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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현장-플랫폼으로서의 트위터 - 트위터리안 2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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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2. 6. 7.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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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30호 이슈와 현장 2022.06.11.]

 

다른 현장-플랫폼으로서의 트위터

- 트위터리안 2인 인터뷰

 

인터뷰 진행: 박동수(ACT! 편집위원)

녹취 및 정리: 한진이(ACT! 편집위원)

 


지난 4월 13일 JTBC <썰전 라이브>를 통해 진행된 박경석 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 연대 공동 대표와 이준석 국민의 힘 당대표의 토론을 시청했다. 응원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느끼며 접속한 트위터에서는 또 다른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TV와 유튜브에서 생중계되던 토론을 실시간으로 옮겨오며 의견을 덧붙이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한 트윗을 마주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2월 진행된 대선 TV토론에서도, 작년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TV토론에서도, 그리고 그 이전에도, 그러한 트윗을 마주했다. 생중계 현장의 속도와 비례하여 빠르게 이어지는 의견과 반박, 비판의 트윗을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이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트윗을 남기는 것일까? 여기서 출발한 기획은 TV토론을 트위터로 생중계하는 것에 관한 의문을 넘어, 트위터를 통해 전개되는 다양한 운동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최근의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필자의 타임라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두 트위터리안에게 그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마침 박경석 공동 대표와 이준석 당대표의 2차 토론이 있던 날 진행한 인터뷰를 이곳에 옮긴다.

 

▲비장애인 중심적인 TV 토론 현장을 지적한 성북동 김이사님의 트윗


TV토론을 (재)생중계하는 이유

 

박동수(ACT! 편집위원):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에스텔: 저는 올해 29살인 서울 사는 트위터리안입니다. 2016년에 트위터를 시작했고 지금은 뉴스를 큐레이팅하는 계정을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냥 트위터를 열심히 사용하는 일반 유저입니다.

성북동 김이사: 저는 성북동 김이사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성북동에 살지는 않는, 부산에 살고 있는 32살 여성 시민입니다. 지금은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대략 2010년 말에 본격적으로 트위터를 시작했습니다.

박동수: 공교롭게도 마침 오늘이 박경석 전장연 공동 대표와 이준석 당대표의 2차 토론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두 분 모두 저번 달에 성사된 1차 토론을 포함해 이번의 대선 토론 등, 다양한 TV 토론을 마치 생중계하듯 트위터에 업로드하고 계십니다. 다른 여러 트위터리안 또한 TV 토론을 시청하는 동시에 텍스트로 변환하여 트위터에 생중계하고 있고요. 이처럼 토론을 시청하고 그에 대한 의견 및 반응을 꾸준히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성북동 김이사: 매체의 특성상 실시간성이 굉장히 강하기 때문에 그것이 주는 자극을 떼어 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발신한 메시지가 어떻게, 얼마나 리트윗이 되었는지, 그리고 공유되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는 게 콘텐츠의 성격과 무관하게 생중계라는 행위 자체에 쾌감, 어떤 자극을 부여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야구 등의 스포츠 경기가 벌어질 때 많은 유저가 트위터로 중계하는 것 또한 같은 이유이겠지요. 그 때문에 박경석 전장연 대표와 이준석 국힘 당대표의 1차 토론을 생중계하기 전에 고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토론의 내용과 토론을 둘러싼 여러 가지 불합리를 알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토론을 중계하고자 했는데, 그것이 아무래도 유희처럼 보일 가능성이 있기에 염려되었습니다. 실제로 유희처럼 보시는 분도 있었어요. 스포츠 중계하듯 일일이 트위터로 이야기를 하는 게 맞는 건가 의문을 표하시는 분들도 계셨거든요. 그렇지만 저는 결과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에스텔: 성북동 김이사 님과 비슷한 생각입니다. 트윗을 올리면 매우 즉각적으로 반응이 돌아오잖아요. 때문에 리트윗 등을 통해 얻는 말초적인 자극이 가장 큰 동기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 말을 뱉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느끼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 이준석이 헛소리를 하는 상황에서 "이 사람이 이런 소리를 했다."라는 사실과 그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친구들과 다 같이 알고 싶다는 생각도 합니다.

