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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두려움, 보통의 딜레마, 보통의 희망, 그리고 가장 보통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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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9. 8. 9.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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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라는 거대 목표는 노동자들에게 수습할 시간을 주지 않고 주위 사람들을 챙길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 사실 한 발짝 떠나고 보면 드라마는 인생이 아니고 하나의 프로젝트인데, 하는 와중에는 삶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거대한 코끼리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다."

 

[ACT! 115호 리뷰 2019.8.14.]


보통의 두려움, 보통의 딜레마, 보통의 희망

그리고 가장 보통의 드라마 


정가원(드라마 제작사 PD)

 


  가장 보통의 드라마는 저자 한솔이 나에게 선물한 사인에 남겼듯 함께 감당했던 시간의 무게가 담긴 책이다. 책의 첫 시작, “이 책은 조롱당하기 쉬운 책이다”라는 문장이 그간의 시간을 상당히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드라마 제작 현장과 과정은 거대한 코끼리 같아서, 코끼리 앞발톱 정도를 만지고 있는 내가 이 코끼리를 정확하게 그리지 못할까봐 걱정이 많이 되었다. 이것은 한빛이 세상을 떠난 후 처음으로 변호사님과 자료를 정리할 때도 그랬고, 대책위를 처음으로 시작할 때도 같았다. 심지어 센터 이사회에서 회의를 할 때도 그렇다. 이 불안함은 드라마 업계에서 일을 한 내 경력이 그간 2년 더 많아졌음에도 여전하다. 

▲ 책 『가장 보통의 드라마』  (이한솔, 2019, 필로소픽) 


1. 불안함의 원인 

  책을 읽으면서 나의 “조롱당할까봐 걱정되는 변하지 않는 불안함”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곱씹게 되었다. 어쩌면 그동안 드라마 업계에 들어와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너는 아직 경력이 짧아서/어려서 잘 모른다” “원래 그렇다” “걔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말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저자가 책에서 정확하게 꼬집고 있듯, 군대문화와 도제식 문화가 비틀려서 한국화 되어 버린 드라마 업계 속에서 경험이 없고 실무를 모르는 사람은 차근차근 교육을 하기보다 찍어 눌러서 키워야 한다는 것이 당연시 되어 있다. 이것이 드라마 업계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왔던 가장 보통의 재갈이다. 대부분의 폭력은 가장 약한 이들에게 가해지는데, 주변 사람들은 약한 이들에게 “넌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OO이 그렇게 말했어요?” “OO이 일하는 건 어때요? 잘해요?”라고 다른 이에게 물어보는 것을 일상적으로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가 언젠가는 내 뒤에서 저렇게 다른 이에게 물어볼 것임을 이 업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니까 실수 한번이 너무도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한 번의 실수가 어떻게 와전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서로에게 잔인해지는 사람들 

  드라마라는 세상 속에 있다 보면, 드라마를 성공적으로, 또는 무사히 끝나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고 삶의 목표가 되어버리는 기분을 겪는다. 당장 내일 오전 6시에 내가 섭외를 맡은 사람이 현장에 당도하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져 내릴 것 같다. 혹시 내가 실수해서 광고가 잘 못 나가서 주연배우 측에서 나에게 컴플레인을 하면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다. 인간의 도리보다 퀄리티 있는 대본이 훨씬 더 우선시되어버리기도 한다. 대본은 사람이 쓰는 것이고, 드라마에게 사람냄새가 나야한다고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서 사람들은 “죽고 싶다”라는 말을 달고 살게 되는 것 같다. 드라마라는 거대 목표는 노동자들에게 수습할 시간을 주지 않고 주위 사람들을 챙길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 이 시간과 여유를 요구하는 자가 있다면 “순진하다”또는 “무능력하다”라고 치부해버릴지도 모른다. 사실 한 발짝 떠나고 보면 드라마는 인생이 아니고 하나의 프로젝트인데, 하는 와중에는 삶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거대한 코끼리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다. 

  이 와중에 잔인함은 무기가 되고 실력이 된다. 욕을 잘하고, 성격이 더러운 것, 사람보다 드라마가 우선되는 것이 실력이 되는 신기한 세상이다. 다른 이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내가 먼저 잡아먹어야 한다는 강박이 지배한다. 서로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 상황에서 변화는 쉽지 않다. 그래서 저자가 이야기한 ‘노력 말고 노조하자’라는 말이 변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될 수 있다. 

