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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지 마세요, 현기증 나니까 - 백다빈(필름다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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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9. 10. 5.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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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틱 스페이스를 만들고 싶다. 영화를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보고 싶으면 보고, 만들고 싶으면 만들 수 있는 공간 말이다."

 

[ACT! 116호 인터뷰 2019.10.17.]

 

"말리지 마세요, 현기증 나니까" - 백다빈(필름다빈)

 

차한비(ACT! 편집위원)

 


  때로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고 때로는 있는 대로 버티며, 어느덧 필름다빈은 5년차에 접어들었다. 1인 배급사라는 점이 믿기지 않을 만큼 왕성한 활동을 자랑하는데, 최근에는 단편영화 배급 및 상영과 더불어 장편영화 개봉과 제작에도 구체적 가닥을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성북구에 위치한 ‘공간 현기증’에서 필름다빈의 백다빈 대표를 만났다. 이곳 또한 필름다빈이 커피코와 합심하여 지난 6월 문을 연 공간으로, Cinematic Space(시네마틱 스페이스)라는 모토를 내걸고 있다. 커피와 술, 비건브레드 등을 판매하며, 다양한 영화를 상시 상영하는 곳인데, 한쪽 구석에는 백다빈 대표의 컴퓨터가 놓인 사무실이기도 하다. 현기증이라는 이름은 히치콕의 영화에서 따왔다. ‘내 인생의 영화’ 리스트를 쭉 나열하고 그중 <이다>(파벨 포리코브스키, 2013)와 고민하다가 정했다고 한다. 앞쪽 스크린에서는 영화가 상영되고 손님들은 영화를 보거나 대화하며 커피를 마셨다. 그 사이에서 백다빈 대표와 마주앉아, 그가 지닌 여러 갈래의 꿈과 고민을 잠시 나누었다. 

▲ 공간 현기증 앞에서 백다빈 대표 


= 1인 대표로써 배급사 필름다빈을 2015년부터 운영해왔다. 원래 뭐 하던 사람이었나.
- 영화를, 아니 영화보다 극장이라는 공간을 좋아하던 사람이다. 어릴 때 마을버스를 타고 극장에 다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다. 넓은 공간에 혼자 앉아서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영화를 보는 시간이 참 좋더라. 마치 딴 세상에 온 느낌이었다. 진짜 좋은 영화를 보면 눈앞에서 마법이 벌어지거나 술에 취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나. 서울극장에서 개봉작을 보고 동네 비디오 가게를 들락거리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자연스럽게 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연출을 전공했다. 

= 어떤 계기로 필름다빈을 시작했나. 첫 배급작은 어떻게 만났는지도 궁금하다.
- 대학 졸업 작품을 만들기도 했는데 여러 고민 끝에 연출이 아닌 다른 길을 고민하게 되었다. 소위 ‘현장문화’라고 부르는 분위기도 싫었고, 내가 연출자로서 적절한 자질을 지녔는지도 의문스러웠다. 둘 중 하나는 충족해야 업으로 지속할 수 있겠더라.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아니면 외부의 평가가 상관없을 정도로 열정이 넘치거나. 결국 연출을 관두겠다고 결심했지만, 그렇다고 ‘영화 일’로 먹고사는 삶에 대한 꿈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앞서 말한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르더라. 극장과 밀접하게 연계된 일을 하고 싶었고, 당장 주변 친구들은 배급사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다. 내 영화를 출품했던 경험을 토대로 2015년에 같은 과 동기와 후배들의 단편작품을 서른 편 가까이 배급했다. 2016년에 처음으로 학교 외부 작품을 배급하고 영화제를 경험하면서 시야가 조금씩 넓어졌다. 애초 이 일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뚜렷한 의지를 갖고 시작하지는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목표가 생기기도 하고 고민도 구체화되었던 것 같다.

