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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71호 인터뷰] “나는 노동문화운동을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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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1. 20.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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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71호 / 2010년 9월 30일


 
 
 
 
“나는 노동문화운동을 하는 사람”
- 오만가지 미디어마을의 여백(전철원)

 
 
김수목, 박혜미, 황다경 (미디어로 여는 세상)

 

 

 

지난 7월 초 인천에서 문을 연 “오마을”은 인천노동문화연구소 ‘오만가지'와 ‘미디어 마을'이 함께 있는 공간이다. ‘오만가지'는 다양한 노동문화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연구하는 공간으로 노동자의 표현과 이를 위한 소통을 지향하는 곳이고, 미디어 마을에서는 공동체 관련 영상을 제작하고, 공동체 상영을 모색하고, 미디어교육을 하는 등 공동체 미디어와 관련한 활동을 한다. “인천 지역 미디어 활동가 혹은 영상창작자들이 만나고 교류하면서 공동활동과 창작을 도모할 수 있는 놀이터”를 꿈꾸는 ‘오마을'의 여백(전철원) 활동가를 만나보았다.

 

 

* 이 인터뷰는 “미디어로 여는 세상 81회 톡톡인터뷰(2010.7)”에 방송된 내용입니다.

 

 

미디어로 여는 세상(이하 ‘미여세') : 안녕하세요. 소개를 좀 부탁드립니다.

 

 

 

 전철원(이하 ‘여백') :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철원이라고 하구요. 활동명은 여백이라고 쓰고 있어요. 활동명이라기보다 제가 직접 지은 이름이구요. 2004년, 2005년도 넘어가면서 그때부터 여백이란 이름을 썼는데 많이 못썼죠. 미디어센터하고 그러면서 행정적으로는 그 이름이 통용이 안되니까 잘 못쓰고 있다가 미디어센터 그만두고 적극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미여세 : 이전에 노동자영상패 ‘씨'(이하 ‘씨')와 주안미디어센터에서 활동하셨는데요, 우선 ‘씨'에 대한 소개 좀 해주세요.

 

 

여백 : 제가 원래 고향이 인천이에요. 인천이 노동문화운동이라는게 대개 활성화되어있던 지역이었거요. 노동문화운동에서 노래패, 풍물패는 활성화되어 있었는데 영상은 상대적으로 없었어요. 인천에 내려와서 겁도 없던 시절이라 이것저것 했어요.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이 기업노조 단위의 영상패가 대기업노조밖에 없거든요. 기자재가 워낙 비싸고 접근이 쉽지 않으니까. 근데 꽃다지 정도만 해도 꽃다지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제법 있거든요. 절대적으로 대중음악이랑 비교하면 여전히 작지만 그래도 꽃다지가 노래를 부르고 음반을 내면 듣고 즐기는 사람이 좀 되죠. 상대적으로 노동자영상이나 이런 게 나온다 해도 관계되는 사람들만 보고 그 외의 사람들은 잘 보지 않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쨌든 영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과정들이 생겨야 좀 더 전문적으로 완성도 있는 작품이 노동자영상 쪽에서 나오더라도 그걸 보면서 같이 즐기는 사람들이 생길 것 같다. 그래야 문화운동으로서의 영상이 노동문화운동의 한 영역에서 자기 위치를 가질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역을 중심으로 한 단위노조 말고 지역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영상패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마침 99년인가 2000년인가 인천에 ‘노동문화제'라는 큰 행사가 있거든요. 지역이 들썩들썩할 정도로 노동문화제를 했는데 거기에 저하고 다른 친구 2명이 계속 카메라를 가지고 촬영하고 편집을 했어요. 그걸 폐막 직전에 상영했는데, 반응이 대개 좋았죠. 그러면서 세 명이 처음으로 같이 일을 해본 거고 그 경험을 가지고 정기적으로 이런 형태의 활동을 같이 하자. 가지고 있는 기자재 모아서 지역의 노동자영상패 하나 만들자. 그러면 새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도 접근이 쉽고 그렇지 않겠냐 이렇게 얘기가 됐어요. 처음에 그렇게 해서 만들게 됐죠.

