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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57호 길라잡이] ‘아직’ 1년, 그리고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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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8. 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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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57호 / 2008년 12월 8일

 

 

‘아직’ 1년, 그리고 4년
 
TV에서 너무나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도 못하고 배꼽을 잡고 웃으며 TV를 본다. 눈물까지 흘리며 정신없이 웃다가 문득 시계를 보고는 깜짝 놀라게 된다. 벌써 30분 ? 늦었다. 회의 시간에 늦었다는 생각에 서둘러 집을 나선다. 택시를 타고 온 덕분인지 늦지는 않았다. 그리고 회의. 누군가 무엇인가를 사람들에게 보고하고 있다. 반대편에 앉은 누군가가 뭐라고 얘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너무 지루하고 나도 모르게 하품이 난다. 목이 뻐근한 척 목을 돌리면서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본다. 아직 30분 ?


우리가 쉽게 경험하는 시간의 상대성이다. 우리는 보통 즐거운 일을 하고 있을 때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을 느끼게 되고 반대로 너무나 괴롭고 지루한 시간을 보낼 때 시간이 느리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난 이명박 정권의 1년을 돌아보며 ‘벌써'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아직' 을 붙이게 된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국회의 법들이 ‘아직' 을 붙이게 만들었고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과 방송을 무력화하려는 정부의 모습에 ‘아직' 이 붙었다. 미디어 교육 강사들의 신원을 조사하고 방송을 대기업의 손에 넘기려고 하고 공공성조차 경쟁시키려는 행태에 ‘아직' 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 ‘아직' 이 지난 1년을 가장 정확하게 평가하는 게 아닐까?


‘아직'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이루어왔던 것들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한 때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촛불집회. 촛불 집회가 벌어졌던 텅 빈 광화문 거리를 보면서 그 거대한 힘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슬픈 생각에도 빠진다. 바늘구멍보다 통과하기 어렵다는 취업의 문을 뚫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답답한 것은 아직 4년 이 더 남았다는 것이다. 나라 전체에 유행하고 있다는 연말 무기력 증후군에 걸려버릴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저런 생각으로 무기력의 바다에 빠진 나사를 찾고 있던 필자에게 누군가 이런 말을 던져 주었다. “길게 보자.” 물론 모세가 바다를 가르듯 고민들을 깨끗이 씻어주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짙은 안개 속에서 길의 첫머리를 찾을 수 있게 해주는 말이었다. 내년에 혹은 앞으로의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거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남은 것이 사실이다. 긴 호흡을 가지고 내가 갈 길을 따라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차근차근 말이다.


이번 호의 원고들에도 문제를 길게 보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가는 모습들이 담겨져 있다. 근래 RTV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 있는『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의 취지를 망각한 방통위의 PP공모제』 원고에서는 이 문제를 단지 하나의 채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퍼블릭 액세스 채널과 시민의 권리라는 넓은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왜 이 문제에 대해 싸워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 미디어로 일궈내는 변화를 꿈꾸며 - <노가다 vs 노동자>의 이경희 활동가 인터뷰』 에서는 미디어를 통해 지역 노동자의 목소리를 담고 그것을 알려내고 결국 큰 변화를 꿈꾸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또한 『이 동네에는 라디오가 3개 있다』 에서는 비록 지금은 작지만 동시에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지역 라디오 방송국의 행사를 돌아본다. 그리고 조급해하지 않고, 긴 호흡으로 소통하며 나아간다면, 라디오의 미소는 계속 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조금은 다른 얘기지만 『매개·물신·소통의 문화사 - 유선영 외 지음,「한국의 미디어 사회문화사」(2007)  원고나 켄 로치 감독의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원고들에서처럼 책, 영화들로 자신의 소양을 쌓아가는 것도 우리들의 싸움을, 운동을, 활동을, 그리고 삶을 길게 보고 나아가는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소양 쌓기라는 거창한 명분이 아니라고 해도 그것들 안에서 찾는 조금의 여유들이 우리가 어려움을 헤쳐 나아갈 때 조금씩 힘을 더해 줄 테니 말이다.


이제 정말 2008년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지난 시간을 반성하고 새로운 한 해의 계획을 세우는 시간이 된 것이다. 혹자는 멋들어진 말 한마디로 한해의 시작을 준비하기도 한다. 우리도 그 혹자들처럼 “길게 보자.”를 내년의 모토로 정해보는 것은 어떨까? 멋지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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