박동수: 공감합니다. 지난 1차 토론 때에도 이준석의 실언에 반박하는 자료 등이 가장 빠르게 공유된 플랫폼이 트위터였죠. 이와 관련하여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두 분 모두 박경석, 이준석 1차 토론의 불합리를 지적하는 트윗을 많이 남겨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북동 김이사 님이 작성하신, 휠체어에 앉은 박경석 공동 대표와 의자에 앉은 이준석 당대표의 높이가 일치하지 않음을 근거로 들며 TV토론의 물리적인 환경이 비장애인 중심적임을 지적한 트윗이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오늘(5월 12일) 진행된 2차 토론에서는 그러한 지적이 반영이 된 것인지 좌석 높이가 조정되었습니다. 성북동 김이사 님의 트윗이 기사화가 되는 등의 주목을 받으면서 영향력을 가지게 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트위터 중계 활동이 TV토론이라는 포맷이 가진 근본적인 불균형성, “기울어진 운동장”의 성격을 폭로 및 보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트위터에서 불합리를 지적하고 그러한 트윗이 주목을 받아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과정, 그리고 그 결과가 가지는 의미와 그것이 수행하는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성북동 김이사: 제가 1차 토론 때 트위터에 지적했던 바입니다만, 이준석 씨의 발화 방식은 굉장히 안정적인 톤을 바탕으로 “짤방(밈)”을 생산할 수 있게끔 순간적인 스펙터클을 의도합니다. 즉, 일순간 상대를 몰아붙여 당황케 하고, 그러한 당황의 순간이 포착되어 짤로 유통되도록 유도하는 방식을 지적한 것이죠. 트위터에서 짧은 글과 이미지로 토론을 중계하고 불합리를 폭로하는 것이 어쩌면 그러한 발화 전략에 대항하는 같고도 다른 방법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토론 시간이 짧지 않기 때문에 생활인이라면 일일이 시청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1차적으로 트윗은 간략하고 임팩트 있는 요약으로서 주목을 끄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더해, 트위터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클러스터를 이루는 소셜미디어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조명 받기 어려운 소수 의견을 우호적인 환경에서 가시화할 수 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상당히 많은 수의 언론 관계자가 트위터를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옆 사람에게 말했을 때에는 그냥 무시되고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도 언론을 타면 일종의 권위를 얻게 되기 때문에, 이 또한 트위터 중계 활동의 의의 및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박동수: 토론을 보면서 떠오르는 의견이나 물음을 사담으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다수에게 열려 있는 트위터에 남김으로써 그것이 가지게 되는 영향력과 언론 등의 경로를 거치면서 그것이 재생산되는 과정에 의미와 역할이 있다고 정리할 수 있을까요?

성북동 김이사: 네.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더해가는 과정 자체가 말하자면 온라인 입소문이고, 이러한 온라인 입소문 자체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에스텔: 저도 일련의 트윗 중계 활동이 이준석 씨가 어떤 클립을 의도하고 만든 스펙터클에 대항하는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헛소리를 집약적인 단문으로 보여주면서 이에 대항할 수 있게 하고, 그냥 흘러갈 말을 기록하여 남김으로써 사람들이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하고 얼마나 호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는 점에서 저는 트위터 중계 활동이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동수: 리트윗, 마음 등의 반응이 사람들의 동조나 호응 등을 가시화하는 지표가 된다는 말씀이시죠?

에스텔: 네. 맞습니다.


▲토론회에 관한 에스텔님의 트윗




트위터라는 플랫폼에 관해

 

박동수: 한국의 경우, 다른 소셜미디어에 비해 트위터의 이용자 수가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위터는 다양한 밈의 1차 소스이며 심지어는 트윗 자체가 포착되어 밈으로 퍼지는 일도 왕왕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을 고려할 때, 두 분의 트윗은 일종의 밈, 가령 TV토론에서 혐오 발언 등의 실언을 저지른 이를 비판하기 위한 발판인 밈으로서 작동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문의 텍스트를 빠르게 퍼뜨릴 수 있는 트위터 고유의 성격에서 기인한 현상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트위터라는 매체 혹은 플랫폼의 특성을 두 분은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그 효과는 어떻게 느껴지는지 묻고 싶습니다.

