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소외된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 : 미국 ITVS를 통해 보는 독립영화인들의 공영방송 개입 운동의 역사

전체 기사보기/인터뷰

by acteditor 2024. 6. 27. 11:06

본문

※ 본 원고는 인디앤임팩트 뉴스레터에도 공동게재되었음을 알립니다.

 

[ACT! 인터뷰 2024.06.27.]

"소외된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 

: 미국 ITVS를 통해 보는 독립영화인들의 공영방송 개입 운동의 역사

 

진행 및 정리  : 김지현

 

 

1999년부터 미국 독립텔레비전서비스(Independent Television Service, 이하 ITVS)의 이사를 두 차례 맡고 있는 패트리샤 아우프데하이드 교수가 한국외대에서 풀브라이트 시니어 연구원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4월 ITVS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ITVS는 무려 35년 전에 설립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오늘날의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도 공영방송과 연계된 독립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인큐베이터이자 중개자로서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인터뷰와 자료 조사, 임팩트 시네마 포럼 #4에서 발표된 내용을 바탕으로 ITVS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다.

 

🎤패트리샤 아우프데하이드 | ITVS 이사, 교수
1989년부터 워싱턴 D.C.에 있는 아메리칸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미디어 및 사회적 영향력 센터(Center for Media & Social Impact)를 설립하고 수석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회 이슈 전문 다큐멘터리 제작사인 Kartemquin Films과 Independent Television Service의 이사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다.

 

 

Q. 먼저 ITVS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부탁한다.

 

패트리샤 l ITVS는 미국 공영방송의 일부로서 독립제작자들과 다큐멘터리를 공동제작하는 공동제작자이자 공동투자자이다. 1988년 설립되었고 현재 매년 약 40편의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으며, 2023년까지 총 1400편 이상의 작품을 공동제작해왔다. 미국 공영방송공사(Corporation for Public Broadcasting, 이하 CPB)를 통해 미국 연방세금을 지원받고 있으며 민간 재단 등으로부터도 재원을 조달해 운영하고 있다.

 

"대담한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 ITVS 웹사이트 https://itvs.org/

 

Q. ITVS는 어떻게 처음 설립되었나?

 

패트리샤 l ITVS는 독립영화인들이 미국 공영방송 내에 개입해 얻어낸 결과이다. 미국에서 공영방송은 1967년 공영방송법(Public Broadcasting Act)이 제정되며 만들어졌다. 그 전에는 교육방송이 있었지만 지역방송사들은 전국적 프로그램에 접근하거나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당시 상업방송사들은 대중적으로 인기는 있었지만 저품질의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었고, 교육방송사들은 강연을 그대로 방영하는 정도의 활동만 하고 있었다. 한편 포드재단이 후원하던 미국교육방송국(National Educational Television, NET)은 1960년대에 다큐멘터리들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1967년 미국 정부가 공영방송공사(CPB)라는 비영리 법인에 3년마다 의회의 예산 배정을 거쳐 연방 세금을 지원하고 이곳에서 지역 공영방송사들의 운영비 일부를 충당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공영방송을 만들기로 한다. 단, 지역 공영방송사들의 기타 운영비나 프로그램 제작예산 등은 개인 후원금이나 기업 후원, 민간 재단 등 다른 곳에서 끌어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공영방송법 제정은 당시의 진보 정권이던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당시 린든 존슨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기에는 너무 부유하다.” 이에 따라 린든 정부가 추진하던 많은 프로그램들은 불평등을 바로잡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의회를 통해 공영방송뿐 아니라 같은 해에 국립인문재단(NEH)과 국립예술재단(NEA)도 만들어졌는데 미국에서는 연방정부가 문화분야를 지원하지 않는 매우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설립은 미국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공영방송의 설립 취지는 미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당시 최고의 기술을 활용해서 고품질의 좋은 방송프로그램을 똑같이 제공하자는 것이었다. 보수층에서는 주로 두 가지 측면에서 공영방송법에 대해 반대했다. 하나는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단절된 공적 기금을 지원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의회가 공영방송의 행동을 감시할 수 있도록 공영방송이 매년 의회의 예산 승인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기금 배정은 3년 단위였지만 예산 배정 절차에 3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사실 예산 책정 과정은 끝이 없었다). 다른 하나는 공영방송이 방송사들을 연결해 전국적 네트워크를 구성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CPB가 개별 방송국들을 정부예산으로 지원할 수는 있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두 가지는 보수층이 공영방송의 범위와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적 노력들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개별 공영방송사들은 전국적 프로그래밍의 필요성에 대해서 동의하고 있었다. 그래서 1969년 개별 방송사들이 모여 PBS(Public Broadcasting Service)라는 민간 조합(cooperative)을 만든다. PBS는 개별 방송사들이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구매하고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구조에서 개별 방송사는 다른 방송사들과 프로그램을 함께 구매하는 활동에는 참여하면서도 자신의 방송국에서는 원하는 시간에 편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CPB가 정부 지원금을 받는 개별 방송사들을 전국적 네트워크로 연결하지 않으면서도 개별 방송사들은 비영리 민간 사업체 형태로 그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구매할 수 있었다.