= 단편영화 배급사로써 국내외 영화제 출품에 참여하고, 직접 기획전을 개최하여 작품을 소개하기도 한다. 업무량과 노동 강도에 비해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기에는 어려운 구조인데, 어떻게 지속해오고 있나.
- 현 시점에서 기획전은 무조건 적자라고 봐야 한다. 250석 극장이 매진되어야 수익이 발생하는 구조이다. 얼마나 버느냐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데, 부정도 긍정도 안 하는 편이다. 못 번다고 하는 것보다야 그냥 벌 만큼 번다고 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기도 하고. 어쨌든 필름다빈이 사업체로서 유지될 수 있던 배경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1인 대표로써 인건비를 최소화해온 것이고, 둘째는 후원이다. 후원자는 대학교 선배인데, 말 그대로 금전적 지원을 담당하고 필름다빈의 운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사실상 현재 필름다빈은 두 명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고 봐야 한다. 경제적으로는 스폰서인 선배에게, 시간 면에서는 이곳 ‘공간 현기증’을 함께 운영하는 홍미정 씨에게 기대는 상황이다. 

= 최근 커피코와 ‘공간 현기증’을 열며 “좋아하고, 하고 싶었던 일을 지치지 않고 지속하고 싶었습니다.”라고 이유를 밝혔다. 관련해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 몇 년 전부터 ‘할 거야’라고 말했다. 시작하기가 쉽지는 않았는데, 사실 10년 준비해서 한다고 1년 준비할 때보다 잘 되리란 보장이 없지 않나. 그냥 시작하면 시작인 거구나 싶더라. 일단 단순하게 내 공간, 우리 공간이 필요했다. 배급작도 자유롭게 상영하고, 나와 관계 맺은 이들도 마음 편히 방문할 수 있는 일종의 아지트를 꿈꾸었다. 필름다빈이라는 브랜드를 떠올릴 때, 대표적인 배급작 뿐만 아니라 공간도 함께 연상되길 바랐다. 말하자면 필름다빈의 브랜드 가치를 알리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영화를 자유롭게 상영하는 사무실을 생각하다가, 차차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하면서 커피도 팔고 술도 파는 공간으로 정리했다. 비슷한 일을 해본 경험이 없다 보니 걱정스러웠는데, 고민을 거듭하다가 커피코와 동업을 결정했다. 2016년 무렵부터 커피코에서 상영회를 진행했다. 미정 씨는 워낙 오랜 시간 동안 지켜봐온 동료이기에 한편으로는 더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람이라면 갈등이 생겨도 잘 풀어낼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기더라. 더불어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작업하고 행사를 개최해온 커피코와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시너지를 낼 수 있겠다는 기대도 있었다. 이제 오픈한지 4개월 차에 접어들었는데 아직까지는 ‘존버’는 승리한다는 정신으로 간신히 월세를 내며 버티는 중이다. (웃음) 나나 미정 씨에게 이 가게가 생계와 직결되는 상황은 아니어서 다행히 내구력은 있는 편이다. 

▲ 공간 현기증 



= 당신이 말하는 브랜드 가치란 무얼 의미하나. 필름다빈이 지향하는 목표와도 연결된 이야기처럼 들린다.
- 막연하지만 신뢰가 가는 브랜드로 성장하고 싶다. 예컨대 냉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굳이 외식할 때 냉면을 고르지 않는데, 어느 날 신뢰할 만한 친구가 “이 식당의 냉면은 정말 맛있다”며 맛집을 추천해주는 거다. 친구가 워낙 미식가이다 보니 미심쩍지만 한번 가보게 된다. ‘그래, 걔라면 추천한 이유가 있을 거야’ 라는 마음으로. 이런 이야기와 비슷하다.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가 아니더라도, 잘 모르는 영화라고 하더라도, 필름다빈이 선택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어주길 바란다. 어떻게 보면 창작자가 못하는 영역을 내가 하려는 거다. 평론가가 비슷한 역할을 해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작품을 증명하는 매개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평론가가 글을 쓴다면, 나는 상영회를 열고 공간을 조성한다. 이 과정에서 브랜드가 신뢰도와 함께 신선한 에너지를 계속 가져가기를 바란다. 청년, 청춘과 같은 활기를 유지하고 싶다.