 

 

미여세 : ‘씨'에서 중점을 두고 하신 활동은 어떤 것이었나요?

 

 

여백 : 저는 거의 최근까지 제작과 관련해서는 제가 작품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안 갖고 있었거든요. 영상을 시작했던 것도 운동이라는 측면으로 시작을 했던 거구요. 기다린다고 ‘씨'로 노동자들이 와서 배워보고 싶다고 하지 않을테니 교육이란 걸 시작해야겠다. 영상제작교육을 노동자들 대상으로 해야겠다, 지역에서. 그래서 그 다음에 주로 했던 건 교육이에요. 2000년 중반 오면서 인천 민예총에 영상위원회, 영상위원회에서 제가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상영을 하고, 중심활동은 거의 지역연대사업하고 교육이었죠.

 

 

저는 출발이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이하 ‘전미네') 오는 분들하고 좀 달라요. 문화운동이 필요하다 이거였고 워낙에 영상이 강력한 매체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부터 해도 배워서 할 수 있는 영상을 시작해야겠다해서 시작한 케이스거든요. 미디어센터 때문에 전미네를 가기 시작했던 건데... 거기서 ‘미디어운동'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좀 낯설었어요. 영상운동이라는 표현까지는 썼는데 그것도 문화운동의 한 영역으로 영상운동을 한다 이렇게 하고 있던거지, 그러고 나는 노동문화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미디어운동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거든요. 지금은 미디어운동, 미디어활동가 이런 낯설음은 많이 사라졌는데 정확하게 내가 미디어운동을 하는거냐, 미디어활동가냐고 하면 그거는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미여세 : 인천이란 지역 안에서 미디어활동의 의미, 중요성 이런 걸 여쭤보고 싶어요. 그 당시로서는 새롭게 영상을 시작하신 거잖아요. 노동문화운동만 있던 곳에서 몇 년 동안 영상 관련한 활동을 쭉 하면서 그 운동 진영 안에서 갖는 변화나 의미 등 스스로 평가하시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여백 : 지역의 변화는 잘 모르겠고 제가 변한 건 있어요. 노동문화운동이라고 얘기하면서 2000년 초반에 화두로 던져졌던 게 ‘일상의 모든 것과 싸워라'였어요. 일상의 모든 것과 싸우지 않으면 그래서 바꿔내지 않으면 자본을 넘어설 수 없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뭘 해야 되느냐라는 답은 못 내놓고 있었거든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느냐 답을 찾으려고 하고 있던 상황인거고 사실은 풍물패나 노래패가 정기적으로 모여서 노래연습을 하고 투쟁이 있는 곳에 가서 연대투쟁하고 이런 것이 일상의 측면을 바꾸는 거는 아니거든요. 투쟁국면이라든가 뭔가 이벤트적 활동인거죠. 그랬을 때 일상을 바꾸는 노동문화운동이란 건 뭘까 이런 고민이 노동문화운동 전반적으로 놓여져 있던 상황이고.

 

 

그 와중에 저는 미디어센터, 미디어운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표현이나 개념을 접했던 건데... 미디어센터를 2002년인가에 처음 알았어요. 처음 알았을 때도 뭘까 이런 게 있네 신기하네 이러고 있다가 2003년인가로 기억하는데 조금 더 자세히 알았죠. 미디액트가 자기 실천을 해가면서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면서 이게 인천에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영상교육을 하면서 제일 많이 느꼈던 게 촬영교육은 어떻게 하겠더라구요. 그런데 편집교육이 안되는 거예요. 직접 만져보면서 해야 되는데 집에 편집 장비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 많지도 않았던 사람들 중에 촬영교육 끝나고 편집교육 들어가면 한 명 많이 남으면 두 명, 한 두명 남은 사람도 편집을 제대로 다 편집을 익히지 못하고. 대개 교육과 관련해서 기자재에 대한 한계, 교욱 프로그램에 대한 한계를 많이 느끼고 있다가 미디어센터를 본거죠. 이게 지역에 있으면 대개 많은 걸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역에 미디어센터를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전미네에 가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가 아니고 센터 네트워크였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2005년도에 전국미디어운동 네트워크로 전환을 했는데. 거기에 가서 미디어센터에 대한 얘기를 듣고 퍼블릭엑세스 관련한 새로운-전 몰랐거든요. 퍼블릭 엑세스, 미디어교육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그 전에 제가 알고 있던 영상교육=미디어교육과 다른 개념을 알게 됐죠. 그 다음에 커뮤니케이션 권리라든가 그런 것들을 처음 알게 됐어요.