 

독립영화인들의 공영방송 투쟁 1기 (1960~1970년대) 

- 공영방송사를 상대로 한 프로그램 편성 전략

 

패트리샤 l  1967년 공영방송이 설립되기 이전에 미국에서는 노동 운동이나 시민권 운동, 반전 운동 등 사회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그리고 이 운동들에는 다 미디어가 있었다. 젊은이들은 영화 만드는 법을 배워서 사람들에게 시위 현장 등에서 보여주고 사람들이 비판적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조직했다.

 

공영방송이 만들어질 때 상업TV에 작품을 틀 수 없었던 독립영화 제작자들이 모여 운동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공영방송이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공영방송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공영방송에서 자신들의 영화를 틀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요구했다. 독립영화인들은 공영방송의 초기 모습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목소리였다. 공영방송 설립 초기에 독립제작자들은 실험적 작품들 뿐 아니라 핵폐기물, 여성 및 성소수자 인권, 반공주의 등 논쟁적 주제들에 관한 작품들을 방송에 틀 수 있었다.

 

하지만 공영방송 설립 첫 해에 방영된 독립 다큐멘터리를 둘러싸고 매우 큰 정치적 논쟁이 일어났다. <Banks and the Poor>(Morton Silverstein, 1970)라는 다큐멘터리였는데 빈곤층에게 차별적인 은행들의 대출 관행을 폭로하는 내용이었다. 그 중 한 은행장은 당시 새로 부임한 닉슨 대통령의 재정 후원자였다. 이 프로그램이 방영된 후 닉슨은 공영방송을 없애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대신 공영방송은 문화나 예술 프로그램만 다루어야하고 뉴스나 시사는 다루지 말아야한다고 선언한다. 이후부터 미국 공영방송사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취약성을 항상 의식하게 되었고,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을 종종 불신하게 되었다.

 

<Banks and the Poor>(Morton Silverstein, Documentary, 1970)

 

 

그러자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전국적으로 모여서 CPB에 독립 다큐멘터리를 틀 공간을 요구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CPB는 독립 제작자들의 이런 저항과 압력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비판이 사회적 이목을 끌게 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당시 CPB는 신생 조직이었고 어떤 논쟁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미국독립영화협회(The Association of Independnent Video & Film, AIVF, 1975년 설립)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때였다. 그래서 공영방송은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에게 약간의 공간을 내어주기로 한다. 1980년대 초반에 운영된 <Matters of Life and Death>나 <Crisis to Crisis> 등의 프로그램은 개별 독립 다큐멘터리 작품들을 모아서 방영하는 시리즈물들이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들은 시청자가 별로 없어서 PBS 소속 방송사들이 잘 안 틀기 시작했고 결국 두 프로그램 모두 2년 내에 운영을 중단하고 말았다.

