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ACT! 58호 특집] 소통과 연대를 위한 경험쌓기...영화보기

이전호(78호 이전) 아카이브/특집

by acteditor 2016. 8. 9. 18:00

본문

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58호 / 2008년 12월 30일

 

 

소통과 연대를 위한 경험쌓기...영화보기 




양미(빨간거북/서울여성노동자회)
 
1. 소통과 연대에 대한 답답한 기억들


지금까지 나에게 ‘여성_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늘 벽을 마주보고 서 있는 것과 같은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현실에서 여성_노동자는 차별과 억압, 배제를 숙명으로 감내할 것을 요구받거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성'을 중심으로 내세울 경우 ‘노동자'가 없고, ‘노동자'를 중심으로 내세울 때는 ‘여성'이 없는 이상한 경험이었다. 또한 그것은 타인과의 소통과 연대에서 항상 나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정체성 중 이해 받을 수 있는 것만을 드러내도록 요구받는 것이었고, 이해받지 못하는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왕왕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의 어떤 일면을 버리는 경험을 해 왔다. 한편으로 나는 여성_노동자들이 늘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가해자'의 역할만을 요구하는 것에도 동의하기 힘들었다. 현실에서 때때로 나보다 못한 상황이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나는 ‘가해자'일 수 있음을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대의명분, 생존경쟁, 자존심, 약자에 대한 경멸, 자기연민 등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누군가에게 ‘잔인해 질 것'을 요구하는 모든 것들에 공통적으로 깔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일면 중 어느 한 가지를 포기하지 않고, 타인에게 잔인해지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타인에게 공감하며, 공존할 수 있는 법을 배우려면 어떻게 소통하고 연대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의 삶의 총체성에 기반해서 공통의 경험을 만들어내고 공통의 실천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공통의 실천이 있으려면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을 포괄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경험을 자각하고 타인의 삶에서도 자신의 삶과의 공통점을 찾아야 할텐데... 가르치거나 훈계하지 않고,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무엇보다 포기하지 않고 지금과 다른 삶을 꿈꾸게 할 순 없는 것일까?




2. 삶의 총체성을 담아내는 문제해결...그것이 절실하다.


얼마 전 나는 00여노의 한부모여성노동자 모임에서 ‘세상읽기'라는 교육을 진행한 바 있다. 그때 나는 30대/한부모여성가장/비정규직여성노동자/학부모/소비자/시민인 우리시대의 여성노동자 ‘영숙씨의 하루'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노동자의 구체적인 삶과 행복에 대해 이야기 했었다.
그런데 나 자신도 놀라웠던 것은 ‘영숙씨의 하루'를 읽은 후 그녀들의 반응이었다. 이른바 ‘꽂히는' 단어나 내용을 말해 보라는 나의 요청에 제일 처음 나온 단어는 ‘두려움'이었다. 무엇이 두려운지를 질문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쏟아져 나온 내용들은 ‘존재하는 것이 두려운' 이유가 되는 것들이었다.
그 두려움의 이유에는 이른바 전통적인 노동운동이 말하는 영역, 즉 사업장 내에서 노동자로 느끼는 불안정한 고용과 저임금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그로 인한 일상적인 모욕과 차별, 여성노동자로 느끼는 성차별적 요소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생활인으로서 느끼는 두려움-먹거리의 문제, 학비와 각종 공공요금 및 세금의 문제, 의료 문제, 주거 문제 등-이나 인간으로서 느끼는 욕구의 문제-여가 및 문화 시간에 대한 욕구, 인도주의적 관점과 현실적 상황의 괴리 등-까지 모두 포괄되어 있었다. 거기에 여성 한부모로 느끼는 일상적인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따른 차별의 문제까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의 문제, 이 문제들을 생애주기와 함께 표로 거칠게 정리해 보자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삶을 일터(사업장)/가정/지역 이렇게 조각내어 구획 짓고 그 구획이 마치 서로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조각난 구획들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획을 제외하고는 표류하며 떠다닌다. 활동가는 일터와 지역에 없고, 아버지는 늘 집(지역)에 없는 부재중인 상태다. 맞벌이를 하는 집의 경우에는 부모가 모두 집(지역)에 없다. 생활의 공간, 돌봄의 공간, 문화의 공간은 돈벌이를 위해 비워지고(지워지고) 우리는 언제나 일터인 작업장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정과 지역은 잠시 머물다가거나 들리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늘 여성노동자가 어정쩡한 존재로 서 있다.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고 있으면서도 가정과 지역을 떠받치고 가야 하는 존재로.

