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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 공유지 활동가로써 다큐멘터리 제작을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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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20. 9. 29.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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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지가 없어졌을 때에는 세상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다시 책상 앞에 앉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내가 알던 세상이 하나 사라진다고 해도 또 다른 세상은 계속될 것이란 것을. 
그리고 또 다른 세상을 위해 사라진 세상을 계속 기억하고 반추해야만 한다는 것을."
[편집자 주] 본디 땅 위를 지나던 경의선이 2000년대 들어 지하화 된 이후 철도가 지나던 자리는 빈 공터가 되었습니다. 공공의 소유였던 이 '공유지'는 한국철도시설공단이 대기업에 사용권을 넘겨주면서 흔한 상업적 개발의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난 2016년,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은 시민들이 장터도 열고, 자율적으로 활용하던 이 공간을 시민의 공간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공덕역 인근의 공유지를 점거(squat)했습니다.

시민행동은 경의선 공유지가 쫓겨난 세입자들, 독립적인 문화예술인과 시민들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가건물과 텃밭을 지어 활동을 펼쳐 왔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국토교통부의 억대 소송으로 인해 활동이 중단되었고, 자리는 다시 공터가 되었습니다. 몇년간 경의선 공유지에 함께하며, 이 공간을 기록하고자 처음으로 다큐멘터리에 도전했던 미어캣님의 에세이를 싣습니다.

 

 

[ACT! 122Me,Dear 2020.10.14.]

 

경의선 공유지 활동가로써 다큐멘터리 제작을 한다는 것

 

 

미어캣(기후위기비상행동 활동가)

 

▲  축제가 열리기도 했다가 시장이 되기도 하고 체육대회도 하고 워터파크도 되는 경의선 공유지

 

 

온갖 실험의 장이자 스쾃의 공간인 경의선 공유지를 만났다

 

  삶은 가끔씩 나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인도한다. 경의선 공유지를 만난 것도, 또 만나기 이전에 일어났던 일들도 나의 삶에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왔다. 몇 번의 클릭과 동시간대 만났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제안 등으로 어느 날 경의선 공유지에서 활동가를 하게 되었다. 그 전에는 상가세입자로서 강제퇴거에 맞섰던 우장창창, 재개발로 인해 철거 위기에 놓인 옥바라지 등 다른 연대현장에 숱하게 갔지만 경의선 공유지는 조금 달랐다. 경의선 공유지는 텅 비어있는 공간,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공간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무엇이든 해봐라, 라고 하면 더 어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의 사람이다. 이곳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사람들과 으샤으샤 여러 가지 일들을 벌였다. 멀리 가지 말고 여기서 놀라며 공간 한 쪽에 물총과 물풀장을 가져다 놓았고, 가운데 흙마당에는 여러 작물을 심었고, 아이들을 위한 저예산 놀이터를 만들기도 했다. 음악가들이 모여 음악페스티벌도 열고, 예술가들의 장터도 열었다. 이 공간은 아무것도 없지만,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나는 그 공간을 가꾸고 행사를 열어 사람들을 초대했다. 어떤 사정이 생긴 사람들도 경의선 공유지로 왔다. 그렇게 공간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파티도 하고 반상회도 하고 우리는 가족처럼 친구처럼 음식을 나눠먹고 웃고 울으면서, 또 다투기도 하면서 그렇게 4년이 흘러갔다.

 

▲ 주민의 민원으로 인해 2019년 7월 갑자기 마포구에서 펜스를 치러 왔고, 사람들과 함께 막아내었다. 경의선 공유지에서 텃밭을 가꾸는 분도 계셨고, 푸드트럭과 함께 물놀이장을 열자 많은 시민들이 경의선 공유지에 방문하기도 했다.