에스텔: 트위터의 굉장히 즉각적인 특성, 단문이 빠르게 흘러간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정제되지 않은 날것들이 많이 표현되잖아요. 따라서 날것의 감정을 접하고 그에 공감하고 그래서 해소하는 것, 그리고 쉬이 전파하는 것, 그 두 개가 트위터라는 매체의 활용이자 가장 큰 효과라고 생각합니다.

성북동 김이사: 저는 에스텔 님의 답변에 더해 트위터가 게시판 형식의 플랫폼이 아니라는 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스레드 형식으로 쭉쭉 내려가면서, 트윗을 쓴 사람의 사회적 배경이나 영향력과 관계없이 모든 의견이 비교적 수평적으로 대우받는 특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게시판 형태의 플랫폼이었다면 명망가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트위터는 그에 비해 소수자가 목소리 내기 쉬운 플랫폼이라는 것이 다른 소셜미디어와 트위터의 중요한 구분인 것 같습니다.

박동수: 페이스북의 경우엔 담벼락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그러다 보니 소위 선생님이라 불리는 분들이나 긴 글을 쓰는 활동가 분들이 많이 활동하는 플랫폼이 되었다는 점에서 트위터의 경우와 비교가 되네요.

성북동 김이사: 네. 그리고 수평성을 받쳐주는 게 익명성이기도 하잖아요. 페이스북은 소셜미디어 중에서도 특히 오프라인 관계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결국 오프라인 사회의 압력이 온라인으로 그대로 옮겨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더라고요. 페이스북의 담벼락을 보고 있으면 힘의 불균형을 자주 목격하는데, 그에 반해 트위터에서는 굳이 신상을 밝힐 이유가 없고 (저의 경우에는 밝히고 있습니다만) 신상을 밝힌다고 해서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익명성이 잘 지켜지고 있으며 그러한 익명성이 결과적으로 트위터를 비교적 수평적인 플랫폼으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박동수: 에스텔 님은, 자기소개에서도 언급하셨지만, 현재 뉴스 큐레이션 활동을 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트위터 상에서 이와 같은 계정을 운영하는 이유가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에스텔 님의 트위터 안팎에서의 활동과 연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에스텔: 뉴스 큐레이션 계정을 운영하는 이유는 사실 되게 단순합니다. 옛날에는 뉴스를 전부 본 계정에 올렸는데 사람들이 너무 피로할 것 같은 거예요. 뉴스를 위한 계정을 따로 마련하여 그곳에 올리면 뉴스 보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안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처음 뉴스 계정을 만들게 되었는데, 지금은 제 생각에 남들과 같이 볼 만한 가치가 잇는 뉴스를 고르고 계속해서 기록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본 계정에 뉴스를 올릴 때도 있지만, 본 계정에 올리는 뉴스는 정말 제 날 것의 감정, 공분 등을 표출하기 위한 용도라면 뉴스 계정에 올리는 뉴스는 다른 누군가가 정제된 말로 옮겨 놓은 것을 남과 나누기 위한 용도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동수: 두 분은 생중계로 진행되는 TV 토론을 텍스트로 변환하여 재-생중계하고, 더 나아가 나의, 남의 의견과 비판을 덧붙이며 새로운 여론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이 두 분을 TV 토론의 시청자/수신자이자 2차적 토론의 기폭제가 되는 텍스트의 제공자/생산자로, 다른 이의 의견이나 비판을 리트윗 등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수용자로 