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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67호 미디어인터내셔널] 아르헨티나 언론법 개정과 공동체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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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67호 / 2009년 11월 30일

 

아르헨티나 언론법 개정과 공동체 미디어
 
 
오재환(ACT!편집위원회)

 

 

 

 

지난 10월 10일, 아르헨티나에서는 거대 미디어 기업의 방송 독점을 완화할 수 있는 새로운 미디어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에는 시민사회에 주파수의 3분의 1을 할당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아르헨티나의 공동체 미디어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아르헨티나가 겪는 이러한 변화는 앞으로 방송 장악에 대항하여 싸워야 할 한국의 시민 사회에게도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예전 아르헨티나 언론법의 기원은, 1976년부터 7년가량 이어진 군사독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군사 정권은 한 편으로는 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철저히 짓밟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1980년에 제정된 방송법을 통해 미디어 기업에 가해지는 규제를 대폭 완화하였고, 그 대가로 기업들이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목소리를 내도록 했다. 법의 혜택을 받은 기업들은 신문, TV 채널 등 각종 미디어를 독점해 나가기 시작했다. 독재가 끝난 1983년 이후에도 방송법은 그대로 남았고, 아르헨티나의 미디어 독점은 점점 심화되었다. 그에 따라 방송의 다양성은 점차로 약화하였고, 방송 내용의 수준도 저급해졌다.

 


이렇게 주류 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의견이 전달된 통로가 마비된 상황에서, 공동체 미디어 운동은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전달하고 시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90년대에 운영되었던 유토피아(Utopia)라는 24시간 해적 텔레비전은, 군사주의의 잔재와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각종 활동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지금도 Radio Grafica나, 5월 광장 어머니회(Las Madres de la Plaza de Mayo)에서 운영하는 La Voz de las Madres와 같은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이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예전의 방송법에서는 상업적인 목적을 가진 개인 및 단체가 아닌 경우 방송 허가를 받을 수 없도록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몇몇 미디어 기업들이 공공의 자산인 주파수를 독차지하다시피 하는 동안, 모든 공동체 방송국은 불법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제약이 있었음에도 아르헨티나의 공동체 방송국들은 꾸준히 활동하면서, 합법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만한 성과를 쌓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2005년에는 남미 원주민을 위한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이 처음으로 방송 허가를 받았고, 2007년에는 5월 광장 어머니회의 라디오를 비롯한 다섯 개의 공동체 라디오에 대한 방송 허가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기존의 법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간헐적인 방송 허가만으로는, 공동체 미디어 운동을 본격적으로 활성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 미디어 단체들은, 독재 정치의 잔재이자 거대 미디어 기업의 든든한 보호막이었던 방송법을 개정하기 위한 움직임에 동참하게 된다. 2008년, 방송법 개정 운동을 위해 300개가 넘는 아르헨티나의 각종 시민단체가 모여 ‘방송민주화 연맹(Coalicion por una Radiodifusion Democratica)을 결성하였고, 여기에는 아르헨티나 공동체 라디오 포럼(FARCO), 아르헨티나 공동체 라디오 연합(AMARC Argentina) 등의 단체가 포함되었다. 방송민주화 연맹에서는 21개 항의 방송법 개혁 과제를 정부에 제출하였고, 아르헨티나 대통령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이 내용을 받아들여 개정된 방송 법안을 내 놓게 되었다. 3월 18일에 제출된 이 법안은 10월 10일에 상원을 통과하였다. 새로 개정된 방송법은 기업의 독점을 규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혁신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 기업, 시민사회에 주파수를 3분의 1씩 나누어 준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아르헨티나 민주화 이후 20여 년 만에 공동체 미디어가 합법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법적 통로가 마련된 것이다.

 


물론 아르헨티나의 공동체 미디어 앞에 갑작스레 장밋빛 미래가 펼쳐졌다고 믿기에는 아직 이르다. 우선 졸지에 독점적 지위를 빼앗겨 버린 미디어 기업을 필두로 한 반대세력들이 법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한 공세를 펼치고 있다. 게다가 개정된 방송법에도 한계는 있다. 우선 공동체 방송국은 스스로 수익을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국가의 적절한 지원이 있어야 할 텐데, 새로 만들어진 방송법에서는 이에 대해서 명시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주파수의 3분의 1을 할당받은 ‘시민사회'의 범주에는 기업의 후원을 받는 민간단체나 교회 등이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공동체 미디어는 이들과 경쟁하여 주파수를 확보해 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시민의 주파수 접근권을 대폭 인정하는 이 획기적인 법 조항이, 잘못하다간 공동체 미디어의 발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 채 정권의 생색내기를 위한 도구로 그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에 개정된 아르헨티나 방송법에는 시민이 방송을 통해 직접 자기 목소리를 낼 권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아르헨티나의 고질병이었던 거대 기업의 언론 독점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한 개의 기업이 가질 수 있는 방송 면허의 개수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여 다양한 기업이 방송에 참여하고 경쟁하도록 하거나, 공영방송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하는 것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방송 개혁은, 시민을 정보의 수용자로만 규정하고, 방송의 공공성을 ‘방송사나 언론사가 여러 사람의 입장을 반영하여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목소리를 내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공정한 정보가 전달된다고 하더라도 그 정보가 전달되는 통로가 전문가로 구성된 방송사와 언론사로 한정되어 있다면, 큰 힘을 가진 집단이 그 한정된 통로를 장악할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또한, 아무리 여러 계층의 상황을 반영한 목소리를 낸다고 하더라도 그 목소리를 내는 주체가 정권 혹은 기업과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면, 다양한 계층의 시민이 직접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만큼 투명할 수는 없다. 방송의 공공성이란 방송이 시민을 잘 ‘대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직접 방송에 접근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언론법은 주파수의 균등한 분할을 통해 시민이 직접 만드는 방송을 국가, 기업이 만드는 방송과 같은 위치로 격상시켰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방송 독점에 대항하여 독점의 주체를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독점의 근본을 파고든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새 방송법이 방송 독점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의 새 방송법은 암울하게도 독점의 시작을 예고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의 시민사회는 몇몇 거대한 신문사의 방송 진출과 언론 장악에 저항하기 위한 길고 험난한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류 언론 간의 세력 균형이라는 패러다임에 갇힌 채로는, 언론 장악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방송사와 야당의 밥그릇 지키기 싸움' 정도로 축소해 버리려는 보수 언론의 논리에 대응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방송과 언론의 공공성을 지키는 투쟁에 대한 시민의 지지가 절실한 이때,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언론법은 방송 장악에 반대하는 진보 세력이 시민을 위해 쟁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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