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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51호 현장] "침묵의 일상, 아 기지개를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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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51호 / 2008년 5월 16일

 

 

"침묵의 일상, 아 기지개를 핀다” 



이 영 은(대구여성영상상영공동체 핀다)
 
벌써 3회를 맞는 우리의 정기 상영회가 오늘, 2008년 2월 23일에 또 다시 열린다. 그 전에 이루어 놓은 것들에 묻혀서 쉽게 가는 듯한 느낌이기에 새삼 ‘핀다'의 지난 과정들을 돌아보게 된다. 여섯 달, 정말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에 대한 추억은 풍성하다.
핀다는 2007년 9월에 처음 만났다. 그리고, 11월 18일에 첫 상영회를 열었다. 2월 28일엔 네 번째 상영회를 끝으로 첫 번째 정기 상영회를 마무리 했다.



핀다[Find_a]는 ‘Feminist Identity N Delight'와 ‘我( A )'를 조합한 약어다. 우리는 그 이름에 “여성영화를 통해 여성인 ‘나(我)'를 찾는다(find)”는 의미와 “여성영화를 통해, 사소하게 여겨졌던 여성들의 이야기 하나 하나 ( A story)를 새로운 각도( A ngle)로 해석하고 소통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정기상영회의 큰 제목인 “침묵의 일상, 아 기지개를 핀다” 역시 여성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표현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바람을 담고 있다. 
그런데, 여성의 언어는 무엇일까? 이 세상, 절반의 여성들이 공유하는 언어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에서조차 벗어나, 오직 나(我)의 언어로 말하는 것, 그것이 핀다가 찾고 싶은 여성의 언어다. 당사자 여성이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같은 입장의 또 다른 여성이 본다는 핀다 정기 상영회의 골격은 그렇게 만들어 졌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어울려 사는 삶의 도구로 자리 잡길 바라는 마음 또한 우리의 시작에는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핀다의 정기 상영회는 ‘공동체 상영회'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당사자 여성이 만든 영화를 당사자들의 정체성을 지닌 공간에서 당사자들을 중심으로 본다.”라는 것이 ‘공동체 상영회'의 특징이다. 1회 ‘레즈비언 비디오 액티비즘'의 예를 들자면 레즈비언 여성이 만든 영화를 상영했고, 관객들 중 다수가 레즈비언 여성이었다. 2회는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상영하지 않고, 탈성매매 생존자, 피해자 여성들이 만든 영화를 또 다른 생존자, 피해자 여성들이 그들의 자활 공간에서 보는 형태였다. 1회 레즈비언, 2회의 탈성매매 생존자 혹은 피해자 여성, 3회의 대구 지역 여성미디어활동가, 4회 이주여성. 이렇게 영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여성들은 다양하고, 무엇보다 하나의 틀로 이해할 수 없는 유일함을 지니고 있다.



지난 6개월 동안의 기억을 더듬다 이내 3회 상영회의 부산한 분위기로 돌아온다. 마땅한 상영 장소를 찾지 못해 골머리를 앓았던 고생스런 기억이 스쳐 지났지만, 100석 규모의 아담하고 아늑한 상영장 분위기는 전화위복이라는 느낌이 든다. 
상영회를 준비하기 위해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든다. 부산스럽게 안내 표지를 붙이고, 상영장 안을 정리한다. 상영 30분 전이다. 이제 관객들도 이곳을 찾기 시작한다. 

