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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58호 특집]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여전히 공동체라디오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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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8. 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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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58호 / 2008년 12월 30일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여전히 공동체라디오를 꿈꾸다 




차해영(공동체라디오 활동가)
 
1. 꿈꾸기 시작하다.


2007년 3월,「언론운동과 대안미디어」강의를 통해 공동체 라디오를 알게 되었다. 운동도, 대안도 알지 못하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처음 이 수업은 나에게 굉장히 어려웠다. 공동체 라디오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도, 앞에 있는 ‘공동체' 보다는 뒤에 있는 ‘라디오' 때문이었다. (공동체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이 때 한창 라디오와 소리에 빠져 있었기에 ‘라디오', ‘사운드'라는 말이 들어가기만 하면 뭐든지 좋았다. 하지만 대구성서공동체라디오에 관련된 비디오를 보고, 단순히 ‘라디오'보다는 라디오가 담는 이야기, 라디오를 하는 사람들이 알고 싶었다. 그리고 나도 말 하고 싶었다.




그 해 7월, [2007년 대학생 대안 미디어캠프] 기획단으로 활동하는 좋은 기회를 얻어, 비디오로만 보았던 대구성서공동체라디오 방송국에 내려가게 되었다. 보고, 듣는 것보다 한번 가보는 것이 났다는 말을 실감했던 날들이었다. 2박3일이라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 사람들과 만나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나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겐 그 시간들은 감동이었다. 방송을 하는 것이 즐겁다는 이주노동자, 방송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는 장애인 자녀를 둔 어머니, 방송이 지역을 변하게 만들었다는 지역주민들. 그들을 통해 ‘나만의 공동체 라디오'를 꿈꾸기 시작했다.




2. 꿈에서 깨어나다.


그 해 7월은 나에게 감동적이지 만은 않았다. 아니, 감동의 뜻이 국어사전에서 정의내린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이라면 7월은 나에게 대감동의 달이였다. 한 가지 사건으로 인해 억울하고, 서럽고, 비참했던, 나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던 달이었다.
공동체 라디오를 알게 되면서 나도 말 하고 싶었다. [레주파(lezpa)-레즈비언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팀]를 알게 되고, 그들이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서 나도 말 할 수 있는 곳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수업을 들은 지 두 달도 채 안됐을 때, 마침 3기 모집을 하던 [레주파(lezpa)]에 운이 좋게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7월,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소통의 즐거움을 알며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 사건의 요지는 이렇다.

[레주파(lezpa)]는 마포공동체라디오에서 <엘(L·레즈비언) 양장점>을 제작하고 있다. 그러던 중 당시 방송위원회(現,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마포공동체라디오에 <엘 양장점>의 방송 내용 중 ‘보지' 라는 단어가 반복 사용되어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 26조(품위유지)를 위반하였다는 통보를 보내온 것이다. 마포공동체라디오방송국 측은 방송위의 제재조치를 이행하고 재발방지를 위한다는 이유로 프로그램에 대한 사전심의를 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를 <엘 양장점> 제작팀에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엘 양장점> 제작팀은 사전심의라는 검열 장치로 자유로운 방송 제작을 규제 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대해 방송국에 문제제기를 하였다. (공동체라디오에서 사전심의라니... -_-;;)
심의에 걸린 ‘보지'라는 단어는 레즈비언 미술가들을 소개하는 코너, 묘안거울에서 미국의 ‘티 코린(Tee Corinne)'이라는 레즈비언 미술가를 소개하다가 나왔다. 티 코린은, 레즈비언이 사회적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껴, 여성들 간의 사랑을 과감하게 표현한 여성미술가이다. 티 코린은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긍정하고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특히 여성들이 자신의 성적인 부분인 질과 성기에 직면하는 교육이 절실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티 코린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몸 교육용 ‘The Cunt Coloring Book'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코너를 맡고 있는 활동가는 작가의 의도를 설명하면서, 최대한 의미를 살리기 위해 이 책을 ‘보지 색칠공부'라고 번역해서 얘기하였다. 그런데 방송이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위원회에서 ‘보지'라는 말에 경고를 보내온 것이다. 방송위원회가 말한 경고 사유는 ‘보지'라는 말이 방송에 부적합한 언어라는 것이었다.
‘보지'는 여자의 음문의 비속어라고 사전에 등록되어 있다. 천박하고 속된말도 아닌데, 비속어라고 정의내리고 순우리말로서 존재하지만 일상생활 용어로 익숙하게 사용되지는 않고 있다. (어릴 땐 많이 썼는데 점점 커가면서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되어버린 자지, 잠지, 보지 등의 단어들, 대부분 이 단어들을 유아적 표현이라고 하고 있다.) 기존 주류 방송에서도 ‘보지'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에 대중이 다소 충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이유로 심의 규정 위반으로 지적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러나 L 양장점에서 사용한 ‘보지'는 단어 기준으로 사용 여부를 따지기 보다는 왜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프로그램 전체의 맥락을 따져야 했다. (여성이 자신의 성기를 ‘제대로'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인가?)