 

독립영화인들의 공영방송 투쟁 2기 (1970~1980년대)

- 의회를 상대로 한 기금 편성 및 기구 설립 전략

 

패트리샤 l  CPB를 상대로 편성 운동을 벌여오던 독립영화인들은 이 운동의 한계를 느끼며 새로운 전략을 추진하기로 한다. 독립제작자들의 공영방송 개입 운동에는 영화제작자 외에도 정치적 조직가, 변호사, 좌파 다큐멘터리 배급자, 미디어 액티비스트 등 다양한 정치적 스킬을 가진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CPB가 독립 다큐멘터리를 위한 공간을 절대로 순순히 내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CPB가 매년 의회와 예산 금액을 협상해야 한다는 사실에 착안해 의회를 압박하는 전략을 펼치기로 한다. 그들은 1978년 공영방송이 프로그램 예산의 상당 부분을 독립제작자들에게 지원해야 한다는 일반적 법규정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의회에서 CPB는 <노바>, <와일드라이프>, <프론트라인> 등 PBS 시리즈에 프리랜서로 고용되어 있는 독립제작자들을 내세우며 독립제작자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자신의 법적 의무를 충족했다고 주장했다. 독립제작자들이 원한 것은 다양한 관점을 재현하는 자신들의 작품을 공영방송에 트는 것이었지 공영방송 제작진의 프로그램을 대신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독립제작자들은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게 되었다.

 

독립제작자들은 의회로 다시 찾아가서 공영방송이 미국 사회문화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전혀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건 위험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보수당 의원들이 이러한 비판을 이용해 공영방송을 아예 없애버리려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수당 의원들은 공영방송이 공화당원들,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 공화당원들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러 가지 점 중에서도 이들은 특히 공영방송의 어린이 프로그램과 고품질 자연 프로그램들을 높이 평가했다.

 

마침내 독립제작자들은 의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1988년 예산 규모를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예산 항목을 만들어 CPB의 프로그램 예산 일부를 독립제작자들이 TV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만들기로 한 기구에 할당하도록 하는 법안(퍼블릭 텔레커뮤니케이션법)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법안을 만들어낸 논거는 공영방송이 뉴욕과 로스앤젤러스에서 제작된 프로그램만 튼다는 것이었다. 공영방송은 전국에서 걷은 세금으로 운영되는데 반해 지역, 인종, 성, 계급, 장애 등 미국 사회문화의 복합성과 다양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논거는 미국 동부와 서부 해안을 제외한 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에게 큰 설득력을 가졌다. 한편 영화산업이 위치해있는 로스앤젤레스 출신 캘리포니아 민주당 의원 헨리 왁스먼(Henry Waxman)도 이 법안이 영화제작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그는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을 아우르는 연합을 만들어 법안의 통과를 지지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독립제작자들은 그들이 애초에 요구했던 바를 얻지 못했다. 그들은 공영방송 예산의 절반과 지역방송사들의 프로그램 편성에 대한 접근권을 요구했지만 결국 매우 적은 금액을 얻는 데 그치고 말았다. 또한 지원금의 수혜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공영방송사들에게 가장 먼저 제공해야 했고 방송사들이 그들의 프로그램을 반드시 방영해야 한다는 보장도 받아내지 못했다.