이렇게 한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런 다양한 삶의 문제 중 어느 한 가지도 소홀할 수 없는 것일텐데,

 기존의 운동은 이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풀려고 했다기보다는 각자 별개의 문제로 풀려고 했던 것 같다. 그 결과 계급과 복지, 사회공공성, 성, 환경 이런 문제들은 각자의 이름을 달고 별개의 운동영역으로 진행되어 왔다. 새판짜기가 필요하다. 삶의 총체적인 문제를 풀 수 있는 새판짜기. 나는 비정규직, 여성, 영세자영업자 등 일하지만 빈곤한(신빈곤, 근로빈곤) 사람들의 입장에서 새판짜기를 시작하려면 사업장과 고용이라는 문제를 포괄하면서도 뛰어넘는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노동의 귀환', 생활권이란 포괄적인 문제의식에 기반한 ‘삶 자체를 다르게 구성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에 대한 물음에 우리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자면 공통의 경험이 필요한데...그 실마리를 나는 영화보기에서 찾고자 했다. 지역의 주민, 활동가, 회원이 함께하는 <서울여노독립영화정기상영회>와 요청을 받으면 원하는 시간과 장소, 영화를 가지고 <찾아가는 영화상영회>가 그것이다.




3. 소통과 연대의 경험쌓기...영화보기


정기상영회는 이른바 ‘여성의 눈, 노동자의 눈으로 영화보기'란 부제를 가지고 있다. 한 달에 한번, 보고 싶은 영화, 상영할 곳을 찾지 못한 영화, 아마추어 감독들이 만든 삶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보고 여성의 눈으로 수다를 떨어보자는. 그동안 나는 정기상영회를 통해『다섯은 너무 많아』,『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대추리전쟁』,『우리에겐 빅브라더가 있었다』,『노스컨츄리』,『주문-우리는 더 강해질 거야』,『이랜드투쟁영상』,『세번째 시선』,『살기위하여-어부로 살고 싶다』,『쇼킹패밀리』,『어느날 그 길에서』등의 다양한 영화를 통해 회원들 간의 세대·공간·경험을 뛰어 넘는 소통을 꿈꿔왔다. 대안가족, 국가와 가족, 비정규노동, 평화, 생명과 생태, 직장내 성희롱,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분법 뛰어넘기 등 다양한 주제들로 수다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연대의 고리를 만들고자 했다. 2006년부터 시작된 그 노력은 이제 지역의 주민과 활동가와 회원이 함께 소통하고 연대의 고리를 만들어가는 자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한 달에 한번 상영하는 그 시간에, 그 공간으로 영화를 보러오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찾아가는 영화상영회'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2008년 한 해 동안 나는『노마레이』,『식코』,『대지의 소금』,『수퍼맨의 하루』,『나는 날마다 내일을 꿈꾼다』,『우리들은 정의파다』,『첫차』,
『생리해서 좋은 날』,『별별이야기』등의 영화를 가지고 세종대학교 경영대학 생활협동조합, 성균관대학교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수업, 고양시여성민우회 ‘완경'프로그램,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 한국노총 여성위원회 ‘여성노동교실', 인하대학교 법대 <헌법> 수업, 이랜드일반노조의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왔다. 그 중에서 이랜드일반노조와 한달 반 가량 진행했던 ‘지역주민과 이랜드노동자가 함께하는 수요영화상영회'(2008년7월~8월중순)는 농성장을 지키는 조합원들과 무더운 여름날 산책이나 쇼핑을 나온 지역 주민, 연대하러 온 활동가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소중한 자리였다. 특히 대형유통마트인 상암월드컵홈에버(지금은 홈플러스)앞에서 대형마트로 인해 사라져가는 동네수퍼의 현실을 그린 『수퍼맨의 하루』가 상영된 후 조합원들은 어렸을 적 동네 수퍼에서의 추억을 더듬기도 하고, 동네 수퍼를 하고 있는 지인의 이야기를 하는 등 대형마트의 문제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기도 했었다. 또한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의 요청으로 진행했던 『우리들은 정의파다』상영회는 남학생과 여학생, 연세대학교 비정규분회 조합원들이 한데 어울려 70년대 동일방직 사건을 접하고 감독과의 대화를 통해 70년대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2008년의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에 함께 분개했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 영화를 함께 본 50~60대 여성노동자, 아직 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미래의 노동자들이 영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함께 소통하고 연대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동안 진행 해 온 정기상영회와 찾아가는 영화상영회는 모두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와 타인의 경험을 나누고 소통하고 연대의 실마리를 찾고자 하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내가 생각하는 영화보기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과 나의 삶에 공감과 연민을 보내는 것, 그런 소통을 기반으로 연대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 삶의 총체성에 입각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다르게 살 것을 고민하는 것. 다가오는 2009년의 경제적, 사회적 고통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될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삶의 대안은 아직도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 나에게 어울리는 삶을 찾고, 그러면서도 생계의 고통이 따르지 않는 삶. 이런 대안적 삶. 그 답은 누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함께 찾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영화보기를 통해 함께 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일깨우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래서 나는 2009년에도 영화보기를 통한 소통과 연대의 노력을 계속 할 생각이다. 나의 거창한 고민에 비해 지금까지 그 시도는 작고 보잘 것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앞으로도 ‘무엇이든' 해 볼 참이다.


1)2008년 대안여성노동운동워크샵 발제문(양미)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