 

 

전미네 다니고 미디어센터를 만들기 위한 작업들을 하면서. 그러면서 제가 변했죠. 여전히 저는 노동문화운동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있진 않거든요. 근데 그 전에 노동문화운동에서 제 스스로 전환을 시킨 건 중요한 건 커뮤니케이션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회복하는 거. 이 세상 살고 있는 각자가 노동자이든 농민이든 누구든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회복하는 게 일상을 바꿀 수 있는 첫 번째 시초가 되는거다라는 판단을 하고 있어요. 그게 제가 많이 변한 거고 그 뒤로 교육을 하거나 뭘 할 때도 마찬가지로 제일 중심을 두고 있는 건 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회복할거냐에요. 교육 이후에도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어떻게 유지할거냐가 화두가 됐죠.

 

 

미여세 : 주안에 미디어센터가 만들어지고, 사무국장으로 2년간 일을 하셨는데요. 막상 미디어센터에 들어가보니 그 전에 꿈꾸었던 것과 현실의 차이가 있었을 것 같아요.

 

 

여백 : (주안영상미디어센터에) 2년 있었어요. 딱 만 2년 있었던 거 같은데. 2년 동안 정말 1년은 시스템 잡는데 딱 1년이 갔구요. 내부 운영을 어떻게 해야하느냐, 지역하고 어떤 방식으로 어떤 내용으로 이야기를 해야되느냐 이거를 파악하고 정리하는데 1년이 걸렸어요. 그걸 가지고 실제 지역이랑 대화를 시도하는데 1년이 걸렸거든요. 3년차의 계획들은 얘기를 걸어놨으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던 단위들하고 본격적인 작업들을 해야지 하고 있는데 운영 위탁이 싹 넘어가면서 짤렸죠. 그래서 지금도 생각하면 살짝 억울해요. 미디어센터를 만들어서 하려고 했던 거 이제 시작할 수 있게 됐는데, 그 차에 센터 실무를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서 억울하죠. 실험을 하기 위한 토대 딱 만들어놓고 이제 실험하자 이렇게 하고 있는데 실험실을 잃어버렸죠.

 

 

미여세 : 얼마 전 미디어운동네트워크의 토론회에서 미디어센터에 대한 평가가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주안영상미디어센터의 운영 위탁 주체가 갑자기 바뀐 것, 그리고 또 올해 초 미디액트 사태를 보면서 미디어센터 운동, 활동이 갖고 있는 한계를 느끼셨을 것 같아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이야기해주세요.

 

 

여백 : 센터 자체에 대한 문제라고 보지는 않아요. 지역에서 영상미디어센터가 어떤 의미냐라고 질문하시면, 지역에서 영상미디어센터는 고정된 의미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건 지역별로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 미디어센터가 지역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지는. 그리고 그 미디어센터를 어떤 방식으로 운영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전미네에서 미디어센터 5년에 대한 평가를 자연스럽게 했던 거는 전미네 5년을 평가하면서 왜 미디어센터가 중심적으로 평가되느냐 하는 거였어요. 전미네 5년을 하면서 화두가 미디어센터만은 아니었어요. 퍼블릭엑세스도 있었고 굉장히 다양하게 존재했고 다양하게 펼쳐졌죠. 근데 지역에서는 미디어센터가 제1화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제가 미디액트를 보면서 이게 인천에 있으면 굉장히 많은 일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처럼 각 지역에 활동가들이 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죠. 워낙 지역이 기반 자체가 약하니까 그런 거를 일순간에 확장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가 있는 거였기 때문에 지역은 미디어센터에 꽂힐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5년 동안, 5년 내내는 아니기는 해요. 초반 3년 정도였던 거 같은데 미디어센터에 꽂힐 수밖에 없었죠. 그러니까 전미네 5년의 중심이 미디어센터였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해요. 이건 누가 의도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랬던 거죠.