 

Q. ITVS의 초기 운영 과정(1990년대)은 어떠했나?

 

패트리샤 l  ITVS는 이제 독립영화를 공동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공영방송에서 작품을 틀게 할 것인가였다. 알다시피 CPB는 독립제작자들의 반대에 마주해 이들을 불신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 이들이 세운 ITVS도 마찬가지로 불신의 대상이었다. CPB의 가장 큰 전략은 ITVS를 그냥 내버려두자는 것이었다. 내버려두면 알아서 망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독립영화인들도 CPB를 불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ITVS 초기 설립자들은 전투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영화쪽 경험은 있는 반면 방송쪽 경험은 없었다. 이들은 그동안 방송사를 상대로 항의하고 싸우는 데 필요한 노하우는 있었지만 방송 제작업 경영에 필요한 노하우는 쌓지 못했다. 그들은 또한 지역방송사와 협상해본 경험도 없었다. 방송사들을 상대로 싸워왔던 이들에게 방송사들과 사업을 한다는 건 사실상 새로운 도전을 의미했다. 독립영화인들은 또한 종종 자신이 권력에 대한 진실을 얘기하고 있다고 여겼고, 방송에 틀기 적합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치적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데 어떤 이들은 이것을 일종의 타협으로 여기기도 했다.

 

한편, 1970-80년대 ITVS 설립 운동이 진행되던 것과 같은 시기에 뉴욕에서는 마크 바이스(Marc Weiss)라는 미디어 활동가가 있었는데 그는 미디어 분야와 좌파 분야를 조직해서 뉴욕공영방송사 WNET에 독립제작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편성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CPB의 독립 다큐멘터리 방영 프로그램이 중단되자 독립제작자들을 조직해서 독립제작자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CPB와 PBS, 지역방송사들 모두 그의 아이디어에 반대했다. 그런데 PBS의 메이저 프로그램 중 하나인 <프론트라인>의 프로듀서 데이비드 패닝(David Fanning)이 PBS에 찾아가서 마크 바이스의 요구를 수용하자고 얘기한다. <프론트라인>은 여러 상을 수상한 바 있는 매우 훌륭한 프로그램이었지만 독립제작자들은 그동안 <프론트라인>을 계속해서 비판해왔다. CPB가 <프론트라인>이 독립제작 작품들을 방영한다고 주장하도록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프론트라인>은 독립제작자들을 고용해서 데이비드 패닝의 비전을 실현하는 것일 뿐이었다. PBS는 결국 1988년 독립제작 작품들을 선보이는 프로그램 <POV>(관점을 의미하는 “point of view”의 줄임말)를 자신의 시리즈로 승인하기로 결정한다. 데이비드 패닝이 이 과정을 중재했는데, 마크 바이스가 대표를 맡고 지역방송사들의 임원들로 이사회를 구성하여 전체 운영 과정을 감독할 수 있도록 했다.

 

ITVS와 POV 모두 1988년에 설립되었고 처음 10년간 둘은 매우 긴밀하게 협업했다. ITVS에서 제작하면 주로 POV에서 트는 방식이었다. ITVS를 통해 제작된 독립제작자들의 방송 프로그램은 매우 비균질적이었다. 어떤 작품은 완성되지 않았고, 어떤 작품은 방송 퀄리티에 도달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작품은 매우 논쟁적이었다. ITVS의 초기 제작물 중 하나인 <풀어헤쳐진 말들(Tongues Untied)>(말론 리그스, 1989)는 너무 논쟁적이어서 ITVS와 POV의 장래를 위협할 정도였다. 이 작품은 흑인 커뮤니티를 포함해 흑인 게이 남성이 자신이 겪은 차별 경험을 웅장하고 시적으로 표현해내며 흑인 게이 섹슈얼리티를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이 작품은 미국 사회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 중 하나에 관한 시적이면서도 실험적이기까지 한 방송 프로그램이었다. 방송사들은 이 작품의 방영을 두고 큰 도전에 직면했다. 방영할 경우 보수층으로부터 거센 반발감을 일으켰고, 방영하지 않을 경우 탄탄한 조직력을 갖춘 젠더 권리 활동가들로부터 조직적이고 시끄러운 항의를 받게 되었다. 결국 전국적으로 절반은 이 프로그램을 방영했고 절반은 방영하지 않았다. 어느 경우든 방송사 임원들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지역 공영방송사들은 새로 설립된 서비스로부터 원치 않는 논쟁과 비균질한 퀄리티의 방송 프로그램을 기대하게 되었다. ITVS의 초기 이사진과 실무진들은 이러한 이슈들을 다룰만한 정치적 세련됨이 없었다.