 

▲ 책 『가장 보통의 드라마』는 이한빛PD의 동생이 방송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고발하는 최초의 에세이다. (이미지 출처: 알라딘 카드 리뷰)


3. 단결은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물론 나도 노동자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그네들 앞에선 노동자를 쥐어짜는 관리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 이한빛PD 유서 중 - 

 


  한빛PD가 남긴 이 딜레마는 혼자만의 딜레마가 아니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후벼 파고 있는 현재 진행형 고민이다.   

  방송스텝지부가 생기고, 한빛센터가 생기고, 방송갑질119가 생기면서 제작사들은 꽤 많이 긴장했다. 우리 드라마가 제보되고 있지는 않나 불안해하기도 하고, 제작PD는 “요즘 스텝비가 어마어마하게 올라서 예산이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고 대표에게 보고하기도 한다. 대표들은 잘못하면 구속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꽤 크게 느끼는 것 같다. 심적으로는 다들 12시간 ON 12시간 OFF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제작PD들도 노동자니까. 촬영이 12시간 진행되더라도 촬영이 끝난 후에 또 영수증을 정리해야하는 제작PD들은 “12시간만 촬영하게 되면 4시간은 잘 수 있겠네”라고 대답한다. 그럼 그동안 얼마나 오래 밤새워왔던 것인가. 기획PD 입장에서는 방송국에 들어가면 대본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면서 그간 피땀 흘려 기획해왔던 2-3년의 시간이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 생기지 않아서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들은 동시에 관리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직은 노동자간의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남아있다. 예산을 짜다보면 항상 나오는 말은 “신입이 나보다 돈 많이 받네. 나도 연출부 할 걸 그랬어.”라는 말이다. 경력이 없던 시절 밥이 잘 못 나왔다거나, 주문을 잘 못했을 때 쏟아지던 폭력들도 똑똑히 기억한다. 이는 위에서 얘기했던 잔인함이 일상이 된 현실의 문제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게 당연했으니까 단결도 어려운 것이다. 제작사의 PD들도 ‘내 임금도 올리고, 내 노동시간도 줄이자’라고 주장해도 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사용되는 비용을 줄이는 것이 회사 내에서 인정받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촬영시간 줄이면 좋은데, 그러면 회사 망한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하지만 동시에 바뀌지 않는 것도 큰 스트레스다. 누구도 얼굴 붉히며 서로를 해고하고, 서로를 착취하며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이 한빛PD를 괴롭혔던 딜레마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제는 법이 바뀌어야 한다. 적어도 “대표님 이렇게 되면 잘못하다간 구속돼요”라는 말은 꽤나 큰 힘을 갖는다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신입들에게 주는 돈은 아까우면서 접대비는 수백만 원 쓰는 제작사의 임원들이 바뀌어야 할 일이고, 드라마에 사용되는 예산 자체가 바뀔 일이지, 노동자들이 분열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을 모두가 서서히 알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4. 그래서 이후가 중요하다 

  한빛PD가 드라마 현장 문제의 티핑포인트(Tipping Point)가 된 후, 방송스텝지부와 방송작가유니온, 한빛센터가 만들어낸 변화는 크고 유의미하다. 실제로 많이 바뀌고 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야 비로소 ‘상식’과 ‘사람’이 있는 현장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장 <컷>에서 미래를 위해 굉장히 명확하고도 정확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지적하듯, 실제 ‘가장 보통의 드라마 현장’이 보다 인간적인 현장이 되기 위해서는 제도와 현장의 양 측면에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한빛 센터의 지속적인 투쟁과 한빛의 죽음을 바라보며 깊이 있게 공감했던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문제제기로, 현재는 제도적 부분에서 눈에 띄는 변화들이 보인다. 앞으로 달성해야 하는 과제 또한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다. 위에서 지적했듯, 법이 바뀌어야 실제로 바뀐다.   
  그러나 현장의 변화 없이 제도는 바뀌지 않을 것이며, 설령 제도가 바뀐다 한들 체감되는 변화는 적을 것이다. 특히 ‘도제문화의 극복’과 ‘인식과 문화의 개선’은 저자가 얼마나 깊이 있게 방송현장에 대해 고민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 이상 폭력적인 상황과 문화를 감내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없이는 일상의 스트레스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노력말고 노조하자’라는 저자의 제안이 현장의 보편적인 구호가 되기를 고대한다. 그리고 이 대안이 현실이 되어 우리가 앞으로 만들 ‘가장 보통의 드라마’들이 조금은 달콤하고 인간적인 드라마가 되기를 바란다. □

 



글쓴이. 정가원
드라마 제작사 PD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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