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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58호 특집] 대중을 운동과 멀어지게 하는 것들, 내부에서 싸워야 할 것들, 익히고 배워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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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8. 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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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58호 / 2008년 12월 30일




대중을 운동과 멀어지게 하는 것들, 내부에서 싸워야 할 것들,
익히고 배워야 할 것들 




김동찬(언론개혁시민연대 활동가)
 
1917년 4월 레닌은 오랜 망명 생활을 끝내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다. 레닌은 돌아오는 봉인열차에서 작성한 그 유명한 ‘4월 태제'를 통해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고, 그로부터 일곱 달 뒤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러시아 혁명(10월 혁명)이 일어나기 불과 일곱 달 전에야 러시아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레닌은 대부분의 시간을 망명생활로 보냈고, 혁명의 순간이 다다랐을 때야 비로소 러시아로 돌아왔다. 레닌뿐만 아니라 혁명의 지도자 대다수가 짜르 정권의 탄압을 피해 해외에 머물렀다.


우리가 잘 기억하진 못하지만 이들 혁명가들의 빛나는 영광 이면에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자기 삶을 반납하고 분투한 다양한 인민들의 고난이 가려져있다. 누군가는 해외에 머물고 있는 혁명지도자에게 생활자금을 전달하고 선전물에 실을 글을 받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그렇게 들여온 글을 인쇄하고 그 광활한 러시아 전역으로 운반했을 것이다. 또 이름 모를 어떤 이는 글을 모르는 대중을 만나 내용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


어떤 이가 1세기 전 러시아 전역을 누비고 다녔을 이름 모를 혁명가들을 불러내 밑바닥 실천의 가치를 되살렸을 때 마침 막 활동가 생활을 시작한 나는 느끼는 바가 컸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눈에 띄지 않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중앙 언론에 이름 내비치고 제도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행동은 넘쳐난다.


지난 수년간의 경험으로 볼 때, 오늘날 회자되고 있는 이른바 ‘시민운동의 위기', 나아가 ‘운동의 위기'는 운동의 가치를 훼손하려는 보수언론의 왜곡, 지배계급의 선전 선동만은 아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일은 회피하면서도 권위와 영향력은 행사하려는 운동풍토가 실제 존재하고 세상은 이를 두고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고 부른다. 지도자가 되어 이름을 알리고 출세하려는 사람은 많지만 밑바닥 일을 하고 일상적인 실천을 하는 실제 ‘활동가'가 되려는 경우는 드물다.


언젠가 한 영화배우가 영화제 수상소감에서 “사람들에게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나를 소개합니다. 60여명의 스태프들이 차려놓은 밥상에서 나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나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죄송합니다”라고 말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자신의 화려함은 밑바닥의 노력이 겉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운동판에서 이런 겸손함을 유지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오히려 자기 운동의 가치와 중요성을 선전하고 다니는 경우가 훨씬 많다. 우리가 하는 일은 사회 전체를 위한 훌륭한 일이고, 우리가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그 일을 자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열악한 환경의 시민단체를 사회와 대중이 나서서 도와줘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런가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우리가 하는 일이 오늘 당장의 생계를 위해 고된 노동을 감당하는 대다수 인민의 노동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


이런 인식이 밑바탕에 깔리니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지원금을 받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러면서 새로 생겨난 뉴라이트 단체가 이런 지원금을 받아가는 것은 아주 나쁜 일이라고 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 (얼마 전 공동후원 행사를 연 보수단체 역시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NGO활동을 펼쳐나가는 건강한 시민사회단체들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이러한 시민사회단체들은 스스로 후원행사조차 개최하기 어려워 공동후원행사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세상 누구도 시민을 대표하고 대신할 자격을 진보개혁단체, 진보시민단체에게 준 적이 없는데 그것이 본래 자신의 몫인 양 행세한다.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예수도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통해 굶주린 무리의 배를 채워준 적은 있어도 따르는 무리에게 물질적 지원을 요청한 적은 없다고 알고 있다.


이렇게 일종의 특권의식을 가진 이들이 운동 내부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사업을 기획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실무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여긴다. 전화 돌리고, 행사를 알리는 일은 실무자가 할 일이지 자신의 역할이 아니다. 우스운 얘기지만 어떤 이는 자신의 글이나 단체의 입장이 얼마나 많은 곳에 배포되는지는 무척이나 신경 쓰며 실무자를 들볶지만, 실제 보도자료나 성명서를 배포하는 방법조차 알지 못한다. 직접 해본 적이 없거나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 전에 해본 일이기 때문이다.


활동경험도 얼마 되지 않는 활동가가 일부분을 과장하여 건방진 얘기를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지난 1년을 돌아봤을 때 가장 많이 고민한 문제가 이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이런 풋내기 활동가의 눈에도 보이는 게 일반 대중들에게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지난 촛불집회에서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촛불에 열광했지만, 정작 촛불시민들은 운동단체에 별로 호응하지 않았다. 신뢰의 상실은 어제 오늘 짧은 순간의 일이 아니라 오랜 기간 꾸준히 누적된 것이다. 촛불집회 때도 그랬지만 소위 운동권은 대중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으려 하기보다 사람이 모이면 찾아가 대중을 지도하고 가르치는데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또한 아래로부터 공감을 얻어내려 하기보다 위로부터 대중을 동원하려는 모습이 더 많았다.


정부지원금을 받는 등의 일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단지 지원금과 후원금을 마치 자기 몫인 양 대하는 일부의 태도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활동하는 운동가들이 훨씬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일부의 권위주의와 엘리트주의는 분명 운동에 해를 끼치고 있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자기반성을 회피하기 위해 위기의 원인을 자꾸 밖에서 찾는데, 그들이 요즘 입에 붙이고 사는 말이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 ‘이명박 때문에 못 살겠다'는 말이다.


요새 젊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러나 주변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많은 이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누군가 직업적으로 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경우 선택하기 더 어렵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운동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누군가 시켜서, 아니면 누구를 ‘대신'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렇게 활동가의 길을 택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자기가 좋아서 하는 운동을 대중 대다수의 삶과 분리하여 특권을 부여하고 과도한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젊은 활동가들을 운동과 멀어지게 하는 장본인이다. 운동을 통해 지양하려는 삶의 방식을 운동 내부에서 관철하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과 함께라면 나 역시 운동을 길게 할 생각이 없다.


지난 1년간 활동하며 스스로 부족함을 느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시민단체 회원 활동도 하고 언론 관련 전공을 하며 조금은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실상 현장에서 필요한 능력은 거의 가진 게 없었다. 내년에는 큰 욕심 부리지 말고, 실제 운동에 쓸모 있는 것부터 익혀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지금 우리 운동에는 그런 실천적 노력과 능력이 아직도 많이 부족하고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년에는 무엇보다 운동내부에서 싸워야 할 것과 제대로 싸워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침묵만한 동조가 없다는 말을 가슴 속에 새긴다. 누군지 알 순 없지만 다른 어딘가에서 오늘의 자신과 싸워나갈 또 다른 나에게 응원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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