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얼굴에서 풍경으로 - 영화 <김군> 리뷰

전체 기사보기/리뷰

by acteditor 2019. 8. 9. 10:47

본문

"<김군>이 복원해나가는 것은 반대진영의 이미지에 소거된 인물들 간의 관계이며 5・18 의 기억과 공동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ACT! 115호 리뷰 2019.08.14.]

 

얼굴에서 풍경으로
- 영화 <김군> 리뷰


강새힘

▲ <김군>(강상우, 2018)


  광주의 그날, 사건의 당사자들에게 감춰진다는 건 필사적인 문제였다. 몇몇은 사진에 찍히는 것을 거부했고 몇몇은 복면을 쓰고 거리에 나왔다. 서로의 이름을 물어보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신원이 파악되면 죽음에 가까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사진 속에 포착된 인물의 정체를 파헤치려 애쓰는 세력이 있다. 극우 성향의 논객 지만원은 시민군의 얼굴을 북한 고위 인사의 얼굴과 연결하며 북측의 5・18 개입설을 주장한다. 상대의 근거지를 비추는 데서 출발한 <김군>의 전략은 전면적이다. 그날의 궤적을 다시 추적해 얼굴의 제 주인을 드러내는 것. 기억의 목적도, 기념의 목적도 아닌, 낙인의 목적으로 소환된 얼굴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 말이다.

  얼굴의 간격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기하학적 방법’이 추려낸 북한군 후보 가운데 <김군>이 추적하는 것은 제1광수, 현장의 선봉장에 서있던 인물이다. 그에 대한 증언은 그가 생존한 시민군이라는 주장과 사망했다는 주장으로 갈린다. 시민군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했던 주옥 가족은 그가 다리 근처에 거주하며 쓰레기를 줍는 넝마주이였으며, 고아였던 그는 사건 이후 사라졌다고 진술한다. 한편 당시 시민군 중 한 사람은 얼굴의 유사성에 기반해 그를 생존자 이강갑이라고 주장하지만, 당사자의 기억과 사실관계가 맞지 않을 뿐더러 지목인을 지켜본 동료 또한 가설을 부정한다. 김군의 종적과 연관된 송암동 학살 사건을 경험한 최진수의 증언으로부터 추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최진수는 김군과 함께 계엄군에 체포되어 바로 옆에서 그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내놓는다.  
 
  일련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집된 증언들은 그날의 사건을 재구성하며 한사람의 행방을 넘어서는 장을 개방한다. 지만원 측이 과거에 기록된 이미지만을 가져왔다면, <김군>은 현재의 얼굴과 목소리, 기억을 통해 이미지의 특정성을 확보한다. 이때 지목인들의 실존은 당시에 포착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재현된다. 영화는 과거의 정지된 이미지에 현재의 목소리와 시선을 덧입히고, 현재의 얼굴을 가까운 거리에서 담아내고 있다. 증언들은 과거의 이미지를 보충하며 결여된 그날의 기록을 촘촘한 서사로 채워나가고, 카메라는 증언의 주체들을 클로즈업 쇼트로 포착하며 새로운 얼굴이미지를 창안한다. 김군의 사진을 바라보는 생존자들의 시점 쇼트는 반대진영의 시선과 구별되는 이미지의 맥락을 형성하기도 한다. 주옥은 기념관에서 김군의 사진을 쳐다보다 비로소 잊혀져가는 기억의 역량을 회복했고, 최진수를 비롯한 당시 시민군들은 스크린 속 김군의 얼굴을 바라보며 공통의 경험을 소환한다.

▲ <김군> 인터뷰 장면


  노출된 이미지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전면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김군>의 애초 목표였다면, 영화가 그와 동시에 발굴해나가는 것은 그 반대편의 지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동안 가시화되지 못한 것과 지금 가시화될 수 없는 것들의 영역이다. 증언들을 솎아보면, 그것이 김군과 직접적으로 관계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입장으로 양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김군>이 보다 가까이 접근하는 건 그의 현존을 기억하는 증언의 구체성이며 그와 공유한 정서적 경험의 실체이다. 영화는 인터뷰를 진전할수록 사진 속 얼굴과 닮은 인물들을 마주하지만, 형태적 유사성에 기반한 지만원 측의 추론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려 한다. 가장 무게가 실리는 진술은 김군에 대한 가장 끔찍한 기억을 가진 자의 증언일 것이다. 최진수가 목격한 죽음의 순간은 가시적으로 증언하거나 재현할 수는 없지만 그는 현장의 건축적 구조뿐만 아니라 인물의 말과 행동, 김군에게 겨누어진 총의 위치까지 상세하게 기억해낸다. 거처 없는 김군에게 도움을 주려 했지만 그를 다시 볼 수 없었던 주옥 또한 그와 나눴던 마지막 대화를 생생하게 회고한다. 결국 <김군>이 복원해나가는 것은 반대진영의 이미지에 소거된 인물들 간의 관계이며 5・18 의 기억과 공동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 <김군>(강상우, 2018)