 

 

근데 3년 정도 하고나서 정권이 바뀌었죠. 이게 문제가 공공영역이라는 거에요. 오히려 평가가 되어야 할 지점은 미디어센터 자체가 아니라 공공영역 자체에 기반을 두고 있는, 국가기관이 지원하거나 혹은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는 형태, 공적 자금을 사용하는 형태의 미디어센터 그런 공공영역에서의 미디어실천에 대한 평가가 핵심이라고 생각을 하구요. 어쨌든 노무현 정권이 한계가 있었고 김대중 정권이 한계가 있었다 하더라도 공공영역을 굉장히 열어둔 거잖아요. 그 안에서의 일정한 주고받는 파트너쉽도 가능했었고, 대화가 됐고 그 안에서 일정하게 양보할 건 하면서도 우리할 건 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만들어졌다라면, MB정권 들어와서는 그게 닫혀버린 거예요. 완전히 닫혀버렸고 그런 닫힌 공간이 되고 열린 공간에 들어가있던 활동가들을 다 밀어내려는 정책이 벌어진 거잖아요. 공공영역에서의 헤게모니 싸움이 전면적으로 붙은 건데 사실 지금 상황에서 공공영역에서 헤게모니 싸움을 하면 저희가 못 이긴다고 생각하거든요. 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잖아요.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 그들인데. 예비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뻔히 보이는 공격이 있을 거고 공격은 들어올 거고 어떤 방식으로 들어올 건지에 대해서 판단하고 그것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찾든, 아니면 힘에 밀려서 밀려날 것 같으면, 밀려난 이후에 -공공영역은 닫혔으니까 다시 비제도 영역에서 어떤 실천을 만들어갈 건지에 대한 전술적 판단이 필요했다고 보는 거죠. 필요했는데 그걸 놓쳤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사실은 열린 공간이 계속 갔더라도 이거는 제가 센터를 하면서도 답답했었고 2년밖에 안했지만, 나와서도 여전히 답답했던 건데 센터는 명확하게 지원시설이잖아요. 예를 들어 독립미디어센터, 다른 형태의 독립미디어센터였다면 미디어센터가 지역 실천의 중심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공공영역에 존재하는 미디어센터는 지역 활동이나 실천의 중심이 될 수는 없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왜냐면 처리해야 되는 게 너무 많아요. 감사도 받아줘야되고 돈 하나 쓰기 위해서 돈을 많이 쓸 수는 있지만 하나 쓰기 위해서 눈치봐야 될 것도 많고, 현재 지역실천에서 대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공개적으로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조건이 공공영역의 미디어센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지역 실천의 중심이 될 수는 없다. 중요한 파트너는 될 수 있지만. 근데 워낙에 지역활동가들이 미디어센터에 꽂히다보니까 인천도 그랬고 미디어센터로 들어가버리니까... 비는 거예요, 지역이. 미디어센터에서 기반시설을 제공하고 있으면 그걸 가지고 지역 실천을 쭉 만들어가야 하는데 만들어가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 빈 자리. 그렇다고 미디어센터를 통해서 활동가나 실천가를 더 많이 성장시킬 수 있다고 저는 지금도 생각하거든요. 그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던 거지만 외부에 꾸준하게 자기 실천을 만들어가는 단위나 활동가가 없이는 굉장히 오래 걸리거나 지역에 따라서는 불가능하거나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공공영역이 계속 열려있는 상태가 지속됐더라도 미디어운동과 관련한 개념, 새로운 정보들,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한 부분은, 전국적으로 그동안 미디액트가 만들어지고 전미네가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 오면서 충분히 했다고 저는 생각해요. 못했다는 평가는 안 들거든요. 전미네, 미디액트가 굉장히 많은 걸 했고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근데 일정한 수준에서 할 만큼 해왔기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실천이 만들어져야되는 지점에 와있고, 마침 그 지점에서 공공영역을 상실했던 거죠. 그게 바뀌어야된다고 생각해요. 공공영역을 다시 찾기 위한 투쟁은 여전히 유효하고, 지킬 수 있는 건 지키고 새로 열 수 있는 건 열고 하되 이제 모든 역량을 거기에 투자할 때는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그게 전미네 5년, 미디어센터 5년을 평가하면서 했던 얘기의 맥락이라고 생각해요.

