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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91호 길라잡이] 길라잡이 - 메모들, 두서없고 잡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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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4. 11. 14.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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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91호 길라잡이 2014. 12. 01]



길라잡이

-메모들, 두서없고 잡스러운.




조민석(ACT! 편집위원) 




시네필


이른바 ‘거장’이라 불리는 영화감독들이 연달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지난여름 하룬 파로키가 죽었고, 봄에는 알랭 레네가 죽었다. 영화계가 아무리 아랫마을 말썽꾸러기 이름처럼 ‘거장’이라는 칭호를 굴려대긴 해도, 영화가 조금이나마 우리의 삶에 기여하는 면이 있다면 하룬 파로키와 알랭 레네의 죽음은 적잖이 아쉬운 일이다. 


 이들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일 이들은 아무래도 ‘시네필’이라 부르는 사람들일 것이다. 지금 [ACT!]를 읽고 있다면 어지간해서는 ‘시네필’이란 말을 처음 접하는 건 아니리라. 그런데 ‘시네필’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일까? 시네마테크에 다니는 사람들? 각종 영화들을 수집하는 사람들? 장면들과 이름들을 많이 기억하는 사람들? 


 ‘시네필’은 처음에는 전후시기 프랑스의 젊은 관객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트뤼포, 고다르, 리베트 등을 통해 알고 있듯이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관객은 아니었다. 그들은 영화를 보면, 모여 앉아 이야기하고, 그것을 더 잘 보고 더 잘 알기 위해 이것저것 추적하고, 영화다운 영화를 위한 글을 쓰고, 직접 영화를 만들기까지 했다.


 그런데 ‘시네필’이라는 이름이 왜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일까? 세계적인 감독이나 비평가로 커버린 몇몇 인물들 때문에? 중요한 이유겠으나, 단지 그뿐 만은 아닐 것이다. ‘시네필’은 영화의 위상을 바꿔놓았다. 영화가 여타 다른 예술들과 구분되는 고유의 성질이 있음을 알리고, 영화를 비평과 연구를 요하는 지적 대상으로 탈바꿈시켰다.


 그에 따라 영화사도 단순한 역사적 사실들의 나열에 그치는 수준을 넘어 영화에 맞는 역사적 개념의 설정을 통해 다시 쓰였다. ‘시네필’은 영화광에 불과한 수준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의 ‘시네필’은 어떤 사람들일까? 글자 그대로 생각해봤을 때 그들에게 ‘영화’는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일까? 그들이 영화로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일까?



퍼블릭 액세스


미디어센터, 아니 미디액트에 오가면서 ‘퍼블릭 액세스’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미디어센터에 이따금 오가는 사람들로부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얘기도 종종 들었다. 위키피디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퍼블릭 액세스는 미디어에 대한 대중의 참여를 주장하는 운동이다. 방송국 등의 언론사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제공되는 미디어에서 탈피하여, 수동적인 시청자에서 능동적인 생산자로 변모하자는 운동이다.

 참여형 방송으로 분류할 수 있는 퍼블릭 액세스는 퍼블릭 미디어에 대한 능동적인 참여이다.

 미디어는 공공의 것이므로 특정한 언론사만의 것이어서는 안되며, 특히 공중파의 경우 주파수는 한정된 자원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기업에서 독점적으로 사용하면서 시청자를 대상화할 뿐 방송 권력을 시청자와 배분하려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소출력 라디오 방송국과 같이 생활주파수를 이용한 방송이나, 인터넷을 이용한 방송 등은 기존의 중앙 미디어의 매체 영향력에 대한 새로운 도전으로 2006년 4월 현재 한국에는 8개의 소출력 라디오 방송국이 존재한다.


 내가 [ACT!] 편집위원으로 ‘끌려오자’마자 맡게 된 일은 미디액트 개관 10주년을 이야기하는 인터뷰였다. 나는 듣고 정리만 했다. 퍼블릭 액세스를 구체적으로 추진해가는 과정에서 그걸 처음 시작하던 때의 노력은 적잖이 인상적이었다.


 왜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저널”을 발행, 발간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요즘 회의에 나오는 [ACT!] 편집위원들 중 내가 제일 오래된 편집위원이다. ‘나는 진보적 미디어운동이 뭔지 모른다. 그런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요즘 회의에 나오고 있는 편집위원 모두에게 이 말을 들었다. 나도 이 말을 했다. 그런데, 그렇다면 지금 발행하고 있는 [ACT!]를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저널이라 할 수 있을까? 