  그런데 증언의 막바지에 도달하고도 <김군>은 그곳이 종착지라는 확신을 주지 않는다. 김군의 행방에 대한 사실관계를 주장하는 증언이 아니라, 그날의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는 주관적 진술이 마지막 증언의 자리를 채우기 때문이다. 증언 시퀀스들은 인물에 따라 순차적으로 배열되고, 바톤터치를 하듯 초점을 수차례 옮겨간다. 증언들 사이에 정립된 수평적 위계는 종합된 입장의 수렴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가 관점을 은밀하게 피력하는 구간이 있다. 김군이 사라진 넝마주이라는 주옥의 주장과 그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최진수의 주장은 김군으로 추정되는 인물들과 주변인의 진술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두 증언 시퀀스 간의 근본적 거리는 결코 멀지 않다. 주옥의 증언은 김군이 거주했다는 다리 밑 풍경과 결합하며 이미지와 사운드의 공명을 만들어낸다. 최진수의 증언을 기반으로 사건을 조사 중인 5・18 연구자의 보이스오버 역시 기시감이 드는 풍경 쇼트와 결합한다. 그런데 이 쇼트에서 이미지의 역할은 음성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다. 연구자가 김군이 죽은 장소를 가정집 마당이라 지목하는 동안 카메라는 이전의 다리 밑 풍경을 비추기 때문이다. 이때 서로 만난 적 없는 두 시퀀스는 같은 장소의 풍경 쇼트를 통해 느슨하게 연결된다. 사건 이후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연구자의 음성이 넝마주이가 사라졌다는 주옥의 진술과 가상적으로 포개어지는 것이다.

▲ <김군> 풍경 이미지


  <김군>은 분명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잠정적이다. 그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도 주검도 없기 때문이다. 기록된 자료만으로 당시를 완벽히 입증할 수 없다면 그 대안은 그것의 은폐를 건드리는 것일 테다. 영화가 가져오는 증언과 문서 자료는 촉구에 가까운 의문을 제기한다. 그날의 시체는 왜 아직도 발견되지 않는가? 신원미상자들의 죽음은 어째서 알려지지 않았는가?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잉여가 있다. 그것은 연고자도, 거주지도 없는 이들의 죽음이며, 조명되지 못한 희생이다. <김군>은 89년 광주 청문회 푸티지를 통해 끝까지 무장해제를 하지 않고 버틴 넝마주이에 대한 증언을 조명한다.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 놈들도 애국할 수 있다”는 그들의 결의는 사건 이후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야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수면 위로 올라왔다. 

  프레임을 가득 채운 생존자와 희생자의 얼굴들은 상대의 폭력적 노출의 전략에 맞서는 소명을 다했다. 그러나 <김군>은 이곳에 모두 담기지 않는 무형의 감각과 정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시화될 수 없는 죽음이나 트라우마의 잔존은 영화에서 우회적으로 표현된다. 고문을 겪은 몸의 기억과 죄책감을 호소하는 생존자의 얼굴은 화면에 드러나지 않고 광주 거리의 풍경 쇼트와 보이스오버로 대체된다. 김군의 죽음을 표상하는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거주한 다리 밑 풍경은 그의 부재를 대체하며, 규명할 수 없는 정념을 불러온다. 다리 주변을 무성하게 둘러싼 덩굴은 지나간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게 하고, 세찬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는 상실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사진 속 얼굴의 실존을 찾기 위한 탐사가 도달한 곳은 은폐된 진실의 한가운데이다. 30년 전의 사건은 여전히 미결상태이며, 음모론에 휩싸여있다. 죽음과 외상을 에둘러 가리키는 이전의 구간들처럼, 엔딩 시퀀스 역시 풍경을 불러온다. 이곳에서는 누구의 음성도 들리지 않고, 사건이 개입하지도 않는다. 어둠에 잠긴 광주 시내의 풍경들은 그저 빈자리를 가만히 응시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공간의 세부는 드러나지 못한 모든 잔여의 존재를 예비하는 것처럼 일렁인다. 부동하는 정경에 미세한 운동을 부여하는 건 도시의 불빛들이다. 이곳은 고요하지만 멈춰있지 않고, 누군가의 현존을 포획하지 않지만, 비어있지 않다. <김군>이 얼굴을 내려놓고도 힘을 잃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누군가의 존재를 잊지 않은 기억과 정념의 보이지 않는 진동이 얼굴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 강새힘
-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공부한다. 동시대 미디어 환경이 구성하는 관객성과 무빙이미지의 정서적 효과에 관심이 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