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ACT! 64호 미디어꼼꼼보기] 일상의 공포에 지친 당신, 버라이어티 생존토크 쇼>에 참여하자*

본문

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64호 / 2009년 8월 29일

 

 

일상의 공포에 지친 당신,
<버라이어티 생존토크 쇼>에 참여하자*

 
 
일란(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 활동가)

 

 

 

 

무더위에 지친 여름 밤, 합정역 근처 작은 카페에서 너무나 무섭지만 통쾌한 ‘공포'영화의 상영회가 있었다. 그 영화 속에 등장하는 ‘호러 퀸'들은 일상의 공포를 확장시키면서 관객들을 안타깝게 만드는 그런 여성들이 아니라 강건한 태도로 자신들의 상황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여성들이었다. 이 용감한 여성들이 겪은 ‘사건'들은 때때로 스크린의 네모진 가장자리를 지워버렸다. 그리하여 스크린 밖으로 스멀스멀 기어나온 공포는 현실의 객석을 휘감았다. 객석을 가득 메운 여성관객들은 공포감에 몸을 움츠리기도 하고, 숨죽이며 ‘호러 퀸'의 경험에 공감하는 한편, 그녀들의 용기있는 대응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호러 퀸'들이 쏟아내는 풍자에 폭소를 터트리기도 했다. 이렇게 여성관객들은 ‘호러 퀸'들과 함께 스크린 안과 밖을 넘나들며 일상의 공포와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관객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영화적 쾌감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픽션으로 꾸며진 공포영화가 아니다. 일상의 공포를 함께 극복하고 우리 모두가 잠재적 생존자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성폭력 생존자를 그린 다큐멘터리 <버라이어티 생존토크 쇼>(이하 버생쇼)였다. 또한 ‘호러 퀸'들은 가상의 인물들이 아니라 현실의 극악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생존하여 우리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는 성폭력 피해여성들이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여성들에게 공포스러운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되 관객들을 공포로 위협하거나 고통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성폭력과 같은 여성을 둘러싼 공포는 우리가 함께 대응할 수 있는 하나의 싸움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이 날의 상영회는 <버생쇼>의 제작을 후원했던 ‘달걀후원단'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달걀후원단'이란 재미있는 이름은 성폭력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과정인데, 바위처럼 단단한 성폭력의 편견을 어렵지만 함께 깨뜨리자는 의미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 상영회에는 감독 뿐만 아니라 여러 주인공분들도 참석하여 다큐멘터리의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 이제 우리도 ‘달걀후원단'이 되어, 공포의 전율과 공포 타파의 희열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유쾌한 토크쇼에 참여해보자.

 

 

연쇄 성/폭력 사건이 신문지상을 뒤덮을 때마다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는 확대된다

 

 


2009년 8월 19일 오늘도, 연쇄살인범인 강호순의 범죄를 모방하여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무자비하게 범행을 저지른 3명의 범인들이 검거되었다. <버생쇼>는 강호순, 유영철, 온보현, 지존파, 화성연쇄살인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만연한, 그야말로 공포스러운 현실에서부터 시작한다. 감독은 신문지상을 뒤덮은 여성을 향한 범죄들에 분개하면서도 합기도로 단련된 몸을 지닌 자신과는 무관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여성들과의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성폭력을 ‘범죄'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 여성들의 삶을 둘러싼 복잡하고 미묘하며 수많은 질문들을 포함해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들의 경험을 통해서 감독의 잊고 있었던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감독은 마치 탐정처럼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였을까. <버생쇼>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3년 전부터 시작한 성폭력 피해경험을 일상적으로 공유하면서 성폭력 생존자들이 서로의 치유를 돕는 프로그램인 ‘작은 말하기'의 참여자들을 중심으로 두 가지 주요한 문제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다양한 성폭력 피해경험을 어떻게 말하고 듣고 공유할 것인지에 관해서 성찰하는 한편, 다른 측면으로는 ‘여성'-‘남성' 혹은 피해-가해 이분법을 넘어, 보다 다각적인 성폭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서로에게 던져야할 좋은 질문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버라이어티'하게 들려준다.

