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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이라는 정의 - <갈매기> (김미조,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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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1. 8. 2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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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는 무엇이 정의(正義)인지 따지기에 앞서 확고한 정의(定義)를 가지고 시작한다. 오복은 노년 여성이며, 오랜 시간 시장을 지켜온 노동자이며, 재개발에 투쟁하는 시민이며, 세 딸을 가진 엄마이며, 성폭력 피해를 겪은 피해자이며, 피해 이전에도 이후에도 삶을 지속하는 존엄한 인물이다. 이러한 정의가 있어야만, <갈매기>는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ACT! 126호 리뷰 2021.08.31.]

 

실존이라는 정의

- <갈매기>(김미조, 2021)

 

 

한솔(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시네마매니저)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알고 있던 나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언젠가(아마도 곧) 오복이 성폭행을 당하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점잖은 상견례 자리, 호쾌한 술자리 모두 불길한 예감을 내뿜었다. 도저히 다가오지 않길 바라는, 차라리 지나갔으면 하는 두려움이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우습게도 성폭행 피해 이후에야 두근거림은 잦아들었다. 물론 또 다른 괴로움이 찾아왔지만. 
  <갈매기>는 오복의 성폭행 피해 현장을 보여주지 않을뿐더러 간접적인 묘사조차 피한다. <갈매기>의 카메라는 현장에 직접 들어가지 않고 대부분 한 곳에 고정되어 있다. 최근 성폭력을 주제로 다루는 영화들은 비슷한 문제의식하에 폭력 현장에 대한 재현을 거부한다. 관음적이고 불필요한 묘사는 지워내고, 피해 이후의 삶과 개인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그 덕분에 시놉시스만으로 심장이 떨리는 나도 성폭력 피해를 말하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때로는 얄팍한 마음으로 이런 의문도 생긴다. ‘그렇다면 성폭력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려는 그 마음은 무엇일까’. 영화를 만드는 감독조차 재현과 구성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 개인적이고도 거대한 폭력이 계속해서 젊은 여성 감독들을 통해 나오는 이유 말이다.
  동시에 나 역시도 부족하게나마 그 마음을 헤아려 볼 경험을 한다. 어쩌면 이는 알게 된 이상 지워낼 수 없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의무감, 책임감. 그러한 단어로 정의할 수도 있지만, 살풀이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잊혀지지 않는 것을 뱉어내고야 마는 마음인 것이다. 더불어 하나의 마음이 더 읽히는데, 이러한 이야기가 일탈성 기행으로만 세상을 돌아다니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 <갈매기> (김미조, 2021)

 

 

  대학에서 듣던 여성학 수업은 매주 수업과 관련된 한쪽 분량의 에세이를 제출해야 했다. 평범한 어느 날, 언제나 그랬듯 에세이를 쓰기 위해 자료를 찾다가 2년 전 발행된 노인 성폭행 피해 실태에 관한 특집기사를 마주했다. 아주 오랫동안 그 기사에 담긴 피해자의 수가, 피해자의 입으로 전해진 가해자의 발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남성 가해자들이 노년 여성을 상대로 성폭행을 저지를 수 있는 주된 이유는 이랬다. ‘노인이면 여자가 아니야?’ 그리고 '말해봐야 아무도 안 믿어.' 

  아무도 믿지 않아서라니. 

  이 영화는 단 한 번도 성폭행 사건에 대한 오복의 서술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복은 동료 상인에게, 둘째 딸에게, 경찰에게, 여러 차례 피해 사실을 말하지만 우리는 그 내용과 방식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오복의 성폭행 사건은 수면 위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솟아 나온 것을 다시 땅에 파묻은 듯이 사라진다. 어느 순간부터는 오복을 믿던 사람조차 믿지 않는다. 오복의 말에 신빙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오복이 계속해서 ‘주장’하기 때문이다. 오복의 말은 증거가 아니고, 사람들은 오로지 증거를 원한다. 오복은 발언하면 발언할수록 불리해진다. 이 때문에 오복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발화의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증거가 되지 못하는 목소리 대신, 물질로 남는 방식 말이다. 그제야 우리는 오복이 직접 사건을 서술하는 현장을 보게 되지만 내용은 역시나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오복이 서술하는 내용은 보이지 않지만, 오복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 <갈매기> (김미조, 2021)