이번 사건을 거치면서 공동체라디오인 마포FM방송국은 왜 방송위원회의 경고조치를 그대로 인정하고, 우리와 함께 대항하지 않았던 것일까? 공동체라디오도 방송법 내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왜 이런 불합리한 심의 규정 개정을 위해 맞설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란 생각들로 슬펐다. 정식방송이 아니라 시범방송을 하고 있는 마포공동체라디오 방송국에서 시범방송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사전 심의'라는 조치를 했다는 것은 <마포공동체라디오> 운영진이나 실무진들이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잘 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우리는 앞으로 공동체라디오가 진짜 공동체라디오가 되기 위해서는 방송국을 운영하는 스탭들에게 소수자 감수성 향상을 위한 정기적인 인권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방송위원회에서 앞뒤 맥락을 생각하지 않고 ‘보지'라는 단어만을 보고 <엘 양장점>에 경고를 줬다는 사실이다. 다른 방송 프로그램 보다 레즈비언 방송 프로그램인 <엘 양장점>을 더 주시하여 모니터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표적 심의!! 지금도 심의원들은 소수자들의 프로그램을 더욱 주시하고 검열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난 이 사건으로 인해, 공동체라디오에 대해 더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3. 현실과 마주하다.


공동체 라디오를 공부하는 학생, 공동체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자원 활동가.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번 겪은 일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고, 내가 말할 공간에 대해 모두 다 알지 못한다면 말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는 상근 활동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휴학계를 냈다. 처음에는 <성서공동체라디오>에 내려가려고 했지만, 선생님과의 상담 후 서울에서 공동체라디오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기 위해 <관악공동체라디오>에서 활동하기로 하였다.
1년 동안 <관악공동체라디오>에서 활동하면서 나는 현실과 마주하기에 바빴다. 처음엔 내 이상 안에 꿈꾸던 ‘공동체 라디오'는 희미해져가고, 현실과 이상의 차이는 너무도 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힘들었다. 방송국 안팎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에게 작고 크게 상처를 주었다.


방송국 안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자원 활동가들의 대부분은 예전에 나처럼, 앞에 있는 ‘공동체' 보다는 뒤에 있는 ‘라디오'에 더 관심을 두기에 책임감 없이 방송을 하고 있었고, 상근자들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공동체라디오를 알리고, 이 공간이 왜 있어야 하는지 이야기 하고 싶었다. 그런데 몇 달이 흐르고, 왜 밖으로 나갈 수 없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가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나갈 수가 없는 현실. 방송물을 제작하고 편집하고 송출하는데 하루가 가고, 다른 것들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일한지 3개월이 조금 넘어섰을 때, 계속해서 고민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공동체 라디오란 무엇인지. 무엇이 공동체 라디오라는 건지... 1년 동안 경력을 쌓으려고 공동체라디오방송국에서 일하려던 게 아니라, 1년은 있어야지 이곳에 대해 알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한해가 지나면 더 나아진 방송국을 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있었던 건데 갑자기 내가 여기에 왜 있는 것인가 라는 생각들이 밀려왔다. 내가 생각하는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에 대한 마인드가 없고 ‘라디오 방송국'에 대한 마인드만 있는 상근자들의 행동들로 받은 스트레스와 상처(하나하나 모두 다 끄집어내면 너무 슬플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하자...) 그리고 나와는 다른 ‘공동체 라디오'를 지향하는 방송국의 모습들로 인해 누군가에게, 무언인가에 느끼는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망했다. 그 때는 어떻게 하면 내가 그들을 변하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들을 했었다. 내가 생각한 것, 내가 꿈꾸는 공동체 라디오만이 옳다고 믿었다.


반년정도 일했을 때, 6개월만 일해도 될 것을 왜 ·1년이나 일한다고 했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관두기엔, 여기서 포기하기엔 내가 무언가에 지는 듯한 느낌에 그러지도 못하고 다시 한 번 열심히 하자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마음을 다잡았을 무렵, 방송국에서 활동하던 상근자들이 두 달 간격으로 그만두기 시작했다. 계약기간이 끝나 그만 두었지만, 상근자들은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에 남지 않고, ‘기존 라디오 방송국'으로 갔다. 거기서 난 또 한 번 생각했다. 인턴활동가들도 상근활동가들도 활동기간 뒤에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에 남지 않았고, 나에게 여기 말고 더 좋은 방송국으로 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왜 이 사람들은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에서 활동했음에 불구하고 이곳의 소중함을 모르고 떠난 것일까. 물론 이 사람들이 처음부터 ‘기존 방송국'으로 가기위한 발판(?)으로 공동체 라디오를 선택한 것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을 왜 변하게 하지 못한 것일까란 생각을 했다. 여기서 일하는 게 너무 즐겁고 재미있었다면 다른 곳 보다는 이곳을 택하진 않았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또 슬퍼졌다. (물론 돈 문제도 개입이 되어있긴 했겠지만) 더 슬픈 사실은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었단 것이다.
돈 이야기가 잠깐 나와서 하는 말인데, 사실 난 급여를 받고 활동할 생각이 없었다. 그냥 1년 동안 여기서 일하고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었다. (처음엔 함께 일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좋았었으니까.)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나보니, 인턴급여 한 달, 20만원으로의 생활은 선택이 필요했다. 하나, 20만원으로 월세를 낸다. 두울, 20만원으로 공과금을 낸다. 세엣, 20만원으로 차비와 식비를 한다. 이 세 가지 선택. 물론 부모님께 1년 동안 공부하는 마음으로 일할 것이니 지원해달라는 말을 했지만, 조금씩 부담스러워 하는 부모님을 보며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그 전까진 생활비는 내가 벌고, 부모님은 소정의 용돈을 주셨다.) 주위에서 20만원 받고 무슨 일을 그리 많이 하냐는 말을 듣곤 하지만, 방송국에서 일을 많이 하고, 사업을 많이 벌이는 건 그만큼 돈을 벌기 위해서다. (나를 위한 돈이 아니라, 방송국을 위한 돈.) 지금의 방송국을 운영하기에 아니 유지하기엔 돈이 많이 필요하다. 점점 일을 하면 할수록 돈에 대한 절실함을 느꼈다. 그런데 정부에서 내년 공동체 라디오에 대한 예산이 전액 삭감이 확정되었다니, 내년을 며칠 앞둔 지금 머리가 너무 아프다.




