'들을 파악하고 대처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간 기업들이 수집하는 ‘데이터 프로필'은 위험인물의 범주를 규정하며 결국 사회적 등급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국가로부터 ‘국적'을 박탈당하듯이 시민사회의 ‘시민권'으로부터 제외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렇게 전방위적 감시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저자는 ‘프라이버시'를 ‘혼자 있을 권리'라는 소극적 용어로 정의하는 것은 원자론적 개인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프라이버시를 사회적, 집단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재정의 하는 것에 공감을 표한다. 소극적 의미의 프라이버시가 종말을 맞이한 것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사회적 관점에서 감시와 프라이버시를 생각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프라이버시'의 문제에 대해서 누가 그러한 질문을 하며, 누가 데이터 검색의 변인을 결정하는지, 어떤 목적과 어떤 이해관계에서 그러한 작업을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4. 다방향 감시의 시대 : ‘소비감옥'과 ‘프라이버시 보호'의 맹점


사람들은 왜 국가와 기업의 전면적이고 노골적인 감시에 저항하지 않을까? 저자는 ‘현대의 원형감옥은긍정적인 혜택 에 기반을 둔 소비자의 원형감옥이며, 그곳에서 최악의 제재는 혜택의 배제 이다'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감시의 강점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경향 이 있다는 것이며, 사람들이 참여해서 얻는 긍정적 혜택 때문에 불리한 점이나 위험을 깨달을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저자는 ‘시장의 감시'가 갖는 아이러니한 특성을 언급하고 있다. 즉, ‘시장이라는 원형감옥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이해하고 그러한 욕구를 채워주는 방식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북미 지역의 자본주의는 최근 몇 년 동안 ‘게이 시장'의 가능성을 인식했다. 저자는 이를 두고 ‘게이 시장의 출현은 게이 및 레즈비언과 사회 간의 관계를 재구조화하는데 있어서, 성적 지향에 근거한 차별의 궁극적 철폐를 향한 중요한 걸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소비자에 대한 감시는 대중소비자로서가 아니라 다른 집단이나 주류집단과의 차이로 그들을 인정하고 정당화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도 이것이 구매력을 가진 사람에게만 이뤄진다는 한계를 지적한 것처럼, 이는 철저히 자본의 시선에 의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항상 수많은 차이와 저항을 포섭해내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상품화된 차이'가 차별을 위한 기록이 되고, 권한을 박탈하고 배제할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소비의 매력과 혜택에서 배제되고, 감시의 눈길에서도 벗어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감시문제의 복합성은 소위 ‘아래로부터의 감시'가 이루어지는 상호감시의 상황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매스미디어가 반영하는 오늘날의 ‘상호감시' 상황에서 정치인의 사생활이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어 공사구분이 불분명해지고, 실제 세계와 공상 세계를 구분하는 것도 점차 어려워지며, 뉴스는 엔터테인먼트로 포장되고 엔터테인먼트는 뉴스가 되고 있다. 이처럼 상호감시가 만연된 사회에서 ‘프라이버시'는 ‘대중의 알 권리'에 대한 장벽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포퓰리스트들은 아래로부터의 감시가 가진 역설을 감추며, 자유주의자들은 감시의 침해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거나, 그러한 침해를 최소화하는 법적, 도덕적 보호장치를 만들어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것이 해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프라이버시 보호는 본질적으로 정보의 자유와 갈등관계에 있다' 면서 ‘프라이버시 보호'가 보수주의적 선택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 하고 있다. 나아가 저자는 역감시는 ‘감시'자체의 중요성을 강화하고 익숙하게 하여 이를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5. 감시의 전지구화와 국민국가의 몰락


마지막으로 저자는 ‘전지구화( globalization )'가 이루어지는 현 상황에서 어떤 형태의 권력이 등장할 것인가에 대해 검토한다. 네트워크 사회는 전지구화 되고 있으며, 이러한 네트워크 사회에는 어떠한 권력 형태가 등장할 것인가? 저자는 국민국가( nation state )의 쇠퇴와 몰락을 인정하면서 민간 중심의 경제 권력이 점차 정치적 권력의 성격을 갖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분산화와 해체, 민영화가 가져올 ‘21세기의 디스토피아'를 예견하는 모우쇼비치의 의견에 반대한다. 모우쇼비치는 정보 경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채 지속적인 빈곤을 겪고 있는 수백만이 존재하며, 국가는 그들의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고, 이들은 점차 국민국가의 사회적 혜택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비관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멕시코 사파티스타 반군의 저항, 수력발전소 건설 저지를 위한 캐나다 퀘벡 지역의 크리 인디언들의 국제 연대 투쟁, OECD의 다자간 투자협정에 맞선 비정부기구들의 인터넷 운동 등의 사례를 언급하며 새로운 정보기술이 새로운 저항 형태를 이끌어내고 있다고 평가한다. 인터넷은 그 자체의 가능성 보다는 모두에게 열려있는 ‘신기술의 파괴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권력의 분산은 ‘감시자들을 감시'하는 것을 가능케 하여 ‘저항 네트워크의 세계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낙관적 전망의 연장선상에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독재 권력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즉, 세계적인 자본가들에게는 개방되어있지만 정치적 기회에 있어서는 폐쇄된 ‘싱가포르'나 정부의 감시가 심한 중국의 경우가 있더라도, 새로운 감시기술로 ‘히틀러'와 ‘스탈린' 같은 독재자가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감시권력은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외주(outsourcing) 받은 독재에 불과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말하자면, 오늘날 부유한 서구 국가들로 이주한 이민자들과 난민들에 대한 초국적인 치안 협조나 테러리스트에 대응하기 위한 정찰 위성과 감시기술이 존재하지만, 이는 감시와 배제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거나 국가의 권력 확대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네트워크 세계 안에서 기능적으로 전문화된 일의 하나' 정도의 위상을 갖는다는 것이다.