= 극장에 매료된 유년기를 시작으로 현재 ‘공간 현기증’을 열기까지, 당신에게는 공간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해 보인다. 최종적으로 어떤 공간을 상상하고 기대하나.
- '시네마틱 스페이스'를 만들고 싶다. 영화를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보고 싶으면 보고, 만들고 싶으면 만들 수 있는 공간 말이다. 내가 ‘영화적’이라는 단어를 나름 정의할 수 있게 되면, 그에 부합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적 공간에 관한 기대와 필요를 줄곧 지녀 왔다. 이를 위해 경력을 쌓는 동시에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외부 압력에 굴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더라. 일정 자본을 가진 상태여야 환원도 가능해지고. 돈이란 것이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1순위 목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2순위는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 필름다빈을 시작할 당시에는 배급을 업으로 삼으려는 큰 결심은 없었다고 했지만, 지금은 꽤 분명한 계획과 책임을 가진 듯하다.
- 시간이 지날수록 전업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일을 하는 입장에서 좌절하지 않으려면, 결국 두 가지가 어느 정도 충족되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에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어야 하고, 금전적인 보상도 필요하다. 상업적 활동에 더하여 내 일 또한 예술의 한 영역이라고 스스로 느끼기를 원한다.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이 일을 초라하거나 보잘 것 없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싶더라. 필름다빈 운영자로서 나는 디자인을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공간에서 어떤 배치로 어떤 영화를 어떤 조합과 순서로 보여줄 것인가. 그 모든 과정이 일종의 디자인이라고 느껴진다. 

= 극장뿐만 아니라, 카페와 소규모 대관시설 등 여러 곳에서 상영회를 진행하는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인가. 
- 맞다. 극장도 공간마다 다르고, 새로운 문화공간을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로서는 같은 작품을 여러 차례 볼 수밖에 없는데, 어디서 관람하느냐에 따라 작품이 다르게 다가오더라. 상영회를 찾는 관객 또한 공간에 따라 다른 성격을 갖는다. 이를 통해 다양한 관객을 만나고 새로운 반응을 마주할 때 즐거움을 느낀다. 특히 단편영화는 단독으로 상영하기보다는 여러 편을 묶어서 상영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기획 의도에 따라 관객에게 가닿는 의미 자체가 많이 달라질 여지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런 부분에 책임감을 갖는 동시에,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할수록 만족도도 올라가는 것 같다. 

▲ 백다빈 필름다빈 대표 



= 일에 권태를 느낀 적은 없나. 제한된 자본 내에서 반복적인 업무를 수행하다 보면,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있으리라 짐작한다.
- 권태라기보다는 두려움이 조금씩 커지는 상황이다. 곧 제작을 시작하려고 한다.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보니, 뭔가를 놓치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가 생기더라. 어떤 정해진 틀에 갇히고 싶지 않다는 욕구가 있다. 그냥 늘 하던 대로 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게 싫다. 경력을 쌓고 일의 영역을 점차 확장해나간다고 하더라도, 마인드는 젊게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 신선한 에너지를 유지하고 싶다고 말한 것과 연결되는 이야기인 듯하다. 자리를 잡고 싶은 욕구와 안정성에 기대지 않으려는 욕구가 충돌하는 것인가.
- 말하자면 ‘이대로 전형적인 세계에 합류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두려움이 공고해질수록 안정적인 방식을 택하게 되리라는 걱정도 든다.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커지는 것 같다. 일이 늘어나고 교류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평가에 예민해지기도 한다. 평가라는 것 또한 시간이 쌓일수록 늘어나는데, 좋은 평가만큼 부정적인 평가도 섞이기 마련이지 않나. 한두 번 안 좋은 얘기가 들려오면 엄청 신경 쓰인다. 필름다빈이라고 하면 기존에 없던 방식을 고민하며 소위 ‘청춘영화’를 지향한다는 인식이 강한데, 장편배급이나 제작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에서 “결국 쟤도 제도권 내에 포함되려고 하는 구나”라는 시선을 받을까 봐 압박감을 느낀다. 물론 제도권에 진입한다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이 아닌데,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철들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있는 것 같다. 어느 때보다 동료가 필요하다. 최근 직원 한 명이 들어오기는 했는데, 사실상 급여와 같은 여건이 되지 않다 보니 실질적으로 주요업무는 계속해서 혼자 처리하는 형편이다. 의사결정을 빠르게 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고민을 나누고 토론할 동료가 없다는 데에서 기인하는 불안이 있다. 어쨌거나 좀 더 마음을 다잡고 가야 할 시기인 것 같다. 한참 힘들어하는 나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하더라. “너는 머리는 나쁜데 기세로 가는 편이다”라고. (웃음) 맞는 말 같다. 이것저것 저지르며 헤쳐 왔던 것처럼 계속 하다 보면, 때로는 진부하고 때로는 신선하게 해나갈 수 있겠지.

