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미완이 동력인, 넝쿨을 만나다.

전체 기사보기/인터뷰

by acteditor 2019. 8. 9. 10:46

본문

"활동가는 어떤 능력과 책임을 요구받는다. 내가 활동가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그 역량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좀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역량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CT! 115호 인터뷰 2019.8.14.]

 

미완이 동력인, 넝쿨을 만나다


최은정(ACT! 편집위원)

 


  언제나 고민 많고 스스로에게 비판적인 활동가. 자신을 비숙련 노동자라고 말하는 활동가. 하지만 그 미완의 현재가 동력이 되어 좌충우돌 넝쿨을 키우고 있는 건 아닐까. 

▲ 넝쿨 (연분홍치마, 인천인권영화제 활동가) 

 

= 요즘 어떻게 지내나?
- 연분홍치마에서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을 하고 있고, 유투브 방송을 준비 중이다. 인천인권영화제가 11월이라 매주 기획회의와 인권학습을 하고 있다.

= 유투브 방송은 어떤 건가?
- 퀴어 예능이다. 8월 중순부터 주 1회, 10분 분량으로 올릴 예정이고, 첫 촬영을 마쳤다. 김일란 감독이 연출이고, 나는 제작이 아니라 출연이다. 연분홍치마에게는 새로운 도전이다. 장르와 채널 모두 바뀌는 거니까. 개인적으로는 찍던 사람이 찍히는 사람이 된 거라 고민이 많다. 출연자로서의 태도나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 개인적인 근황은?
- 술을 많이 줄였다. (웃음) 요즘은 우리 집 고양이 랄라와 방탄소년단에 빠져 있다. 이 얘긴 3박 4일 걸린다.

= 원래 어떤 사람이었나?
- 얌전하고 조용했다. 8살 때부터 중학교 때까진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림이나 컷 만화를 많이 그렸다. 원래 실업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일 하면서 그림을 배우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사를 가면서 등수가 올라가서 엄마의 권유로 인문계에 들어갔다. 이 때 꿈이 한 번 꺾이면서 뭔가 하고 싶다는 마음을 내려놨던 것 같다. 만화는 취미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열심히 학교 다니고 자격증 따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려고 했다. 대학 전공도 성적에 맞춰 정한 거라 사회과학부가 뭐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웃음) 큰 기대 없이 살았던 것 같다.

= 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 2006년에 같은 과 동기들과 평택 대추리로 농활을 갔었다. 용산 미군기지가 이전하는 곳이었는데, 난 마을에 대한 정보 없이 친한 친구들과 놀러간다는 마음으로 정말 편하게 갔었다. 그런데 농활을 마친 5월 4일, 행정대집행이 있었고, 폭력적인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주민이 아니면 연행한다는 말이 있어 어떤 주민의 집에 숨기도 했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20여 명이 한 방에 불을 끄고 앉아, 경찰이나 군인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숨을 죽였었다. 학교를 부수고 철조망을 치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지금 걸리면 죽는다는 느낌으로 숨어 있으면서 이질감을 느꼈다. 무슨 세상에 살고 있나 싶었고 그 상황과 현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 들소리방송은 어떻게 참여했나?
- 행정대집행 이후 대추리에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줄 아는 건 없지만 뭔가 하고 싶었고 삐대고 싶었다. 같이 간 친구들 중 영상을 하는 친구가 있었고, 대책위와 얘기해 방송국을 만들기로 했다. 난 친구들이 있으니 잠깐 같이 있자는 마음으로 겁 없이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 주 6일 방송이라니. (웃음) 회당 10~15분 분량으로 제작해 저녁 촛불 집회 때 상영하고 온라인에 올렸었다. 난 기본기도 없고 영상에 큰 관심도 없었는데, 주 6일 방송이라 항상 사람이 부족했고, 누구든 카메라를 들고 나가야 했다. 언제나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경찰과 군인이 상주했고, 철조망 친 직후라 검문도 심했다. 주민들 상처도 깊었고. 

= 주 6일 방송을 고집한 이유가 있나?
- 당시 그 작은 마을은 전쟁터 같은 이미지로 바뀌어 있었다. 주류 미디어는 바비큐처럼 묶여 연행당하거나 죽창을 쓰는 모습만 내보냈다. 마을은 폭력의 상징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그냥 사람 사는 동네였다. 점 10원 민화투 때문에 다투다가도 동네 나무 그늘에서 같이 지짐이 부쳐 먹는 시골 동네. 들소리는 그 일상을 나누고 싶었다.

= 들소리가 영향을 많이 준 것 같다.
- 세계가 뒤집어진 수준이었다. 내 인생의 전환점. 어설프지만 방송을 한 것도 재밌는 전환이었다. 만화를 그릴 때처럼 내면에 있던 표현에 대한 욕망이 나도 모르게 표출됐던 것 같다. 그게 없었다면 영상이 아닌 다른 역할을 했을 수도 있고 방송이 끝나고 영상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대추리와 들소리는 뗄 수 없는 큰 축이고 크게 바뀌게 된 계기다.

 

▲ <황새울방송국 들소리> (2006) 

 

= 그 이후 어떤 활동을 했나?
- 결국 미군기지는 이전했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방송도 어쩔 수 없이 그만둬야 했다. 뭔가 억울했고 그게 한이 됐다. 그래서 살풀이 차원으로 미디액트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 수업을 들었다. 난 10기다. 

= 도움이 됐나?
- 살풀이는 톡톡히 했는데 공부를 열심히 안 했다. (웃음) 수료작으로 대추리에 대한 20분짜리 단편을 만들었는데, 제작에 대한 고민보다 당시 내 감정이 어땠는지에 빠져 있었다. 영화적으로 기술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았다. 잘 모르지만 컷은 대충 붙이자, 내 마음이 우선이야, 이런 식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기본기를 배울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걸 놓친 게 좀 후회된다. 