 


미경, 보짱, 한새, 자비 등은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목적으로 ‘작은 말하기'에 참여했다. 우선 다큐멘터리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미경은 ‘작은 말하기'의 첫인상은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표정이 너무나 밝아서 낯설었다고 토로했다.

 


“문을 열자 환한 햇살과 함께 눈에 들어오는 한 덩어리의 그림자가 있었어요, 그 남자가 갑자기 내 입을 막고 확 밀고 들어 왔어요.” 거침없이 쏟아내는 미경의 말들, 마치 자신이 본 영화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듯 한 그녀의 제스처와 달리, 그녀의 경험은 관객들의 심장을 죄어왔다. 타인의 고통이 여과 없이 스크린을 뚫고 관객들의 삶으로 파고드는 순간이었다. 택배 배달부로 위장했던 가해자는 결국 휴가 나온 군인으로 밝혀졌고, 결국 재판까지 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주변에서 그녀에게 던지는 무심한 말들이 더욱 상처가 되었다.

 


미경뿐만 아니라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대체적으로 2차 피해를 겪게 된다. 이러한 ‘작은 말하기'에서 공유되는 생생한 경험을 좀 더 듣고 싶었지만, 카메라는 조심스럽다. 다양한 그녀들의 증언은 그녀들의 정체성에 따라 다양한 타이포그래피와 그림을 통해서 재현된다. 예를 들어 한 장애여성의 이야기는 그녀의 말의 속도와 뉘앙스에 따라 거칠고 분명한 선의 움직임을 통해 전달된다.

 


그렇지만 ‘작은 말하기'라는 공간의 느낌을 좀 더 카메라에 담고 싶었던 감독의 마음은 벽에 부딪히게 된다. 왜냐하면 ‘작은 말하기'에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었던 감독 외에도 여성학 연구자, 타 단체의 활동가처럼 피해 생존자가 아닌, 다양한 목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러한 참여가 불편했던 ‘작은 말하기'의 생존자들은 모임을 주관했던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문제제기를 했고, 본격적으로 촬영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 문제는 심각한 토론의 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차별과 피해의 경험으로 말하다

 

 

 

성폭력 피해의 경험을 누가 그리고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토론은 <버생쇼>의 또 다른 주인공 보짱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현재는 반성폭력 단체 활동가이지만 당시 여성학 연구자였던 보짱은 참여자의 제한에 대해서 또 다른 문제제기를 던진다. 사실 ‘작은 말하기' 공간에서 성폭력 피해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녀들이 안전하다고 느껴졌고 그 안전함은 동일한 경험을 한 생존자들 속에서 소통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이 타인에 의해서 대상화되었을 때, 그 공간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보짱은 성폭력에 대한 경험이 닫힌 공간을 벗어나 보다 공개적으로 이야기되기를 원했다. 그녀의 고민은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보짱이 단순한 성폭력에 대한 연구자가 아니라 자신의 특정한 경험을 성폭력 피해의 경험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설명하고 싶은 언어를 찾기 위해 여성학에 몰두하고 있는 성폭력 생존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성폭력의 경험을 누가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더욱 복잡해진다.

 


소위 운동사회 내 성폭력의 문제는 여성 활동가에게는 이중구속이 될 수 있다. 집단 외부에서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여성주의자들의 시선과 조직 안위를 지키려고 하는 집단 내부의 시선 사이에서 모순과 충돌을 경험하게 된다. 얼마 전 민주노총의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말이다. 보짱의 고민은 이러한 운동사회 내 성폭력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보짱의 고민은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피해자의 경험으로 해석하는 것의 한계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피해의 경험으로 인식하게 되는 과정에서 스스로 피해자화하여, 자신의 모든 경험을 피해의 경험으로만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방식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드러낸다.