만든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토론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이중-삼중의 역할 교환이 토론의 맥락을 풍부하게 한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역으로 맥락을 축소하여 특정한 관점만을 재생산한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에스텔: 저의 경우에는 반대하는 입장의 의견을 잘라낸다는 점에서 맥락을 축소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비공개 계정인 친구의 트윗을 가져와 유통하는 역할, 소위 트훔(*주1)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운동의 역사와 맥락을 해석하는 타인의 말을 옮겨오는 것이 토론을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성북동 김이사: 중계를 하다 보면 인용으로 반대 의견을 말하는 사람도 많고 심지어는 싸움을 걸어오는 사람도 적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저의 말을 인용하여 욕설을 첨부함으로 인해 제 트윗이 담고 있는 어떤 사실들이 퍼져 나가기도 하는 거죠. 그러니까 반대를 하든, 찬성을 하든, 아니면 첨언을 하든 간에, 토론의 맥락은 조금 더 다양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제일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제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인 것이 사실입니다. 조금 양가적인 면모가 있는 거죠. 맥락을 풍부하게 하면서도 편향된 진영의 의견을 강화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박동수: 트위터의 경우에는 특정한 단체의 정체성 혹은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우지 않는 개인들이 각자 토론을 접하고 이해하여 의견을 내는 것이 일반적인데요. 바로 이러한 점이 기존의 레거시 미디어를 비롯하여 어떠한 단체, 활동가가 토론을 대하는 방식과의 주요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경향을 고려했을 때 트위터리안이라는 개인들을 통하여 트위터라는 플랫폼에서 토론이 확장되고 재생산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성북동 김이사: 단체나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트위터에 오시면 익명성을 바탕으로 당시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내시기도 하거든요. 저는 의견의 풀 자체가 넓어지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개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발화하다 보니 메시지를 발신하고 공유하고 전파하는 과정에서 소비자 정체성이 전면에 서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우려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박동수: 소비자 정체성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성북동 김이사: 가령, 청와대나 국회 청원 같은 거죠. 서명하고 공유한 다음에는 자기 역할도 끝났다고 생각하고… 운동을 하는 측에서 이와 같은 창구를 제공하지 않을 때 굉장히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례도 있고요. 사실 운동 현장이 굉장히 열악하잖아요. 그래서 메시지를 통일하는 게 어려운 경우도 많은데, 메시지가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운동에 협력하기 보다는 왜 통일성이 없냐는 식으로 클레임을 거는 데서 끝나버리는 경우가 최근 꽤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우려하는 지점입니다.