 

 

경의선 공유지라는 공간의 시작. 그리고 공유지를 둘러싼 시선의 차이

 

  사실 경의선 공유지는 경의선 철길이 다니던 곳이었다. 경의선이 경의중앙선으로 지하화 되면서 남는 긴 부지가 있었고, 70%는 경의선 숲길로 30%는 개발부지로 남겨두던 곳 중의 하나였다. 다른 곳들은 숲길 공사를 하는 동안 펜스로 가로막혀 들어갈 수 없었지만, 경의선 공유지만은 폐쇄하지 않고 늘장이라는 이름의 시민시장으로 3년 정도 공간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숲길이 완공되고 계약기간이 끝났으니 이제는 나가라는 내용의 퇴거 명령 공문이 왔다. 몇몇 사람들은 그 공문에 불복하고 이 땅이 국공유지라면 대기업의 이익이 아닌 시민 모두의 땅으로 남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스콰팅을 시작했다. 나는 집이 멀지 않았고 가끔 늘장에도 참여를 해서 물건을 팔거나 구경을 했기 때문에 이 문제제기에 함께 참여했다가 활동가가 되었다. 이후 굴레방다리에서 쫓겨난 아현포차 이모들과 청계천 두꺼비 유산화 대표, 주거난민 희성씨 등 도시에서 오갈 데 없는 이들이 모여 경의선 공유지를 '26번째 자치구'로 선언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서 복작복작 4년을 함께했다.

 

  언제나 내 고향 같았던 경의선 공유지였지만, 이 공간을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땅이 너희 땅도 아닌데 무단으로 점거해서 지저분하게 사용한다, 시끄럽다, 술을 판다며 계속해서 민원을 넣었다. 공유지 바로 옆, 새로 생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계속 함께 하자고 했지만 그들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관계였던 것 같다. 모 부동산 커뮤니티에서 공유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자유시장경제를 파괴하는 악의 축이라고 비난하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그 게시물엔 마당에 드러누워 웃고 있는 내 사진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우리는 본인들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거대한 악의 축이었나보다. 물론 우리들에게 호의적인 주변 주민들도 있었다. 마당에 작물을 심어서 텃밭을 가꾸고, 가끔 아이들을 데려와서 노는 주민들도 계셨다. 경의선 공유지에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는 분도 계셨고, 이모네에 자주 와서 그냥 하루 종일 앉아계시는 분도 계셨다. 그렇게 경의선 공유지를 둘러싼 여러 시선의 차이들이 존재했었다. 공유지는 무언가 한 가지 언어로 정의내리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 공유지는 이 도시에서 가장 생동감 있고 실험적이고 흥미롭고 대안적인 곳이었다.

 

▲ 경의선 공유지에서 내가 했던 일은 공간을 관리하는 일과 홍보였다. 팟캐스트 ‘커먼커먼커먼즈’를 제작했고, 분기별로 ‘경의선공유지신문’도 제작했다.

 

 

경의선 공유지 다큐멘터리를 만들자고 결심했다

 

  어느 행사에서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오던 길이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는 잔뜩 고양되어 있었다. 문득, 경의선 공유지도 이대로 사라지면 어떡하지, 아무것도 남지 않고 그대로 증발되어 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 이유는 그런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공유지에 와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노라 호언장담하고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한 번도 만들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무조건 모든 장면을 카메라에 담다가 지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4개월짜리 다큐멘터리 제작 수업을 보게 되고, 수업에 등록해서 열심히 배웠다. 하지만 배울수록 다큐멘터리는 어려운 것이었다. 무작정 찍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편집할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계획이 있어야 했다. 계속 기획서를 써서 내고 수정을 하고... 3명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려고 했지만 그것 또한 진부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와중에 경의선 공유지에 국토부가 보낸 소송장이 왔다. 4년 동안 우리가 이 공간을 차지한 댓가인 36억 원을 내라는 내용이 담긴 소송장이 말이다. 경의선 공유지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나중에 합류한 희망시장 상인 분들도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겪은 일들과 생각들

 