 


감독은 더 이상 ‘작은 말하기'을 촬영할 수 없었지만, 성폭력의 경험을 듣고 말하는 과정은 점차적으로 자신의 일상이 되어간다. 그러면서 ‘여자가 밤늦게 돌아다니면 위험하다'는 경고가 여성의 일상적 권리를 제한하고 성폭력 피해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부당한 억압과 통제임을 상징적으로 알리는 달빛시위에 참여하는 보짱을 따라 카메라는 거리로 나선다.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성폭력에 대한 인식 수준은 그야말로 폭력적이다. 이 폭력적인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감독의 고민은 한새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성폭력에 대한 공포 타파는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면서 현실이 된다

 

 

성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한새는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둔 어머니이다. 한새는 힘겹게 자신의 경험을 꺼내놓았다. 감춰졌던 경험들이 성교육 강의를 하는 동안, 말하고 싶은 마음과 잊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빚었다. 그러면서 어린 학생들에게 성적 터부에 대한 다양한 강의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당당해지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특히 성폭력 예방이나 대책을 이야기할 때면,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경험을 극복한 한새는 자신이 모르는 길로 가는 택시운전기사(남성)에게 “아저씨, 성폭행할 거죠?”라는 대담한 농담을 던질 정도이다. 자신의 경험을 아들과도 소통하는 대담한 어머니인 한새는 10대들에게 성교육을 통해 성폭력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전하려 애쓰고 있다.

 


감독은 다시 남성들의 왜곡된 성교육으로 인해 형성된 잘못된 남성들의 성문화를 우회하여,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성적 터부를 살펴본다. 어쩌면 성폭력 생존자들과의 만남을 지속하면서 감독은 성폭력을 둘러싼 다양한 질문들에 부딪히고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 애쓰는 과정에서 길을 잃은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증거를 수집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사건처럼, 성폭력의 원인은 점차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거나 너무 미묘한 부분이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다양한 여성들의 경험을 듣고 그것을 의미화하면서, 감독 스스로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그 경험과 대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야한 놀이'와 ‘성폭력' 사이에서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그 어린 시절의 경험은 왜 말하지 않았을까. 혹은 왜 말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더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의미를 만들지 못했던 경험은 이제 ‘언어'를 갖고 정당한 분노로서 표출되기 시작했다. 폭력에 대한 기억하는 여성들과 망각하는 남성들의 재치있는 교차편집은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지점이 아니었을까.

 

 

나의 말하기는 거대한 울림이 되어 변화의 물결을 만든다

 

 

여기서 다큐멘터리는 다시 다양한 여성들의 공포스러운 경험에 귀를 기울인다. 경험과 경험이 만나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길 바라는 감독의 마음이 엿보인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마무리할 때 즈음, ‘작은 말하기' 모임은 감독의 카메라를 허락하게 되었다. 감독은 말한다. “여전히 우리는 공간은 좁고, 우리의 목소리는 아직도 안전을 요구하겠지만 우리는 안다. 우리가 진정한 바라는 것은 생존을 넘어 버라이어티한 욕망들을 세상 밖으로 쏟아내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왜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만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것은 다큐멘터리의 한계가 아니라 폭력에 둔감한 한국사회의 한계일 것이다. 말하자면 가시화된 폭력 이외에 자신의 무관심이나 섬세하지 못한 태도 역시 현존하는 폭력에 공모자라는 것을, 왜 가해자들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지 않을까.

 


이 다큐멘터리는 자신의 경험을 꺼내놓으면서 함께 공유하기를 희망했던 많은 여성들의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신들의 모습을 다큐멘터리에 담으면서 그녀들은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가 세상에 공개되어 상영되는 동안, 자신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지, 주변에서 지지해주었던 사람들 만큼 자신을 지지해줄지 그녀들은 또 다른 고민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녀들의 경험과 고민에 충분히 공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면, 작은 말하기가 거대한 울림이 되어 변화의 물결을 만들기를 희망하며 이제는 우리가 말하기를 시작할 차례인 듯하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