6. 감시패러다임의 변화와 감시의 사회화


이 책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감시'와 관련된 수많은 사례들과 다양한 쟁점들을 짚어보고 있어 ‘감시'문제의 현황을 살펴보는데 풍부한 지적 창고가 되고 있다. 하지만 몇 가지 단점과 아쉬움들을 갖고 있어 주의하여 읽어야 할 지점들이 있다. 저자는 결국 정보기술이 감시 권력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재구조화 하였고 이는 과거의 전체주의적 독재와 다른 긍정적 특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권력은 분산되었고 기술은 수평적 연대를 위해 열려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저자의 입장을 관통하고 있는 ‘전체주의적 감시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적 낙관'이란 틀에 만족할 수 있을까?


먼저 이 책은 여러 사례와 감시에 관한 여러 논의들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고, 감시문제에 대한 막연한 낙관론과 비관론을 넘어선 다각적 검토를 수행하고 있지만, 오히려 저자만의 뚜렷한 입장이 없다는 단점이 있다. 어떻게 보면 산만하다 싶을 정도로 여러 대상과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각각의 주제에서 제기되는 쟁점들에 있어서는 ‘무난한 정답'들을 선택하는 절충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모든 사례를 아우르며 세계의 범죄에 대처하려는 태도에서 오히려 제국적 시선의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3)
이는 저자가 푸코를 인용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즉, 저자는 규율권력과 생체정치(bio-politics)의 통치성(governmentality)을 논하는 푸코의 사상 전반을 따라가며 ‘감시권력'의 함의를 충분히 살리고 있기 보다는, ‘감시'와 ‘파놉티콘' 등 일부 개념을 전자감시 논의를 위해 차용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감옥의 권력기술인 '감시‘의 기원과 결과, 그것의 배경에 대해 언급하는 논의를 이해한다면, ‘감시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근대성과 홀로코스트 Modernity and the Holocaust』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오늘날의 감옥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상징하고 있는 이 시대의 지배권력의 ‘의도'와 ‘목적'의 성격을 분석하고 있다. 오늘날 거의 모든 나라에서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의 수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으며, 이러저러한 이유로 사회의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현재까지 미국이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4),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증가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거의 모든 정치세력들은 이 문제에 관해서는 거의 완전히 일치하고 있고, 감옥은 항상 노동계급들로 채워진다. 이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인구 1000명당 8명의 수인을 예상하여 ‘예술적인 상태'의 감옥을 건설했다.
 펠리컨만의 감옥은 완전히 자동화되어 있으며, 수감자들이 간수들이나 다른 수감자들과 실질적으로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되게끔 설계되어 있다. 수감자들은 창문 없는 감방, 콘크리트와 철창으로 튼튼하게 지어진 감방에서 지내야하며, 작업장에서 일하지도 않고 오락에서도 차단되어 있으며 다른 수감자들과도 뒤섞일 수 없다. 간수들도 유리로 막아놓은 통제실에서 수감자들과 스피커로만 소통하게 되어있다. 이는 일종의 관이다. 바우만이 보기에 펠리컨 만 감옥은 파놉티콘의 최신판이 아니다. 파놉티콘은 기본적으로 ‘정상'으로 돌아오게 할 ‘교정'을 목표로 한 것이었고, 이는 단조롭게 반복되는 힘든 노동을 지속적으로 하게 해야 했던 산업자본주의와 노동윤리시대의 것이다. ‘교정'은 그러한 저항을 극복하고 그럴듯한 항복을 받아내는 작업이었다. 즉 이러한 수용소는 규율된 노동의 공장이었다. 그러나 늘어나는 노동량을 흡수하는데 열중했던 자본은 신자유주의 금융화 시대에는 실업률의 하락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현재 유연노동의 슬로건은 시계 톱니같이 꾸준하고 정규적인 ‘일의 습관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펠리컨만 감옥은 ‘배제의 공장'으로서, 사람들을 ‘배제된 상태로 고착시키는 공장'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펠리컨만 감옥은 완전한 이동불가능성/소통불가능성의 기술이 실현된 곳이며, ‘지구화의 쓰레기들'이 실험되고 그들의 한계가 검토되는 실험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5)