 

 

  <갈매기>를 보고 난 뒤 한국영화에서 노년 여성의 성을 다룬 경우를 떠올려보았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2010년작 <시>에서 미자는 간병 노동 대상인 남성 노인의 부탁에 성관계를 허한다. 2016년 <죽여주는 여자>에서 소위 '박카스 할머니'라 불리는 소영은 노년 남성을 상대로 성매매를 한다. 같은 해 영화 <우리 손자 베스트> 속 청년 극우파 교환은 술에 잔뜩 취한 채 ‘박카스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성관계를 갖는다. 영화 속에서 이들의 존재는 ‘사회 문제’로서 노출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오복의 발화가 투명하게 사라지는 과정을 떠올린다. 이 간극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서사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세상이 노출을 원치 않는 것은 성폭행 피해에 관한 주장이라는 의심이 어쩔 수 없이 따라온다. 아무도 믿지 않는,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가를 받는 성관계’, 흔히 말하는 '자발적 성매매’는 포함이 되지 않는 듯하다. 그 주체가 노년 여성이어도 말이다. 그러나 나는 위의 모든 상황을 자발적 성매매 대신 넓은 범위의 성폭력으로 정의하고 싶다. 엄청난 위력의 강제성이 존재해야만 성폭력이 인정받는다는 것은 동시에 엄청난 위력의 강제성이 존재해야만 피해 여성의 ‘존엄함’이 지켜진다는 것이다. ‘노년 여성의 성폭력 피해’라는 이슈를 바라볼 때 단순히 ‘노년 여성’에만 방점을 찍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폭력 피해’에 ‘노년 여성’이 중첩되어 더욱더 깊이 가려지는 것이다. 성매매 혹은 성폭력에 대한 묘사는 지금 이 시대에 실존하는 문제라는 이유하에 정당화되는데, 그 ‘실재’ 또한 같은 무게로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면 이러한 명분이 언제나 유효하다 할 수 있을까. 성매매 여성이거나, 철저히 유린당한 여성만이 명확하게 재현되는 세상에서 <갈매기>를 비롯한 최근의 여러 시도는 성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간절한 복권의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갈매기> (김미조, 2021)

 

 

  <갈매기>는 그날 밤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오복이 격렬히 저항했는지, 술에 취해 의식이 불명확한 상태였는지, 상대는 무력을 행사했는지, 명백한 의도가 있었는지. 그 어떤 것도 말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 역시 궁금해하지 않는다. 김미조 감독은 이 영화의 본질은 성폭력이 아닌 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 바 있다. 피해의 서사가 아닌 극복의 서사라고 말이다. 이러한 설명은 영화가 가진 이슈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연장 선상에서 존재한다. 당신이 그날 밤 어떤 상태였더라도 당신이 입은 피해는 실재하며, 당신을 끝까지 존엄하게 그려내겠다는 다짐처럼 다가온다. 
  <갈매기>를 보면 개인이 존엄을 찾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언어를 발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특정한 발화가 얼마나 힘이 없는지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이 영화가 존엄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기에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피해 사실이 발화되기만 한다면 누군가의 존엄은 바로 서는 것일까? 무엇을 강간으로 정의하는가? 무엇을 존엄으로 정의하는가? 모든 문제는 동일하게 실재하는가?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사건은 따로 있는가? <갈매기>는 무엇이 정의(正義)인지 따지기에 앞서 확고한 정의(定義)를 가지고 시작한다. 오복은 노년 여성이며, 오랜 시간 시장을 지켜온 노동자이며, 재개발에 투쟁하는 시민이며, 세 딸을 가진 엄마이며, 성폭력 피해를 겪은 피해자이며, 피해 이전에도 이후에도 삶을 지속하는 존엄한 인물이다. 이러한 정의가 있어야만, <갈매기>는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

 


글쓴이. 한솔

얼떨결 극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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