1회 영화제에서 처음 만나 뒤풀이를 함께 했던 이들이 오랜만에 만나 인사를 나눈다. 감독의 친구들이 영화제 구경을 오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이 더 많은, 그래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 핀다 정기상영회의 분위기다. 
드디어 첫 번째 섹션, “소통과 영상”이 시작된다. 대구 여성의 전화의 [여성영상치유방], 그리고 핀다의 [침묵의 일상. 아, 기지개를 핀다] 두 작품이 상영되었다. [여성영상치유방]은 영상을 통해 자기치유를 했던 프로그램에 대한 기록이다. [침묵의 일상. 아, 기지개를 핀다]는 핀다의 정기상영회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메이킹 필름이다. 상영 뒤 이어지는 감독과의 대화, 질문이 좀 없다. 어째 썰렁하다. 첫 섹션이라 그렇고, 완성도보다는 관객들과의 만남을 재촉하느라 부족한 점투성이인 작품이라 그런가 보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미 소통의 자리를 찾아 핀다의 상영회에 온 사람들이다. 질문은 없어도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참 열심히 쳐다봐 준다. 영상의 부족함을 메우는 공감은 어색함 속에서도 이미 시작된 듯하다. 
두 번째 섹션, “여성관객, 감독이 되다”에서 열기는 점점 높아진다. 이번 섹션에서는 핀다의 1회 상영회에서 관객이었던 다섯 사람이 영상제작교육을 수료하고, 감독으로 상영회에 왔다. 그러니까, 두 번째 섹션의 작품들은 어느 곳에서도 상영하지 않았고 처음으로 발표되는 작품들이다. 수민과 은지곰의 작품 [아, 어쩌란 말이냐]는 표준형의 가슴을 고집하는 사회의 시선으로 인해 아파하는 온갖 가슴들의 이야기다. 휘의 [여자, 애인]은 여자든 남자든 사랑하는 사람이면 애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성소수자 휘의 일상을 담고 있다. 잇을의 [무색인간]은 성욕이 인간의 당연한 본능이라는 유성애 중심적인 사회를 무성애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진기의 [상경 - 두 여자의 한 여자]는 레즈비언 활동가로 자신을 정체화 했으면서도 가족에게만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한 한 청소년 성소수자의 이야기다. 
이제 감독과의 대화에서 사람들은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평론가의 눈으로, 자신과 같은 입장의 감독에게 동화된 한 사람으로, 때로는 영화의 시각에 반발하면서 관객은 경계를 넘어선다. 
그래서일까, 핀다 정기 상영회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감독과의 대화”라는 말을 핀다 구성원들이 자주 한다는 것이다. 감독과 관객의 경계를 허무는 온갖 풍경들이 감독과의 대화 시간 내내 펼쳐진다. 날카로운 질문과 격려, 지지의 질문이 번갈아가며 쏟아진다. 여성주의 영상에 대한 비판과 지지, 공감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핀다들은 느낀다. 영상이라는 것이 결코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라는 걸, 그것이 세상에 나와 또 다른 이와 공감하는 그 순간에 진짜로 완성되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세 번째 섹션, “나와 영상”이다. 영상 활동을 하는 여러 여성감독들이 작품을 들고 상영회에 왔다. 남경순의 [스메이의 눈물]은 과로사로 죽은 남편의 유골을 찾으러 한국에 온 캄보디아 여인 스메이의 이야기다. 강영옥의 [빨간 불 켜진 재래시장]은 재래시장이 현재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는지를 담았다. 남효주의 [사람들은 내 바지를 벗기려 한다]는 여성용과 남성용이 확연히 구분된 화장실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정김혜선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서른 살이 된 감독이 10년 전에 서른 살이었던 한 여자를 기억하는 방식으로서의 영화다. 서로 다른 색깔의 여성 감독, 여성주의 영상의 스펙트럼 내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여러 감독의 작품들이다. 
뒤풀이, 우리 정기 상영회에서 역시 아주 중요한 것이다. 감독과의 대화는 시작일 뿐, 진짜 소통은 바로 마주 앉아 서로의 가슴 속에 벅차게 담겨있던 말들을 쏟아내면서 계속된다.
상영회에 함께 했던 관객들 3분의 2 이상이 뒤풀이 자리에 함께 갔다. 이 날 함께 있었던 어느 관객이 “이렇게 자기 이야기를 꺼내면서 자연스럽게 토론이 되는 영화제는 처음이다.”라고 말해 줬다. 
핀다 상영회의 관객 수는 결코 많지 않다. 그러나, 상영회 하루 전, 이틀 전에 소식을 알게 되고도 짬을 내어 찾아오는 관객들, “대구에도 이런 움직임이 있다니”하며 수첩에 꼭꼭 상영회 날짜를 챙겼다가 찾아오는 관객들이 있어 핀다 정기 상영회는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소통의 통로가 되고 싶었다.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그런 통로 말이다. 하지만, 상영회를 준비하면서 부족함을 너무 많이 느꼈다. 그런데, 상영회 당일 날 결국 우리의 꿈은 이루어졌다. 관객의, 관객에 의한, 관객을 위한 상영회로서 말이다. 
1회에서 친구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는 것에 용기를 얻었던 한 친구는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사람들 앞에 서게 되었다. 2회에서 상영회 기획을 함께 했던 한 여성은 상영회에 자신의 일상을 담은 작품을 냈고, 앞으로도 영상을 계속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다. 상영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족했던 점, 아쉬웠던 점은 정말로 많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 삶의 과정이 그러하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부분일 뿐이고,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일 테다. 불완전하지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감각들, 바로 이것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있는 핀다의 정기 상영회, ‘공동체 상영회'의 모습이다. 
2회와 4회의 관객들 역시 언젠가는 감독으로 세상에 나서게 될 지도 모른다. 핀다는 그 과정을 곧 함께 하리라고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핀다 구성원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본다. 처음엔 넷, 그리고 곧 다섯이 되고, 1회가 끝난 후엔 여섯이 되었던 우리는 회의를 할 때마다 힘들어했고, 고민도 많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느끼는 가치관이 달랐고, 그것을 주장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기 상영회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만남 또한 서로 다른 존재에 대해 인정하고 알아가는 과정이었던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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