 

 

주안영상미디어센터를 뺏기는 과정을 보면서 결과적으로 들었던 평가이기도 하고. 미디액트가 어떤 방식으로 공격받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제가 들었던 생각은 ‘올 게 왔네' 였어요. ‘그렇지, 쟤들이 미디액트를 남겨두고는 완성을 못하지' 이런 생각이었거든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쫓겨날 것도 예상했어요. 살짝 한 발 떨어져서 보면 보이더라구요. 저도 주안 센터에 있을 때는 안 보였어요. 그게 교묘하더라구요. 얘기를 한 단계씩 낮춰가며 한 단계씩 끌어내리더라구요. 내부에 있을 때는 ‘그래도 설마, 그래도 설마...' 하는 생각을 저도 했어요. 근데 결과가 딱 나오고 나니까 ‘당했다' 정말 교묘하게 당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저는 미디액트가 그 상황이 됐을 때 공모를 받으면 안 되는건데. 공모를 받는 순간 단계적으로 지게 되어있다 이런 생각을 했죠. 먼저 당해서.. 처절하게 당했으니까요.(웃음)

 

 

미여세 : 활동을 다양하게 하셔서 할 이야기가 많아요. 용산 촛불미디어센터 ‘레아'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셨는데요. 주안 미디어센터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의 평가나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는 것과 연관이 있었겠죠?

 

 

 

여백 : 적극적으로 하지는 못했어요.(웃음) 레아에 가게 됐던 계기는 사실 별로 크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었거든요. 크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데... 레아에서 새로운 전망을 찾겠다는 건 아니었구요. 2년 동안 센터하면서 현장에서 감을 좀 잃은 게 있었거든요. 감을 좀 찾아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역에서는 당장 어디 가서 내가 뭘 해야겠다는 게 보이지 않았거든요. 놀고 있을 수는 없는 거였고.

가서 보니까 재밌는 구조더라구요. 다른 실험을 해볼 수 있는... 독립미디어센터, 투쟁 현장에서의 독립미디어센터로서의 실험을 해볼 수 있겠다. 특히 공간을 열면 공간에 상주하는 상근자들이 그 공간의 정체성이잖아요. 근데 그렇지 않고 자원활동으로 와서 한 사람씩 자기 일을 찾고, 남는 공간 그건 또 다른 실험인거 같아서 그게 궁금했죠.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그런 측면으로 레아를 시작했던 거고. 근데 정말 열심히는 못했어요.

 

 

미여세 : 레아 하시면서 ‘오마을'에 대한 구상도 하게 되신 건가요?

 

 

여백 : 네. 영향을 많이 받았죠. 지금 오마을의 공간 구성을 이렇게 했던 것도 레아 영향이 좀 있어요. 작업실 열어놓는 방식이라든가 회의실 저렇게 만든 것도 널부러질 공간이 필요하다, 사람이 무장해제하고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같이 먹고 마시며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구성. 그런 건 레아에서 본거죠.

 

 

미여세 : 용산촛불미디어센터에서 구술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술사 프로젝트에 대한 소개 좀 해주세요.

 

 

여백 : 4월, 5월쯤 처음 했는데 구술사를 해보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던 건... 열사 국면이었잖아요. 모든 시선과 초점이 열사에게 맞춰있고 투쟁도 그 중심으로 가고 있고 유가족 중심으로 가고. 근데 용산이라는 부분이 열사가 돌아가신 분들이 생기셨지만 그리고 그 현장에 마침 그 일을 당하신 유가족분들, 돌아가신 열사분들 혹은 철거민분들. 주변의 일반적인 사회적 시선을 보면 좀 우호적이면 “참 안됐네 하필. 재수없게 그런 일을...” 이런거고 좀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면 “그 돈욕심 내다가...” 그런 방식의 시선들이 존재하잖아요.