  일단은 그래도 공유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찍어야겠기에 매일 출근을 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카메라를 들었다. 행사가 있는 날에는 열심히 행사를 찍었다. 공유지에서 눈에 보이는 일들은 쉽게 찍을 수 있었지만,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일들도 많았고 그것을 담는 일은 어려웠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들이 있다보니 다툼도 있었다. 시비가 붙으면 나와 활동가들은 그 싸움을 말리느라 진이 빠졌고, 서로를 중재하느라 힘들었다. 다큐멘터리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봐야 객관적으로 잘 찍을 수 있다고 하지만 난 이미 공유지 안의 여러 사람들과 친분이 두터워져 있는 상태였다. 거인이모와 심정적으로 가까워져서 거인이모를 자주 찍었고, 이모는 카메라 앞에서 곧잘 눈물을 보이곤 했다. 나는 찍으면서 이모를 달래드렸지만, 집에 와서는 나도 경의선 공유지가 없어진다는 사실에, 또 내가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많이 울적해하고 눈물을 흘리곤 했다. 감정적인 분리가 힘들었다. 다큐멘터리 수업에 제출할 최종본을 편집했지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활동가일까.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이어야 할까. 하는 정체성의 고민에 빠진 적도 있었다. 누군가 싸우고 있을 때 그것을 말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찍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활동가가 아니었다면, 다큐멘터리를 객관적인 시선에서 더 잘 찍고, 잘 편집할 수 있었을까? 사실 영상을 보는 게 괴로웠다. 이모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최종본을 편집해서 제출하고 나서는 좀 더 편집하면서 영상을 다듬는 일에 손을 놓고 말았다.

 

▲ 경의선 공유지 공식적으로 마지막 활동 날, 휑한 경의선 공유지에서 다같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내가 편집한 다큐멘터리 최종본을 보았다.

 

 

내게 남겨진 몫

 

  경의선 공유지는 2020426일부로 공식적 활동을 종료했다. 마지막 날에는 컨테이너도 빠지고 이모도 트럭에 짐을 싣고 나가 복작했던 공간이 매우 휑했다. 그 다음 날 아침부터 경의선 공유지를 둘러싸고 펜스가 쳐졌고, 펜스 내부에는 4년 동안의 우리가 가꾸었던 모든 것들이 지우개로 지워진 것처럼 싹하고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 곳은 빈 공터가 되었다.

 

  나는 공유지 활동을 그만둔 뒤로 공허함을 이겨내고자 더 많은 활동을 했다. 디지털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도 열심히 참여했고, 기후위기에 관한 시위에도 참여했다. 활동 제안을 덥석 받고 여기저기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지역 활동도 경의선 공유지에서 활동할 때보다 더 열심히 했다. 공유지라는 작은 세상에 있다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저기서 활동을 할 수 있는 힘과 토대를 마련해준 것은 공유지에서의 활동이었다. 그때 느꼈던 감각, 감정, 경험, 추억 등등. 그 무한한 가치를 가졌던 공간은 그렇게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이렇듯 나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스쳐간 사람들에게도. 공유지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했다. ‘대안이라고 말하는 무수히 많은 것들 중 경의선 공유지만큼 대안적이고 실험적인 공간이 있었을까. 내 역량으로 그 공간의 가치를 다 담아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

 

▲  4년 동안 나는 경의선 공유지에서 많은 것을 경험했다 .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이 내게 남겨진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 경의선 공유지라는 공간이 있었다고. 거기엔 어떤 사람들이 있었으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 공간은 이 사회에 어떤 의미였는지. 나에게 숙제처럼 남아있다. 이제 경의선 공유지 다큐멘터리 편집을 다시 시작해 봐야 할 것 같다. 공유지가 없어졌을 때에는 세상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다시 책상 앞에 앉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내가 알던 세상이 하나 사라진다고 해도 또 다른 세상은 계속될 것이란 것을. 그리고 또 다른 세상을 위해 사라진 세상을 계속 기억하고 반추해야만 한다는 것을.

 


글쓴이. 미어캣

- 여기저기 활동가. 지금은 기후위기 비상행동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만들고 영상도 만듭니다. 최근엔 비건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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