 

 얼마 전 몇몇 편집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진보적 미디어운동”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꼬집어 말한 적이 있다. 그동안은 항상 모르겠다는 말로 함구해왔었다. 왜 말했고, 왜 말하지 않아 왔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한테도 뭐라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내가 “진보적 미디어운동”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임이 뚜렷이 보이는 게 민망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나는 “진보적 미디어운동”과 영 상관없는 사람이다. 앞으로는 ‘그런데 왜 여기 있냐’는 의문에 모르겠다는 말로 함구해야겠다.


 “진보적 미디어운동”을 꼬집어 말하는 자리에서 나는 다른 얘기를 덧붙였다. 현재의 상황을 따져보면서 ‘진보적 미디어운동’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봐야 되지 않겠냐는 얘기였다. 매체 환경이 달라졌고 그에 따라 사람들도 사회도 많이 달라졌으니까. 심각하게 이야기했던 건 아니다. 이 얘기는 내가 떠들 때만 있다가 지나갔다. 술과 같이 있던 자리였고, 뜬금없이 튀어나온 얘기였다. 게다가 네 시간이나 회의를 하고 나온 뒤였다. 그러고 보니 편집위원들은 그 네 시간동안 무슨 얘기를 한 걸까?

 

 어쨌든 이런 건 다 내가 앞뒤 사정 모르고 하는 잡생각일지 모른다. 퍼블릭 액세스에 대한 의식, 관련된 활동 그리고 진보적 미디어운동의 성취 같은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통 몰라서 하는 소리일 수 있다. 하던 얘기에서 발 빼는 건 아니다. 미디어, 즉 매체를 “공공의 것”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매체는 파피루스, 죽간 그리고 종이일 때에도 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력과 부를 가진 일부 사람들의 것이었다. 매체가 “공공의 것”이라 말하려면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 <사랑과 경멸Le Mépris>(1963,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길라잡이


“위기”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가장 자주 들은 건 “인문학의 위기”다. 나같이 구질구질한 인간이 잡스러운 글 한켠에 인문학을 언급하는 게 불경스러운 짓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더군다나 내가 몸담고 있는 ‘영화’도 뭔지 모르는 마당에 남 보는데서 ‘인문학’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건 타당치 않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들먹거리는 이유는 이게 영 이상한 말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나같은 사람이 하진 않는다. 가령 나는 ‘영화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아니, 어차피 보고 듣는 사람이 없으니까 해도 그만이겠다. 그렇다면 ‘영화의 위기’라는 말을 할 만한 사람은 누구일까?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적어도 인문학 교수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게 영 이상하다. 굳이 ‘위기’의 원인을 따져보자면, 순진한 상상이지만 굳이 ‘위기’로 몰고 간 주체를 따지자면 그건 누구일까? ‘위기’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그들이 본,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본 상황은 무엇일까? 왜 그걸 ‘위기’라고 말할까? 어떻기에 ‘위기’인 것일까? 그동안 ‘위기’라는 말은 스포츠 중계에서나 들어본 것 같다. ‘위기’라는 말은 대개 사태에서 한 발짝 물러서있을 때 하게 된다. 스포츠 중계를 볼 때도 그걸 직접 하고 있는 사람들이 ‘위기’라는 말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면 “인문학의 위기”라고 말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왜 그 말을 하는 걸까? 그들이 말하는 ‘위기’란 무엇일까? 


 올해도 어느덧 11월에 접어들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사회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위태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걸 남 얘기하듯이 툭 던져버리고 싶진 않다. 한국 사람들이 미개하다고 말하는 자라면 그는 자신을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뭘로 먹고 사는지 생각해보면 이건 더 어이없는 일이 된다. 각설하고, 이렇게 연말이다. [ACT!]는 2014년을 충실하게 보냈을까? 91호가 2014년 마감으로 기획되지는 않았으니 그 얘긴 다음으로 미뤄두는 게 맞겠다. 하지만 91호가 별도의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ACT!]의 기획은 보통의 기획과는 거리가 있다. 쓸 수 있는 원고를 쓴다. 지면이 있으니 글을 싣는다. 그러니 [ACT!]의 길라잡이를 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냥 독자가 읽고 싶은 걸 읽으면 된다. 길라잡이는 무용한 지면이다.


 원고 목록을 한참 들여다보니 액티에게 따로 감사를 표하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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