 

 

제 경우도 그렇고 주변을 둘러보면 우연은 아닌데 절대 필연적 과정인건데, 물론 개인에게는 우연일지 모르지만 특정 개인에게는 필연적 과정인데 왜 그렇게 보게되는 걸까였고 그럼 이게 필연적 과정인걸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찾다가 모여있는 분들의 개인의 역사를 추적해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다르지 않은 개인의 역사를 보게 될거라는 거죠. 나와 다르지 않게 조금 욕심내기도 하고 조금 열심히 살아왔던 그 지점에 사회가 어떻게 작용을 했고 이렇게 만들어왔는지가 보일거다, 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역사를 묶어놓으면. 그래서 그런 작업을 해야 이게 누군가 나쁜 사람이 욕심을 내서라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재수없어서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라는 게 설명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구술이라는 게 자기 얘기를 계속하면 맺혀있는 게 풀리잖아요. 철대위 분들이 답답한 공간 안에서 계속 투쟁만 하고 계시고 그런 상황에서 살아왔던 얘기를 푸시면서 맺힌 걸 해소하실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했어요.

 

 

책하고 영상으로 만들 거예요. 지금 얘기가 되고 있는 지점은 책에 대한 계획을 정밀하게 맞추고 그것을 기초로 영상작업을 하자 정도로 얘기가 되었고, 책에 대한 계획을 정밀하게 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어요. 도시에 대한 것, 철거민 역사에 대한 것들을 세미나 하고 있습니다.

 

 

미여세 : 워낙 노동문화운동 차원에서 시작하신 거라서 철거민 투쟁, 노동자투쟁 현장에서 많이 활동하셨어요. 현장이 주는 매력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여백 : 현장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좀 다른데 현장 때문에 논쟁도 좀 했었어요. 저는 현장이 좀 바뀌었거든요, 제 현장이. 2005년도까지는 제 현장이 노동운동, 투쟁이 벌어지는 곳이었죠. 그때 쓰던 현장이란 개념은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나서 대립하고 있는 영역이었잖아요. 노동자는 파업을 통해서 배운다, 성장한다,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다라는 표현들 많이 했던 것처럼 가장 많이 현실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투쟁주체로 거듭나는 그런 곳이 파업현장이라든가 철거민 투쟁현장이라든가 그런 곳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런 곳에 가있으면 기쁘죠. 사람들의 태도가 모두가 동지고 모두가 나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각박한 투쟁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발견하는 이런 부분들이 있거든요. 일상의 공간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 그런 매력들. 그런 곳에 가 있으면 활기라는 것 자체가 집약적으로 피부로 느껴지죠. 에너지라는 거.

 

 

현장에 있으면 좋았던 것이 그런 것들인데 반면에 좀 시간이 지나서 싸움이 끝나고 보면 결과적으로 그 뒤에 투쟁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변하느냐에 대한 회의가 들더라구요. 변하는 게 없는 거예요.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거죠. 자본이 철저하게 자신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영역에서 잠깐 나와서 열린 공간을 열었지만 그 열린 공간에서 가졌던 경험을 갖고 다시 일상의 영역으로 돌아와서 일상을 새롭게 여는 과정으로 가지는 않더라는거죠.

 

 

 

 