 

<Tongues Untied>(Marlon T. Riggs, Experimental Documentary, 1989)

 

 

Q. ITVS는 어떻게 안정화될 수 있었나?

 

패트리샤 l  나는 ITVS가 설립된 지 10년 후인 1999년에 ITVS 이사회에 합류했다. 당시에는 ITVS가 거의 문을 닫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기존 대표였던 짐 이(Jim Yee)가 2001년에 암으로 사망하자 ITVS는 새로운 대표를 뽑아야 했는데 이사회 내에서도 단합이 잘 안돼서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독립영화 활동을 오랫동안 하면서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지역 미디어단체 중 하나인 베이지역비디오연합(Bay Area Video Coalition)을 운영해온 샐리 조 파이퍼(Sally Jo Fifer)를 새로운 대표로 뽑게 되었다. 그녀는 ITVS가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녀는 ITVS의 역할이 공영방송사와 독립제작자 양쪽의 입장을 모두 이해하면서 중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프로그래밍의 퀄리티를 높였고 명확한 측정항목들을 개발해냈으며 지역방송사들이 ITVS가 제작한 작품들을 신뢰할 수 있도록 했고, 독립제작자들과의 신뢰 관계도 탄탄하게 유지했다. 그녀는 또한 98%의 미국인에게 도달하는 공영방송에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비판적이며 독립적인 시각을 틀기 위해 필요한 매우 복잡한 정치적 작업을 매우 잘 수행해냈다. 이는 공영방송계 내부는 물론 정치적 이해관계자들을 상대하는 일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또한 민간재원으로부터 많은 자금을 조달해냈다.

그녀는 먼저 ITVS의 핵심 가치가 ‘다양성’이라는 것을 확실히 했다. 여기서 다양성의 의미는 “잘 대변되지 않는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representation of the underrepresented voices)”이다. 공영방송에서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내는 것이 ITVS의 역할이었다. 2002년에 그녀가 부임하고 새롭게 구성된 이사회에서는 초기에 “다양성”이 ITVS의 목적이자 평가 기준이라는 점에 대해 자세하게 논의를 나누기도 했다.

 

샐리는 ITVS의 다양성 구현 여부를 측정할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ITVS를 만들어낸 법안에 들어있던 문구인 “잘 대변되지 않는(the underrepresented)”의 개념을 ITVS의 운영체계에 정교하게 심어냈다. 그녀는 이사회의 구성, 직원의 구성, 프로그램의 구조 등에 다양성이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에 대해 매번 이사회에 보고할 수 있도록 했다.

 

그녀는 또한 CPB와 PBS 등에 찾아가서 우호적인 친구들을 만들어냈다. “ITVS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공영방송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고, ITVS의 프로그램은 젊고 다양한 관객층을 끌어올 수 있다”는 점 등을 어필했다. 이 과정에서 ITVS의 가치를 정량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데이터들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샐리 파이퍼는 공영방송사들에게 ITVS 프로그램들의 관객 데이터 뿐 아니라 ITVS 작품들의 다양성과 수상 실적, 타 PBS 프로그램들과의 비교 데이터 등을 제시할 수 있었다.