에스텔: 저는 트위터의 익명성에 관해 조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트위터를 열심히 하는 편이다 보니 누구의 의견이 많은 반응을 자아내는지, 누가 어떤 사안에 어떤 스탠스를 취하는지, 심지어는 누가 뭐 하는 사람인지를 대강 파악하고 있어요. 때문에 저와 성북동 김이사 님을 포함한 유명한 트위터리안들이 일종의 오피니언 리더로서 기능하는 면이 크지 않나 생각합니다.

박동수: 유저의 본명이나 직업 등을 알 수 없게 하는 익명성은 분명히 있지만, 이름을 대신하는 닉네임 자체가 대표성을 띄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말로 이해하면 될까요?

에스텔: 네. 심지어 DC의 고정닉(*주2)과 비교했을 때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사람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도 사실이고, 팔로우하는 사람의 의견을 따라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줌 인터뷰 화면


트위터를 통한 운동은 가능할까?


박동수: 이번에는 운동과 트위터의 관계에 대해 묻고자 합니다. 2011년 김진숙 지도 위원이 트위터를 통해 전한 고공 농성 상황에 많은 트위터리안이 연대한 일, 2012년 용산 참사 다큐멘터리의 개봉 당시 트위터를 중심으로 여러 유명인들의 자리 나눔이 이어진 일처럼 과거에는 트위터 상의 연대가 오프라인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금 벌어지는 트위터 상의 여러 운동은 불매 혹은 청와대/국회 청원 등의 방식으로 이어지는데요. 어떻게 보면 현장과 결합된 운동 형태가 현장과 분리되어 온라인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거칠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트위터 상의 운동을 어떻게 보아 오셨는지,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에스텔: 저는 사실상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트위터를 시작했기에 2011년에는 어땠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트위터의 운동이 현장과 괴리되고 있다는 말에는 의문이 듭니다. 소셜미디어 특성상 조직된 집단으로서 동원력을 가지는 것은 사실상 힘들지만, 여전히 소셜미디어를 통해 홍보되는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오히려 분산되어 있는 사람들을 집결하는 역할을 트위터가 맡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설령 트위터의 운동과 현장이 멀어졌다고 하더라도 이는 트위터 사용자의 연령대 상승으로 인한 사람들 자체의 동력 하락 혹은 조직할 수 있는 주체의 부재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저는 트위터 상의 운동이 가지는 의미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박동수: 트위터의 운동이 또 다른 현장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에스텔: 네. 트위터의 운동이 여전히 현장과 긴밀하게 연관된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사이버 세상도 현장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트위터가 미조직된 사람들을 조직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북동 김이사: 에스텔 님의 말씀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네요. 저는 부산에 사는데 희망 버스와 관련한 트윗을 보고 영도에 가서 연대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사실 트위터는 플랫폼일 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다양한 시민 운동이 여러 측면에서 새롭게 잘 된 부분이 있는 반면 지난 5년 간 퇴보한 부분 또한 있잖아요. 트위터에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이 반영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트위터가 현장성과 결합하기 가장 쉬운 미디어 겸 플랫폼이라는 점, 아직까지 트위터를 통해서 의식화를 거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 아직은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 같은 이슈에 대해서는 트위터의 진보적인 클러스터가 주는 효과가 여럿 있지 않나 싶고,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윤석열 정권 하에서 또 사람들이 데모하러 나가면 그때 트위터가 다시 부상하지 않을까요.

박동수: 그러고 보니 2016년 박근혜 퇴진 운동 당시 트위터 사람들이 다양한 깃발을 만들어 시위에 들고 나가기도 했죠.

성북동 김이사: 네. 그처럼 현장성이 필요한 시위 형태가 다시 나오게 되면 트위터도 다시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요? 사실 지금이라고 무력한 것도 아니고요.

▲2016 박근혜 퇴진시위 당시 '아무깃발대잔치' 행사


트위터를 바라보는 시선


박동수: 트위터에서는 뜨거운 감자인 이슈를 여타 소셜미디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트위터 상의 이슈가 바깥으로 잘 퍼지지 않는 데에는 플랫폼 간의 성격 차이, 이슈를 다른 플랫폼으로 옮기는 과정에서의 왜곡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겠는데요. 특정한 이슈와 관련하여 트위터나 다른 소셜 미디어 이용자 사이의 온도차를 극명하게 느낄 때도 분명히 있고요. 그러한 온도차를 실감한 적이 있으신지, 온도차가 발생하는 것에 대해 어떤 견해를 취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성북동 김이사: 세상은 트위터 밖에 있다는 말도 있잖아요. 질문에 공감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트위터가 정치적, 사회적 소수자가 활동하기 쉬운 소셜미디어인 만큼 트위터 밖으로 나섰을 때 피로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오로지 필요에 의해서만 다른 커뮤니티를 찾게 되었고요. 조금 다른 맥락에서, 트위터 내의 사이버 불링이나 소수자에 대한 혐오 등을 트위터 밖으로 옮겨서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고 정리하는 것이 매우 쉽지 않다는 점도 한 몫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동수: 사실 트위터에서 사이버 불링이 벌어졌을 때 시발점이 무엇인지 등을 파악하기 어렵잖아요.