 그러면서 저는 현장이 바뀌었어요. 파업현장이라든가 투쟁이 벌어지는 최전선 말고 일상이 벌어지고 있는 공간이 제 현장이라고 지금은 생각하거든요. 그것 때문에 논쟁도 좀 했었죠. 그게 어떻게 현장이냐 뭐 이런 류의 논쟁을 좀 했었는데. 커뮤니케이션을 회복하는게 제일 중요하고 화두가 되었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삶의 영역이 이런 거죠. 자본이 지배를 아주 공고하게 관철시키는 방식이 삶을 자본의 방식으로 재조직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투쟁의 국면은 그 균열점을 크게 내서 균열점을 크게 낸 공간에서 집약적으로 실험을 해볼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다시 일상으로 회귀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서 일상영역에서 삶을 비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재조직하는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요. 투쟁공간을 열고 투쟁하는게 불필요하다는게 아니라 일상 공간에서 그걸 재조직하는 방식을 찾아내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없지 않겠냐는 생각이 좀 들었어요. 삶을 재조직하는 방식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게 뭘까 기본이 될 수 있는 게 뭘까 이런걸 고민하면서 들으려고 하지 않고 보려고 하지 않고 말하려고 하지 않는 상황들이 보였어요. 마을에서 보면 옆집 사는데 온라인 공간의 익명성 얘기하잖아요. 전 오프라인도 익명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내 옆에 누가 사는데 모르는데 익명이지, 얼굴을 안다고 그게 실명인가. 익명성이 관철되고 강화되고 그러면서 여럿이 같이 살고 있지만 개인화되고 파편화되고 이런 삶의 형태, 이걸 어떻게 바꿀까? 파편화되지 않으려면 익명성을 깨야 되는데 깨기 위해서는 말걸기를 해야하고 말걸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말을 걸어서 대화가 잘 되려면 잘 들을 줄 알아야 되고. 그런데 보니까 제도교육 뿐만 아니라 가정환경도 대화하는 방법 자체가 사라져가는 것 같아요. 대화를 계속 만들 수 있는, 말하는게 아니라 듣고 이해하고 타자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또 나를 설명하고 이런 것들이 일상적으로 시도되고 이루어지는 방식이 있어야되는데 그런 걸 찾자, 그런걸 시도하자는 쪽으로 바뀌었죠. 그래서 저는 현장이 마을이에요.

 

 

미여세 : 그래서 오마을을 만드셨는데요, 이 마을을 넘어서 인천지역도 여백이 새로운 방식의 운동을 실험해보는 근간이 될텐데, 미디어마을 소개를 부탁드리고 동시에 여기에서 삶을 재조직하는 방식을 실험하는게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여백 : 실제로 필요하고 하고 싶은건 청주의 ‘공룡'같은 거예요. 지금 현재 마을에서 그런 공간을 열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청주에서 그게 가능했던 것은 무엇을 해야된다라는 동의를 갖고 몇 년간 같이 서로를 이해하고 실천해왔던 몇 명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걸 열 수 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저한테는 아직 그걸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걸 해보자, 만들어보자, 마을에 들어가서 하자고 같이 실천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동지가 저한테는 아직 없거든요. 그게 없기 때문에 안된다는 걸 발견한 거예요. 인천에 공동체운동이 자기 운동이고 공동체에서의 자기 실천을 가지려는 활동가가 많이 없다는 판단이 있는 거구요. 그런 활동가들이 어쨌든 지역에 같이 있어야 지역에 들어가서 실험을 하든 아니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다른 마을에 가서 다른 실험을 하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마을 같은 경우는 사실은 청주에 있는 그런 곳하고는 좀 다르잖아요. 딱 봐도 이 마을에서의 실천을 조직하기에는 좀 아니고.. 공간도 좀 닫혀있고. 아마 마을로 들어갔으면 공간을 이렇게 열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어쨌든 운동을 하는-미디어운동이겠죠, 일단은. 미디어운동을 하고 있는 혹은 하려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나누고 직접적으로 드러내놓고 부딪히고 각자의 경험이나 실천들을 가지고 상대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이럴 수 있는 데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구요. 교육과 지원 그 외 자기 삶, 자기 실천에서 필요한 것들, 혹은 하고자 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무장해제하고 널부러질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있었으면 했어요.

 

 