 

ITVS는 이사회 및 임원, 직원, 큐레이터 팀, 자금 지원을 받은 영화창작자 구성에 관한 데이터를 통해 인종 및 민족 다양성, 성별 다양성 등에 관한 진척 사항을 공개한다. (그림 : 2020년 데이터)

 

 

Q. ITVS의 이사회 구성 방법이 궁금하다.

패트리샤 l 1988년에 ITVS에 관한 법이 제정되고 ITVS의 실제 운영구조를 만들 때 ITVS를 만들어낼 조직을 만들어야 했다. 법에 의하면 이 조직은 CPB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했다. 그래서 약 15명의 독립제작자들로 구성된 전국독립방송제작자연합(National Coalition of Independent Boradcasting Producers)이 만들어졌다. 이 연합에서 1년간 CPB와 ITVS의 구체적 활동 조건들에 대해 협상을 벌였고, ITVS는 1989년에 문을 연다. 이 그룹에서 ITVS의 이사회 멤버를 선정하기도 했는데 초기에는 공영방송으로부터 ITVS의 정체성을 구별시켜줄 역할이 중요하게 고려되었고, 결국 대부분 독립제작자들로 이사회 멤버가 구성되었다. 이사회에 결원이 생기면 전국독립방송제작자연합으로 찾아가서 누구를 임명하면 좋을지 물어보는 구조였다. 하지만 ITVS를 설립해낸 1970년대 독립제작자 단체들은 와해되기 시작했고, 개별 독립제작자들도 전국연합을 떠나갔다. 2002년 샐리 파이퍼가 새로운 대표로 부임했을 때 당시 임기 만료 문제로 새로운 이사회 멤버들을 보강해야 했는데 이 당시 전국연합에는 두 명 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1999년에 ITVS 이사로 부임한 후 당시 ITVS 이사회와 전국연합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결국 전국연합 멤버도 한 명 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샐리와 나는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사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고 샐리 파이퍼도 논의에 참여했다. 우리는 이사진에 단순히 영화제작자뿐만 아니라 기술, 방송업계, 법률, 민간 분야 펀드레이징 등 ITVS에 필요한 여러 분야들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또한 이사진은 ITVS가 내거는 다양성의 가치를 이사회 운영에서 최우선순위로 삼을 수 있어야 했다. 이사회는 공식적으로 정관을 변경하여 기존 이사회가 새로운 이사회 구성원을 결정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는 이사의 임기가 만료하면 해당 이사의 연임 여부를 이사회에서 투표로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임기 제한이 어느 정도 느슨해졌다. 올해 ITVS에 새로운 대표가 부임했는데 이사회의 임기 제한을 다시 엄격하게 강화할지 고민 중이다.

 

Q. ITVS는 독립제작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나?

 

패트리샤 l  ITVS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독립제작자들이 나서서 ITVS를 지지하는 사건이 크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2013년, 다른 하나는 2015년에 일어났다.

 

먼저 2012년 말 PBS와 뉴욕방송공사가 <POV>와 <Independent Lens>를 2013년 1월 자신들의 핵심 패키지에서 제외하겠다고 발표하는 일이 일어났다. 개별 방송사는 ITVS의 프로그램들을 여전히 선택할 수는 있었지만 더 이상 PBS의 기본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 경우 개별 방송사가 ITVS의 프로그램을 선택할 확률은 확연히 떨어지게 된다. 2012년 12월 22일 금요일 밤에 이런 내용을 발표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연휴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항의하기 위해 300명이 넘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그들의 조직이나 개별 입소문, 그리고 시카고에 위치한 사회 이슈 전문 다큐멘터리 제작사 Kartemquin Films의 리더십 등을 통해 크리스마스와 연말 기간 동안 청원서에 서명하였고 결국 방송사는 이 프로그램들을 복원하기로 결정한다. 새로운 시즌의 첫 프로그램은 2013년 1월 8일에 방영되었다.