성북동 김이사: 맞아요. 상황이 전개되면 전개될수록 파악은 더 어려워지는 면이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유저들의 자정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자정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인 입장이기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답답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도 다른 커뮤니티에 비교했을 때, 관리자가 따로 없기 때문에 관리자의 자의적인 해석도 없다는 점에서 상황이 조금 나은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으니까요. 앞으로 더욱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스텔: 트위터와 다른 소셜미디어 사이의 온도 차는 당연하게도 항상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유로 트위터 상의 이슈가 바깥으로 퍼지지 못한다는 말에는 의문이 듭니다. 저는 트위터도 생활 현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트위터의 액티브 유저는 아닐지라도 다른 소셜미디어의 오피니언 리더나 기자 분들도 트위터 눈치를 굉장히 많이 보고 트위터 이야기를 많이 하시기도 하고요. 때문에 어떤 이슈가 트위터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했을 때, 이는 그냥 사안이 트위터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나 문제가 될 만한 것이 아닌지, 이야기하는 특정한 방식이 트위터에 최적화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 궁금증이 먼저 생깁니다. 그리고 오히려 요즘에 트위터 사용자가 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주제의 이야기를 위한 공간이 트위터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페이스북 같은 경우에는 소위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크고 권력 관계가 확실하기 때문에, 그리고 인스타그램의 경우에는 일상의 화려한 순간을 전시하는 데 알맞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벼운 일상 이야기나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기 위해 트위터로 모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동수: 알겠습니다. 이제 마무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두 분 혹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성북동 김이사: 트위터에서 과대표되는 집단이 있잖아요. 계급을 중심으로 파악하자면, 중산층 이상 수도권 거주자들의 목소리가 과대표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거든요. 확실히 트위터가 텍스트 중심의 매체이다 보니 텍스트를 매체에 맞게 가공하는 것도 실은 권력 관계를 설정하는 공정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트위터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어느 플랫폼이나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트위터에 대한 언론의 주목도만큼 트위터가 다양한 이슈를 담아내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사실 플랫폼이 꼭 그래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럼에도 좀 더 균형 있는 목소리를 담아내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저는 트위터를 대략 10년 정도 해 왔는데, 트위터를 꾸준히 이용하는 유저도 물론 있지만 결국 트위터의 주 이용자가 20대 수도권 대학생이 아니었던 적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일종의 수도권 고학력 계층이 트위터의 메인스트림을 차지하면서 무언의 룰 비슷한 것도 많이 만들어지는 것 같고, 암암리에 진입 장벽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자주 실감합니다.

에스텔: 트위터 내의 이슈가 다른 소셜미디어로 옮겨가지 못하는 데는 소셜미디어 간의 성격 차이 뿐만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가령 트랜스젠더 이슈 같은 경우에는 사실 소위 여성 운동 선생님들이 터프(TERF)를, 트랜스젠더 배제적인 흐름을 과소평가한 이유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트랜스젠더를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곳이 트위터이고, 따라서 트위터는 더더욱 그들에게 있어 삶의 현장인데 선생님들, 연구자들은 사이버 공간에서의 영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사이버불링과 그 양태에 대한 이해도 다른 것 같고요.

성북동 김이사: 에스텔 님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저는 그 분들이 안 보는 거지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 시위 현장의 청소년들을 보면서 이 나라의 미래라고 칭했던 것처럼, 그 분들은 트위터 상의 동력 중 일부만 취사 선택하여 보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경우에는 밝은 부분만을 취사 선택한 것이겠고, 트위터는 계통이 정확하지 않고 체계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할 때에는 어두운 부분을 취사 선택하여 보는 것이겠죠. 트위터라는 플랫폼을 입체적으로 사고하려고 하지 않아요.

박동수: 소위 선생님 혹은 연구자 분들이 트위터를 너무 평면적으로만 고려한다는 말이시군요. 트위터 내 유저들의 자정작용에 더해, 트위터를 또 하나의 생활공간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느껴집니다. □




*주
1) 트훔, 트윗 훔치기란 비공계 계정의 트윗을 공개 계정 유저가 공개된 트윗으로 가져오는 것을 뜻하는 용어다.
2) DC인사이드에서 닉네임을 항상 똑같은 것으로 고정해 놓고 쓰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 처음엔 글을 쓸 때마다 닉네임이 변경되는 DC인사이드의 특징에서 기인한 단어이지만, 현재는 게시판 ‘네임드’를 지칭하는 말처럼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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