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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와 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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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2. 7. 7.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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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31호 길라잡이 2022.08.17]

 

상투와 비위

 

서강범 (ACT! 편집위원)

 

  상투적인 걸 너무 미워하지 말자는 다짐을 많이 하지만 어떤 것들은 힘이 듭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얼마 전 자폐 스펙트럼 변호사가 나오는 드라마는 극찬하면서 출근길 장애인 이동권 시위는 불편하다며 나무라는 아이러니한 모습이 두 컷으로 그려진 만평을 봤습니다. 만평까지 그려질 정도면 어떤 시대의 전형의 모습이라 해도 무리가 없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이 모습을 정확하게 수행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보았습니다.

 

  한 지인이 공개적으로 장애인 이동권 시위의 정당성을 비판했는데, 저는 오만하게도 ‘어쩌면 설득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순진함과 호승심이 발동하여 최대한 감정을 덜어내고 정제된 언어로 제 의견을 전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 지인은 자신의 입장을 유지하기로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만평에서처럼 자폐 스펙트럼 변호사가 나오는 드라마에 크게 감동했다면서 입이 마르도록 극찬했습니다.

 

   저는 보통 이런 종류의 상투를 멀찍이서 발견했을 때에는 최선을 다해서 대상을 농담의 제물로 삼으려 합니다만, 이번처럼 저의 말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이를 마주한 경우에는 그게 힘들어집니다. 가장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불쾌함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마치 여름철 퇴근 시간 사람으로 가득찬 지하철에서 옆 사람과 살이 닿았을 때처럼, 즉물적으로 비위가 상한 것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장애인 이동권이 비장애인 만큼 보장되지 못했다는 점과, 장애인 이동권 보장에 대한 요구에 서울교통공사가 시민들의 불편을 방패삼아 책임을 돌렸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쟁점이겠습니다만, ‘동정조차 가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시위자들의 모습을 찍어 올린 것에서 짐작해보건데 그 지인도 꽤나 비위가 상했나 봅니다. 불편을 초래한 것은 시위의 의도에 부합했으니 그 지인이 불편을 느낀 것 자체는 가치판단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겠죠.

▲ 만평 <다른 반응> (출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하지만 출근길이 몇 분 지연된 자신의 불편함과, (비장애인은 그냥 보장받고 있는) 기본권을 박탈당한 동료 시민의 부당함을 동일선상에 뒀다는 점, 그리고 장애인을 동정에 목말라 있는 존재로 여기고, 마치 자신의 동정이 소중한 자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장애인에게 나눠주지 않겠다는 그 진부적인 관점과 투박한 언어 선택이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그 지인 입장에서는 알량한 정의감을 기어코 교조적으로 표출한 저에게 다시 한번 감정이 상했을지도 모릅니다. 누가 기분이 상하고 불편했으리라는 추측만 늘어놓다보니 문득 사실 우리의 비위와 감정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내기 위해, 동의할 수 없는 뭔가를 견딜 힘과 비위를 기르는 것이 훨씬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늘 무해하거나 유쾌한 존재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요.

 

  그러면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ACT! 131호의 글들을 소개합니다.

 

  [이슈와 현장] 코너에는 두 글이 실립니다. <슬픔의 케이팝 파티> 에서는 디제잉팀 ‘슬픔의 케이팝 파티’ (이하 ‘슬케파’) 팀의 인터뷰가 실립니다. 파리바게트 임종린 지회장 단식투쟁 현장과 을지 OB베어 강제집행 규탄 집회 등 투쟁 현장에서 디제잉 공연으로 연대 하신 이야기와 케이팝 곡이 어떻게 투쟁 현장에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줌 인터뷰로 들어봤습니다. <미디어 활동가의 처지는 10년 전보다 나아졌을까?: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 10주년 기념 집담회 ‘멀리뛰기’ 현장 보고> 에서는 10주년을 맞은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이하 ‘현카)’ 의 집담회를 스케치 형식으로 그렸습니다. ‘현카’는 투쟁 현장을 기록하는 미디어 활동가들에게 연대하기 위해 지난 10년동안  미디어 프로젝트부터 활동가들의 생활비, 건강검진 등을 폭 넓고 실질적인 미디어 운동의 지원을 이어온 프로젝트입니다.

 

  [미디어 인터내셔널] 에서는 두 가지 글을 준비했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 <다큐멘터리를 퀴어링> 대담 번역의 네 번째 파트가 실릴 예정이며, 앞 호에 연재된  파트와 연이어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정체성 정치와 비교되는 다소 낯선 개념인 존경성 정치respectability politics 에 대한 비판을 시작으로, 퀴어 창작자들에게 재현과 가시화에 대한 고민을 이어갑니다. 마지막으로는 미국 미디어센터 DCTV를 소개하는 글을 김세영 편집위원이 써주셨습니다.

 

  [리뷰] 코너에는 세 가지 글이 실립니다. ‘다큐 창작자가 쓰는 다큐 리뷰 시리즈’ 는 윤가현 감독님께서 <하나도 사소하지 않은 우리들의 말하기 방식>라는 제목으로 몇 편의 다큐를 제작하며 어떤 시선을 견뎌왔는지, 그리고 어떤 시선을 견지할 것인지 여성 다큐 창작자의 소회와 다짐을 전합니다. 다음으로는, 비건 밀키트 브랜드 ‘바로’의 대표 원정 님께서 농장 동물의 삶과 죽음을 건조한 시선으로 담아낸 다큐멘터리 <군다>를 리뷰해주셨고, 다양한 매체에서 활발한 기고 활동을 펼치고 계신 비평가 윤아랑 님의 비평집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에 대한 서평을 필자 문윤기 님이 써주셨습니다.

 

  [인터뷰] 코너에서는 김서율 편집위원이 광주 전남 퀴어 상담소 ‘큐앤아이’(Q&I) 활동가들과 진행하신 인터뷰가 실립니다. ‘큐앤아이’는 네 명의 구성원이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을 성소수자들에게 체계적인 지원과 상담을 제공하고자 설립된 곳입니다.

 

  [페미니즘 미디어 탐방]에서는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라는 제목으로 ‘혁명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 상영회 프로젝트를 기획한 신인아 님의 글이 실립니다. ‘혁명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는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 그레이스 리 보그스에 관한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레볼루셔너리: 더 에볼루션 오브 그레이스 리 보그스>를 직접 라이센스를 구입하고, 번역 자막을 입혀, 서울, 광주, 대구 등에서 430여명의 관객을 모아 영화를 상영한 패기넘치는 프로젝트입니다.

 

  [Me, Dear] 코너에는 <6년, 돌이킬 수 없는 변화 - 닷페이스가 떠났다>라는 제목으로, 닷페이스가 그간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와 닷페이스를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소회를 희너 님께서 써주셨습니다.  

 

  [Re:ACT!] 코너에는 인디그라운드에서 가치확산팀원으로 근무하시고 계신 송성호 님과 영화평론가 이보라 님께서 10문 10답으로 참여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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