 

2015년에도 비슷한 위기가 찾아왔는데 2013년에 활동했던 그룹들이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당시 <인디 코커스(Indie Caucus)>라는 투쟁 네트워크가 조직되었는데 어떤 익명의 후원자가 $75,000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후원금은 조직 활동가의 활동비와 홍보 컨설팅 비용, 광고 게재비로 쓰였다. 후원의 조건 중 하나는 뉴욕타임즈에 전면 광고를 싣는 것이었는데 노먼 리어(Norman Lear)라는 유명한 진보적 상업방송 프로듀서가 광고 작성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 D.C, 시카고 등에서 공영방송 내 독립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연속 공청회가 개최되었다. 이 행사들을 조직한 독립제작자들은 지역 공영방송사들과 CPB, PBS 대표들을 초청해서 독립제작자 뿐 아니라 독립제작 작품들을 소중히 여기는 단체 및 개인들의 목소리를 듣도록 했다. 또 어떤 지역에서는 독립제작자들이 지역방송사에 찾아가서 해당 프로그램의 시청자를 늘릴 수 있도록 홍보에 협력하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2015년 PBS의 <인디펜던트 렌즈>와 <POV>가 위기에 처했을 때 뉴욕과 시카고에서 개최된 공청회 안내문

 

 

Q. ITVS의 공동제작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패트리샤 l  ITVS는 매년 일반 공모(Open Call)와 다양성 기획개발 공모(Diversity Development Fund)를 통해 공동 제작할 작품들을 선정한다. ITVS는 정부 세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지원 자격은 미국인이어야 한다. 프로젝트 선정은 독립 제작자들로 구성된 패널에 의해 결정되며, 선정된 작품들은 ITVS 스태프 프로듀서들과 공동 디자인 작업을 거친다. 또한 법률 검토와 팩트체킹 과정도 거친다. 최종 결과물이 <인디펜던트 렌즈>에 방영되려면 PBS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PBS는 해당 프로그램에 대해 방영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한편 <POV>나 <프론트라인> 등 다른 시리즈에서 방영되려면 PBS의 승인 외에 해당 프로그램 자체 이사회의 승인을 별도로 받아야 한다.

 

 

ITVS의 '일반 공모'와 '다양성 기획개발 펀드'  출처 : https://itvs.org/

 

Q. ITVS의 앞으로의 전망은 어떤가?

패트리샤 l  ITVS의 미래는 독립제작자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 그리고 공영방송의 지원에 달려있다. 좀 더 일반적으로는 공영방송이 스트리밍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에 의존하기도 한다. 미국의 공영방송 제도는 매우 분권화되어 있고, 중앙에서 이를 총괄하는 기획 단위가 없기 때문에 오늘날의 도전에 대한 어떠한 전략적 대응도 어렵다. 공영방송은 기존보다 더 향상된 스트리밍 앱을 개발해야 한다. 이 앱은 지역 시청자들이 거의 같은 방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전국적 앱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지역 방송사에 남아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역 방송사들의 필요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지역 시청자는 지역 방송사들이 예산을 확보하는데 핵심적이다. 왜냐하면 그들 중 일부가 방송사의 후원자가 되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은 또한 계속해서 젊은 관객들을 찾아내야 하지만 지역방송사의 후원자들은 대부분 70대 이상의 백인 여성들이다. 이에 따라 방송사의 우선순위가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공영방송의 미래는 의회가 미국인들을 위한 공적 방송 서비스를 계속 지원할 것인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하지만 오늘날은 민주주의 국가 정치가 위기에 처한 시대이며 우리는 이것을 의회에서 매일 목격한다. 따라서 ITVS와 공영방송, 그리고 미국 민주주의가 앞으로 헤쳐가야할 도전들은 상당하다.

 

하지만 나는 독립적인 스토리텔러가 신뢰할 수 있는 방송서비스와 협력하여 민주주의에 중요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는 중요한 약속을 우리가 계속 유지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ITVS가 독립영화 제작자들과 공동 제작하는 매 영화에서 전달하는 약속이 바로 이것이다. 

 

 

 

 참고자료


글쓴이. 김지현 

독립미디어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두 아이를 키우며 본인과 다음 세대를 위한 더 나은 삶의 조건에 대해 고민과 관심이 많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