▲  <오늘, 우리> 포스터 



= 필름다빈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소개말에 “단편영화는 물론 장편영화의 제작 및 배급으로까지 업무 영역을 확대”하겠다는 내용이 있더라. 이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시동을 거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 처음부터 독립영화라든가 단편영화 배급사라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았다. 독립영화라는 기준 자체가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단편영화의 배급으로만 일을 한정짓고 싶지도 않았다.  좋은 영화는 그저 좋은 영화라는 표현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단편에 집중한 이유는 현실적인 여건과 동시에 단편을 하나의 작품으로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반발을 느껴서였다. 장편영화는 아주 오래된 영화도 ‘고전’이라는 위치에 오르며 돈을 지불하고 관람하지 않나. 단편영화는 마스터피스라고 찬사를 받는다고 해도 2-3년 지나면 사라져버린다. 한편으로는 창작자조차 단편을 장편으로 가는 징검다리 정도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제든 상영회든 단편을 관객에게 봐달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사기처럼 느껴졌다. 단편영화로 돈을 벌고 먹고사는 사례가 되고 싶었고, 그 단계를 넘어서면 장편도 하겠다는 취지로 썼던 것 같다. 초기부터 대략 그림은 있었다. 올해 10월과 12월쯤 장편을 개봉할 예정이다. 앞으로 1년에 평균 3편 정도는 장편 개봉을 시도해볼 계획이다. 앞서 말했듯 제작도 준비 중인데 최대한 신중하게 스텝을 밟아나가려고 한다. 그릇에 알맞게. (웃음) 첫 개봉은 단편 옴니버스로 구성해서 진행한다. 아무래도 시작은 단편으로 하고 싶더라. <2박 3일>(연출 조은지) <5월 14일>(연출 부은주) <환불>(연출 송예진) <대자보>(연출 곽은미) 총 네 편의 단편을 엮어서 <오늘, 우리>라는 제목으로 10월 31일 개봉한다. 12월에는 정가영 감독의 신작 <하트>를 개봉할 예정이다. 본격적으로 제작을 시작하면 배급사 대신 영화사라는 타이틀을 가져가려고 한다. 

=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 좋은 영화랑 관련된 일이면 일을 유연하게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제를 개최할 수도 있고, 프로그래머가 될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난 후에는 강의를 하고 싶은 욕심도 있다. 뭐가 되었든 계속 영화를 하고 싶다. 나중에 늙어서도 내가 지금처럼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 시간을 즐겁게 느낀다면 좋겠다. 삶이 힘들어져서 영화를 미워하거나 원망스럽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때도 여전히 낄낄대면서 영화 보는 삶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 필름다빈
- 홈페이지 https://www.filmdabin.com/
-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film_dab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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