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의 코로나 공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누군가에게는 갑자기 줄어든 수입으로, 누군가에게는 노골적으로 다가오는 적대감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시에나 볼 법한) 사재기로."
[ACT! 121호 미디어인터내셔널 2020.08.14.]
주관적인, 극히 주관적인 코로나 이야기: 독일 버전
김지(다큐멘터리 감독)
장면 1.
3월 초. 저녁 요리를 시작할 즈음, 룸메이트 중 한 명인 A가 사색이 되어 부엌으로 들어왔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다음 주, 다음 달로 예정된 일자리들이 모두 취소되었다며, 집주인에게 월세를 임시로 낮춰달라는 메일을 쓸 계획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통장 잔고) 안부를 묻는 A. 평소 같으면 어색한 상황이 되었겠지만, 지금은 ‘평소’가 아니니 통장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우리는 베를린 시의 프리랜서 생계보조금에 대한 이야기로 훈훈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장면 2.
3월 중순. 지하철에 탄 직후, 누군가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와 5미터는 족히 떨어진 곳에 앉은 백인 할머니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마치 걸어 다니는 바이러스를 보고 있는 듯한 그 눈을 나 역시 피하지 않고 바라봐주었다. 같이 탄 (백인) 친구가 함께 쳐다보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어르신은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장면 3.
4월 초. 언젠가부터 슈퍼마켓에 가면 가장 먼저 들러야 하는 곳이 있다. 바로 화장지 코너. 오늘도 화장지 코너는 텅 비어있고 A4 용지에 인쇄된 알림만 붙어 있다. ‘화장지는 1인당 최대 2 패키지만 구입해주시기 바랍니다.’ 대체 왜 사람들은 화장지를 사재기하는 걸까.
독일에서의 코로나 공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누군가에게는 갑자기 줄어든 수입으로, 누군가에게는 노골적으로 다가오는 적대감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시에나 볼 법한) 사재기로. 독일의 뉴스와 신문은 매일 ‘코로나’ 혹은 ‘COVID’로 가득찼고, 아시아인들을 상대로 한 인종차별 사건들도 비교적 상세하게 다뤄졌다. 다만 기사에서는 언제나 ‘왜’가 빠져있었다. 언제, 어떤 도시에서, 어떤 말로 혹은 어떤 행동으로, 아시아인(들)이 피해를 입었는지 이야기하면서도 그 이유는 단지 ‘아시아인으로 읽히는 외모’로 돌려졌다.
독일의 언론매체들은 코로나 공포가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로 이어지는 그 연결 고리의 근본적인 이유를 묻지 않았다. 독일인들의 아시아인에 대한 인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도 있었던 사건들은 조회 수를 늘릴 만한 기사 제목으로, 피해를 본 아시아인이 ‘나는 바이러스가 아니’라(는 당연한 이야기만 반복하)는 인터뷰 기사로만 남았다.
심지어 인종차별적인 행태를 보이는 언론도 있었다. 코로나 관련 기사에 마스크를 쓴 아시아인의 사진이 삽입되어 있다든지, TV 쇼에서 ‘풍자’라는 미명 하에 ‘쿵푸 펜더가 중국 식당에서 밥을 먹다’ 따위의 시사 개그(...)를 선보이는 것은 양호한 편에 속했다. 「Blid」 등의 황색 언론들은 코로나를 중국 정부 탓으로 돌리는 기사를 연이어 써내면서 반 아시아 정서를 조장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비일상은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 베를린에 거주지를 둔 약 14만 명의 자영업자 및 프리랜서들은 3월 말과 4월에 걸쳐 (개인의 경우) 5천유로의 생계보조금을 시로부터 일시에 지원받으면서 동시 패닉 상태에서 벗어났다. 갑자기 문을 닫게 된 베를린의 클럽들은 ‘United We Stream’이라는 연대체를 만들어 「ARTE」 채널과 함께 스트리밍 파티를 매일 저녁 7시부터 내보내기 시작했다. 집에 갇힌 사람들도 ‘Zoom’ 속의 다른 클러버들과 함께 랩탑 앞에서 춤을 추는 일상에 익숙해졌다.
영화관도 물론 문을 닫았고, 대부분의 영화제는 취소되었다. 그 와중에 일부 중소 규모의 영화제는 온라인으로 전환하면서 오히려 더 많은 관객을 확보하는 경우도 있었다. 매년 5월 뮌헨에서 열리는 ‘Dok.fest München’이 그 대표적인 예로, 관객 수가 2019년 54,000명에서 2020년 75,000명으로 크게 늘었다. 특히 제작자들을 위한 온라인 워크숍과 패널 토론에는 700여 명의 관계자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위협적일 만큼 불안정한 생계를 일시적으로 경험한 사람들 사이에서 국가의 역할과 기본 소득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실 기본 소득 논의는 이전부터 있었고 관련 단체도 다수 있지만, 코로나 위기는 ‘삶은 각자의 책임’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조건 없는 기본 소득의 중요성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6개월 간 매월 800~1200유로의 조건 없는 정부 지원을 요구하는 온라인 청원에 47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서명했고, 17만여 명의 독일 시민들이 의회에 기본소득 법안 제정을 요구하는 청원을 제출하기도 했다.
독일의 상황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그나마 나은 편이라서, 6월부터 조금씩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2차 감염 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고 있지만 말이다.) 6월 말부터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고, 반강제로 아이 돌봄과 재택근무를 동시에 해야 했던 사람들도 직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직 클럽에는 가지 못하지만, ‘Black Lives Matter’, 주택난, 기후 변화 등의 주요 이슈를 위한 시위도 (사회적 거리두기와 함께) 열리고 있다.
마스크와 사회적 거리두기가 없었던 그 시절로 한동안 (어쩌면 영영)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삶을 이어가는 방법을 다시 익혀가고 있다. 이 놀라운 생존 능력의 밑바탕에는 코로나 위기가 확산될 무렵 안부를 물으며 서로를 진심으로 걱정했던, 소소한 연대의 기억이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닐까. ☐
▮자료 출처
https://www.korientation.de/corona-rassismus-medien/
https://unitedwestream.berlin/
https://www.dokfest-muenchen.de
▮덧
1) 집주인은 A의 메일에 답하지 않았다.
2) 화장지 사재기 미스터리는 아직 풀지 못했다.
글쓴이. 김지
- 6개월만 경험해보겠다며 시작한 독일 생활을 6년째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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