미디어센터는 새로운 사람들을 발견하는 공간은 될 수 있지만, 그 사람들이 모여서 집단적으로 자기 경험을 공유하는 시설로는 그 역할을 못하더라구요. 최소한 주안미디어센터는 그걸 못했어요. 공간적으로 봐도 그렇게 되지 않거든요. 사무실이고 교육실인데 어디서 그걸 해요. 복도에서 할 수도 없고. 활동가로 자기가 자임을 하든, 하지 않든 활동가인 사람들이 자유롭게 어울려서 실천에 대한 이야기들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공간이 먼저겠다 해서 만든게 오마을이에요. 대중공간은 아니예요. 대중을 만나는 건 대중이 있는 현장에 가서 만나는 거지 대중을 우리 현장으로 오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다. 여기서 어떤 공동의 실천이 만들어지거나 만나지는 그룹들이 생기면 그 그룹들이 현장으로 가서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오마을 소개하는 내용에 미디어마을은 팀이면서 공간이다라고 얘기를 하는 거거든요. 팀은 제가 미디어마을의 팀인 거죠. 현재로 보면 저 하나인건데 제가 예를 들어 공동체미디어 관련한 어떤 프로젝트를 할 때 누군가하고 프로젝트별로 만날 수는 있는 거잖아요. 그랬을 경우에 프로젝트 팀이 만들어지는 거고 프로젝트팀이 아니라 청주 사례처럼 그런 공간을 전반적으로 운영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같이 결합되면 그땐 미디어마을이 그 팀으로서 그런 작업을 같이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그런 팀은 없고 공간으로서의 미디어마을이 있어서, 미디어활동가들이 와서 자기가 갖고 있는 경험, 재산, 정보 이런 거를 풀어놓고 같이 쓰고 같이 배우고 그런데라고 생각해요.

 

 

미여세 : 오마을은 어떻게 운영이 되나요?

 


여백 : 미디어마을에 저랑 오만가지의 윤진현 선생님하고 둘이 하고 있어요. 별도의 수익사업은 하지 않구요. 앞으로도 사업을 해서 공간운영비를 만드는 방식은 지양하려고 합니다.


미여세 : ‘씨'도 그렇고 센터에서도 그렇고 미디어교육에 대한 생각이나 미디어교육 왜하는지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을거 같아요. 지금 여백이 바라보는 미디어교육은 뭘까요?

 

 

여백 : 미디어교육은 커뮤니케이션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도 다른 사람하고 대화할 수 있는 방법, 기술적 방법이 아니라 안에서 내가 막혀있으면 왜곡되잖아요. 자기 표현도 왜곡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왜곡되고. 그 막혀있는 거 때문에 교육과정에서 풀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되어야하는 거고. 그런 부분이 좀 수월하게 덜 막혀있는 사람들이라면 기술적인 부분들이 들어갈 수 있는 거죠. 타자하고 대화하기 위해서 어떤 기술적인 부분들이 필요한가, 또는 어떤 태도가 필요한가 이런 것들이 교육과정에 들어갈 수 있게 짜거든요. 실버교육은 저번 달에 끝났어요. 재미있었는데 청장년하고 실버하고 같이 한 수업과정에서 수업을 했었거든요. 세대 간 대화를 하는 방법을 찾는다였는데 그래서 교육과정 안에서 실버하고 청장년이 교육과정 안에서 대화할 수 있게, 대화과정이 작업결과에 반영되게끔 하는 형태로 프로그램을 짰거든요. 재미있었어요. 그분들이 그 경험을 가지고 좀 더 바란다면 장기적으로 일회적으로 접촉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획을 한다면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노인들하고도 얘기가 되는구나, 노인들하고 대화하면서 배울 수 있는게 있구나 혹은 청장년들은 이렇게 생각하는게 있구나 그런 것들이 이렇게 이해될 수도 있는거구나 이번 수업은 그런 가능성을 확인하는 수준이었거든요. 가능성이 확인되고 그게 꾸준하게 작업이 되는 것도 재밌겠다 싶어요. 지금은 생활공간이 다른 분들이거든요. 만약 이게 마을로 들어가면 마을에 있는 어르신들하고 마을에 있는 청년들, 청소년들 이렇게 묶어서 교육을 하게 되면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식의 교육들이 마을에서 만들어진다면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호명되면서 자기한테 존재가 되는 거고 그러면 다양한 대화들이 마을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미여세 : 긴 시간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인터뷰 일자 : 2010년 7월 18일
인터뷰 장소 : 인천 오마을
인터뷰 촬영 및 편집 : 김수목, 황다경(미디어로 여는 세상 제작팀)
인터뷰 녹취 : 김수목(미디어로 여는 세상 제작팀)
녹취록 정리 : 박혜미(미디어로 여는 세상 제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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