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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되지 않고 겹쳐지는 투쟁 안팎의 삶 - <휴가>(이란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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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1. 11. 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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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해 자신에 주어진 상황을 끌어안고 돌아간 자리에서 재복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는 이제 어디로 향하게 될까."

 

[ACT! 127호 리뷰 2021.11.12]

 

분리되지 않고 겹쳐지는 투쟁 안팎의 삶

<휴가>(이란희, 2020)

 

김서율 (ACT! 편집위원)

   

  통상 노동자의 투쟁을 카메라에 담는 사례를 생각할 때 다큐멘터리라 불리는 양식을 빌려 현장에 카메라를 가까이하는 경우들을 떠올리곤 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장 투쟁 바깥의 삶에는 무엇이 기다릴까. 이란희 감독의 <휴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투쟁하는 노동자의 삶을 조명한다. <휴가>(2020)는 본 영화를 연출한 이란희 감독의 전작 단편인 <천막>(2016)에서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중 한 사람으로 등장했고, 이수정 감독의 <재춘언니>(2020)의 주인공이기도 한 임재춘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희 감독은 이러한 기본 얼개를 가지고 상상으로 살을 덧붙여 새로운 이야기로 재구성하였다.

 

▲&lt;휴가&gt;(이란희, 2020)

 

  <휴가>는 투쟁 현장의 바깥을 탐색하는 영화다. 그러나 덤덤하게 진행되는 영화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휴가>라는 영화가 투쟁만으로 수렴되지 않는 삶도 있다는 것을 쟁점화한다. 그리고 이를 조명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휴가란 몸담고 있던 자신의 터전을 잠시 떠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투쟁의 삶에서 완연히 벗어난 채로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완전히 다른 삶을 모색하기 위한 도피를 뜻하는 건 아니다.

 

▲&lt;휴가&gt;(이란희, 2020)

 

  영화의 주인공 재복은 어디서든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천막--목공소 등의 장소들을 분주히 오가는 그는 투쟁 현장에서 밥을 하고 집회 다니고 농성장을 지킨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개수대가 막혀 음식물이 떠다니는 싱크대를 정리하고 밥하고 청소한다. 딸의 대학 예치금과 당장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친구가 운영하는 목공소에서 일하며, 그곳에서 처음 만나게 된 고아 청년 준영을 돌본다. <휴가>에서 이목을 끄는 부분은 극을 이끌어가는 특정한 사건들이 아니다. 인물들 간의 관계도를 촘촘하게, 유기적으로 엮어내려는 시도에 각별한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 재복이 오가는 농성 투쟁의 현장 안팎에서 사건과 인물 사이의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대한 설명도 생략되어있다. <휴가>는 말하자면 인물과 사건을 상세히 규명하는 선행 관계들을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여백을 한 인물의 행보로 채워나가는 영화다. 그러한 틈새를 자연스레 잇는 건 장소와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재복이라는 인물과 이를 시종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표현하는 배우 이봉하다. 장소를 반복하며 오가는 조촐한 구성이 거의 전부인 영화가 단단하게 다가온다면, 재복의 해명하는 목소리가 아닌 실행하는 몸짓들에서 견고함이 구축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재복은 자신의 입에서 연대라는 말을 힘을 실어 꺼내지 않는다. 도입부 농성 천막에서 간부인 영석과 예정되어있는 연대 일정을 이야기하는 대목을 돌아본다. 재복은 연대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의문을 던지고, 연대만 하다가 결국 성과라는 걸 대체 어디에 냈는지 회의감이 뒤섞인 말로 연신 따져 물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알 수 있다. 휴가를 떠나 집으로 돌아와서 옛 친구의 목공소에서 일하게 된 재복이 일터에서 처음 만나게 된 고아 청년 준영을 대하는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연대가 필요한 대상과 자리에서 누구보다 사심 없이 이를 묵묵히 자연스레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재복은 도움이 절실하지만 혼자 문제를 감내하고 해결해왔어야 했던 준영에게 손길을 묵묵히 건낸다. 좀체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 무뚝뚝한 얼굴로 일관하는 그는 얼핏 행동에 미온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재복은 누구보다 직면하는 문제들을 오뚝이처럼 꿋꿋이 대응하기 위하여 부단히 애쓰는 사람이다. 영화에 담기진 않았지만, 아마도 그는 자신이 당한 부당 해고에 대한 구호를 요청하는 만큼이나 부당한 처우를 받는 수많은 이들을 도와왔을 것이다. 재복은 연대 자체를 불신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다만 취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다는 비관과 체념 속에서 그저 연대해야 한다는 당위만을 말하고 있는 상황에 회의감이 들었을지 모른다.