이처럼 ‘감시'를 권력기술의 적용과 그것의 의도와 관련된 구조적 경향으로 이해하고 고민한다면, 보다 심층적인 분석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나열한 사례들을 표면적인 현상의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은 ‘감시'를 단지 ‘행위'나 권력의 ‘형태' 정도로만 축소하여 이해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는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폭이 현저히 좁아지게 된다.
나아가 저자는 ‘감시'의 문제를 ‘강제와 자발', ‘자유주의와 전체주의'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할 때, 저자가 스스로 뚜렷한 입장을 내세우기를 최대한 자제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 있는 그 입장을 ‘자유민주주의적 시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도 하다. 저자가 ‘전체주의적 감시'에 대해 비판하는 근거는 ‘인권'이 아니며, 그것의 ‘전체주의적 강제성'이다. ‘강제와 자발'이라는 이분법은 ‘자유주의' 대 ‘전체주의'라는 냉전시기 미국이 만들어낸 단순 이분법으로 이어지고, 강력한 ‘국가권력'을 무조건 악으로 보고, 국가권력의 약화와 자유의 증대를 선으로 보는 이분법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감시'의 문제는 단지 ‘강력한 국가'의 ‘권력남용' 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국가권력의 약화와 축소로 해결되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소위 ‘자유주의국가'와 ‘소비자본주의'하의 ‘자발적 감시'는 문제가 없고, ‘자본'에 의한 감시는 정당한 것인가? ‘전체주의'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우리는 과연 누구의 자유를 옹호하고 확대시키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스스로를 국가와 자본, 카메라와 타인의 시선에 ‘자발적'으로 노출시키려는 사람들의 행동을, 사회적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시선을 끌어들이려는, 자신의 실존을 보증해주는 시선을 받으려는 필사적 노력으로 보는 것은 무리일까? 기계로 매개된 권력의 시선에 사로잡힌 결과 점차 ‘우리의 시선'이 사라져가고, 허구와 현실이 구별 불가능해질 정도로 뒤섞인 사회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현실'을 ‘연기'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이 우울하다고 느끼는 것은 지나친 비관일까? 이러한 복합적인 사회 문화현상의 함의는 무엇이며, 이를 추동하는 저변의 구조적 힘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충분치 않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보호하고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과연 ‘개인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만이 우리의 진지인가? 우리는 누구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야하는가? 자유의 문제에 있어서 그것이 누구의 자유이며,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를 물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가 무엇을 왜 감시하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해야 할 것이다.
 과거 전체주의 국가들의 비밀경찰이 행하던 감시와 감독은 오늘날의 감시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 수준에 불과한 지경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삶의 가장 일상적인 부분까지 퍼져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디지털 네트워크의 사회화, 사이버 공간의 사회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오늘날의 위협에 대한 올바른 응답은 ‘사적인 자유의 섬으로의 후퇴가 아니라 사이버 공간의 더욱더 강력한 사회화여야 한다'는 지젝(S. Zizek)*6)의 논의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지그문트 바우만, 김동택 옮김, 『지구화, 야누스의 두 얼굴』, 한길사, 2003.
슬라보예 지젝, 한보희 옮김,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새물결, 2008.
홍성욱, 『파놉티콘 - 정보사회 정보감옥』, 책세상, 2002.



* 주
1)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박사과정 수료.
2) 국내에도 저자의 관련 논문이 번역되어 있다. 렉 휘테커(Reg Whitaker), ‘탈냉전 이후 미국의 안보와 첩보', 서재정, 정용욱 엮음. 『탈냉전과 미국의 신세계질서』. 역사비평사. 1996. 이 밖에도 정보기관의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 책이 참고 할만하다. 이주영 역, 2003. 『조작된 공포 - 세계 정보기관의 진실』. 창비. 그리고 냉전기 미국의 군산학복합체에 대해서는 Christopher Simpson, Science of Coersion: Communication Research and Psychological Warfare, 1945-1960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Robin Ron, The Making the Cold War enemy: culture and politics in the military-intellectual complex,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1. 노암 촘스키, 『냉전과 대학』, 당대, 2001. 크리스토퍼 심슨 편, 한영옥 옮김. 『대학과 제국 : 학문과 돈, 권력의 은밀한 거래』, 당대, 2004. 참조
3) 이라크를 ‘불량국가'로 보고 과격한 행동주의자들에게 ‘대량 살상무기'가 들어갈 것을 우려한다거나, 이러한 ‘잠재적 위협', 돈세탁과 마약거래 같은 범죄에 대처할 ‘세계적 규모의 국가 간 협조'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논의도 ‘감시' 문제를 세계적 치안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4) 현재 감옥에 수감된 인구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미국이며, 그 수감비율은 10만명에 737명에 달한다.
5) 지그문트 바우만, 김동택 옮김, 『지구화, 야누스의 두 얼굴』, 한길사, 2003. 203-229쪽.
6) 지젝,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새물결, 2008, 3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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