4.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바라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주파수가 없다”는 말만 되뇌며 기존 공동체라디오 시범사업자들은 출력증강을 시켜주지 않고, 공동체라디오 신규 사업 준비자들에게는 1년 가까이 사업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신규 영어FM방송은 잇따라 허가를 내주는 ‘모순정책'을 펴고 있다. 그것도 공동체라디오(극소출력(1W-반경1km))에 비해 1000배인 대출력 (1KW)으로 영어FM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13일 국회에서 기존 공동체라디오 시범사업자들에 대한 제작 지원 예산이 전액 삭감되었다. 한 달에 500만원, 일 년에 6,000만원 받았던 지원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대신 정식사업자로 전환하고 광고를 허용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반경1km만 들리는 라디오에 누가 광고를 한다고 할까? 그것보다 왜 광고허용을 해결책인 것 마냥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까? 이로써 시범사업자와 신규사업준비자들 사이의 간극이 더 커진다는 것을 알고 이러는 것일까?
시범사업자들은 4년 동안 신규사업준비자들이 모르는 고통과 아픔을 느꼈다고 한다. 신규사업준비자들도 시범사업자들이 모르는 고통과 아픔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서로의 고통과 아픔들을 밖으로 펼치지 않고 안으로만 넣는 것 같다. 서로의 고통과 아픔을 보듬어주지 않고, 아픔만을 호소하는 느낌. 그런 느낌을 받을 때 마다 참 슬프다.
1년 사이에 많은 일을 했고, 많은 것이 변했지만, 뭔가 1년 전에서 멈춘 거 같은 느낌이 든다. 1W출력은 변함없고, 정부에선 공동체라디오의 중요성을 모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공동체라디오를 모른다.




5. 여전히 공동체 라디오를 꿈꾸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 라디오가 왜 필요한 지 묻는다. 새로운 매체가 많이 생겨난 지금, 왜 사람들이 잘 듣지도 않는 라디오를 택해 이야기 하려는 것인지 말이다. 난 많은 사람들이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주파수가 있는 라디오에서 할 수 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주파수는 시민의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공동체 라디오가 바로 그 것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공동체라디오가 무엇일까를 생각했고, 내가 생각한 것, 내가 꿈꾸는 공동체 라디오만이 옳다고 믿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이야기 하면 틀렸다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각자의 공동체 라디오는 다 다른 것 같다. 옳은 공동체라디오란 그냥 자신들이 생각하는 공동체 라디오일 뿐. 이제는 이런 공동체 라디오도 있고, 저런 공동체 라디오도 있고 서로서로 잘 도와주며 공동체 라디오를 만들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공동체 라디오를 안지 약 2년, 내 주위엔 많은 사람들이 생겼고 주변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나와 늘 함께해주는 [레주파(lezpa)] 사람들과 공동체 라디오가 뭐 길래 내가 이러고 있을까? 에이 때려 쳐야지라는 마음이었을 때 만난 <씨알2.0>사람들. 그리고 1년 동안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 <관악공동체라디오>사람들. 만약 이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예전에 혼자 멈춰 버렸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것도 공동체 라디오에 안 좋은 추억만을 가득 가지고.
지금 현실이 너무 슬플지도 모르나 나는 이런 사람들이 공동체 라디오에 관심을 두고 계속 함께 하는 한 변할 것이라 믿는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떠나지 않는다면, ‘나만의 공동체 라디오'는 계속 꿈꿀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 꿈을 이룰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상 속에 있었던 나는 현실을 알아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현실을 받아드리고 타협할 생각은 없다. 이상과 현실 그 사이에 있는 지금, 여전히 나는 공동체 라디오를 꿈꾼다.□




* 마포FM은 최근 <L양장점>을 비롯하여 방송프로그램에 대한 사전심의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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