 

▲&lt;휴가&gt;(이란희, 2020)

 

  이러한 인물의 행로를 곡진히 담아내는 <휴가>의 정조는 차분하다. 그러나 영화의 담담한 정서가 큰 목소리로 투쟁하는 현장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투쟁 이면에 놓인 삶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적절한 진술은 아닌 것 같다. <휴가>를 투쟁하는 사람이 아닌 한 평범한 개인으로 사는 삶도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영화라고 말하긴 어렵지 않을까. 재복은 노조를 설립하고 투쟁에 나섰다는 구실로 해고된 노동자이고, 가정에 신경 쓰지 못하여 사이가 소원해진 딸들과 관계를 원만히 회복하기 어려운 아버지다. 한편으론 양친 없이 혼자 외로이 목공소에서 일하다 다친 준영에게 슬그머니 조심스레 산재 처리를 권유하듯 제시해주는 어른이기도 하다. 이렇게 장소와 사람들을 오가는 재복이라는 인물은 자신의 위치에서 여러 산재한 문제들을 품은 사람이기에, 물론 해고 노동자의 현장 투쟁 이슈로만 정의되진 않는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영화는 한 인물에 깊숙이 자리한 투쟁이라는 문제를 삶에서 지워나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투쟁 안팎을 오가는 삶이 어떻게 한 사람에 겹쳐질 수 있는가를 곰곰이 들여다본다. 이것이 <휴가>라는 영화가 가진 미덕인 건 아닐까. 한편 다른 인물에 관한 영화를 구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여태 농성장을 지키며 밥을 하고 소시지를 볶아서 올려주던 재복의 빈자리를 책임 간부인 영석은 어떻게 메꿔나가고 있을까. 그리고 재복과 더불어 농성장을 잠시 떠난 동료 만용은 휴가를 어떻게 보내게 될까.

 

▲&lt;휴가&gt;(이란희, 2020)

 

  영화의 초반부 농성장 천막의 투쟁 현장에서 전단을 나누어주던 재복은 짧은 휴가를 뒤로 한 채 거리로 다시 돌아온다. 짧은 휴가를 다녀온 재복은 꽂힌 깃발 위에 도시락을 올려보낸다. 재복이 장소를 오가면서 밥을 먹을 때 함께 하던 도시락은 재복과 뗄 수 없는 물품이기도 하다. 연대와 투쟁이 대체 언제 끝날 거냐며 내심 못마땅한 어투로 영화의 처음에 맞불 놓던 재복은 영화의 마지막에 여전히 해결된 것 없는 길 위에서, 도리어 더 큰 물음을 안고서 거리 위에 그렇게 홀로 다시 선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면이 어떤 굳은 확신으로 그윽한 재복의 얼굴이 아니라 더 큰 물음을 안은 채로 위로 솟아오른 깃발을 망연히 바라보는 재복의 뒷모습인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최선을 다해 자신에 주어진 상황을 끌어안고 돌아간 자리에서 재복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는 이제 어디로 향하게 될까.

 


글쓴이.김서율

영화가 삶을 망쳤는지 풍성하게 해주었는지, 여전히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만 같다.

멀고도 가까운 곳에 영화가 있기를 바라면서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관객으로 남고 싶기도 하다. 

사회 문제와 운동 전반에 관심이 많아 현장 조직 활동에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어쩌다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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