= 용산참사 현장에도 결합했는데?
- 미디어로는 아니고 발 마사지 샵을 열었었다. 영상에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먹고 살기도 힘들 것 같아서 적당히 알아서 먹고 살 걸 알아보려고 했었다. 그러던 중 용산참사가 터졌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미디어가 아닌 다른 걸 하고 싶었고 그래서 생각한 게 발 마사지였다. 자격증이 있었던 건 아니고 악력이 좋아서 시작했다. 워낙 큰일을 당하신 거라 유가족과 철거민들에게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구체적인 얼굴을 보고 싶었고 연결되고 싶었다. 대부분 여성들이었고 마사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다시 영상으로 돌아오긴 했다. 손에 쥐는 게 없어 아쉬운 마음에 <용산, 337 가지로 표현하기>라는 옴니버스에 참여했다. 떠날 듯 떠날 듯 하다가 결국 안 떠난 셈이다.

= 인천인권영화제 활동은 그 이후인가? 
- 용산에서 만난 활동가와 인천 공부방에 대한 다큐를 제작했고 자연스럽게 인천인권영화제와 만나게 됐다. 나에게 대추리와 용산이 어떤 사건이라면 인천인권영화제는 사람이다. 그곳에서 평생 같이 갈 것 같은 친구들을 만났다. 비빌 언덕 같은 존재랄까.

= 어떤 면이 그런가?
- 영화제 준비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인권 학습도 하고 콜트콜텍 같은 투쟁 현장 연대도 많이 한다. 특정 시점에 집중되는 활동은 아니고, 되게 일상적이다. 뭐라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일하러 갔는데 놀고 있고, 놀았는데 일을 한 경우가 많다. 일과 노는 것의 경계를 넘나든다. 어떤 면에서는 느슨하고 어떤 면에서는 쫀쫀하다. 일은 편하다. 실무에 미친 듯이 치이면서 촘촘하게 일하진 않는다. 하지만 인권 활동가로서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깐깐하고 뾰족한 편이다. 

▲ 23회 인천인권영화제 포스터 (출처  http://www.inhuriff.org)  


= 연분홍치마에서는 언제부터 활동했나?
- 2015년 <공동정범> 조연출을 하면서 연분홍치마 활동을 제안 받았고, 2016년 1월 1일에 본격적인 첫 출근(?)을 했다. 다큐 작업을 계속 하고 있었지만 딱히 잘 하는 것 같진 않았고, 인권 활동을 놓고 싶진 않은데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때였다. 마침 이곳에서 새로운 활동가를 찾던 시기였고, 다큐 제작과 인권 운동을 같이 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하고 들어왔다. 

= 잘 맞나?
- 나에겐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이 중요하고 큰 의미다. 여기선 내가 활동가인가 다큐 감독인가 하는 갈등 때문에 부대끼지 않는다. 두 정체성을 동시에 가져간다. 활동과 작업을 연결하고 일치시키는 점이 좋다. 다큐를 잘 만드는 곳이라 배울 게 많을 것 같기도 했다. 

= 연분홍치마는 어떻게 지내나?
- 후원과 여러 가지 영상 알바로 연명한다. 지금은 성소수자 부모에 관한 다큐와 앞서 말한 퀴어 예능 유투브 방송을 준비 중이다. 주 1회 회의하면서 근황 나누고 하고 싶은 기획 얘길 하는데, 평소에도 얘길 많이 하는 편이다. 규칙이나 약속이 없는 건 아닌데 자율적이다. 활동가 집단과 예술가 집단의 경계를 넘나들기 때문에 활동 범위가 넓은 편이다. 

= 박근혜정권퇴진행동 미디어팀 활동은 어땠나?
- 2016년 말부터 2017년 초까지 활동했다. 1기는 김일란 감독, 2기는 내가 팀장을 맡았었다. 1기 때는 상당히 긴박했고 급하게 촬영에 결합한 사람들이 많았다. 2기는 2017년 초부터라 긴장감이 적었고 이를 악물어야 하는 상황도 많지 않았다. 집회와 촬영 방식도 안정화됐었다. 이미 기세가 넘어간 상황이라 그 다음은 어떤 세상이여야 하는가에 대해 많이 말하던 때였다. 한편으로는 운동 사회 안에서 기록 활동과 미디어 활동가를 어떻게 위치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이 활동이 어떤 수고로움이 있는지도 인식시켜 나갔다. 개인적으로 팀장으로서의 역할을 잘 못했다고 생각한 부분은 이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미디어팀에 대한 평가나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것이다. 

= 개인적으로는?
- 사실 소화가 잘 안 되긴 했다. 대통령을 퇴진시킨 엄청난 사건인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그 사건을 둘러싼 지형과 그 이후 맥락을 어떻게 볼 것인지 소화가 잘 안 됐다. 지금 5~60대인 사람들은 두 번이나 겪었겠지만 나에겐 처음이었고 너무나 거대하게 느껴졌다. 내가 서투르기도 했다. 소재 자체에 압도되어 이 항해를 누구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간과했던 것 같다. 자책 중이다. 

▲ 연분홍치마 이미지 (출처  http://pinks.or.kr/)  


= 활동가라는 말이 익숙한가?
- 지금은 그렇다. 옛날에는 싫어했다. 굉장히 오랫동안. (웃음) 언어로 벽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특정한 사람들만 활동할 수 있다는 식으로. 지금도 벽을 치는 말에 대해선 부정적이다. 일상의 실천이 있다고 생각한다. 종이컵 대신 텀블러를 쓴다든지, 차별적 질문을 하지 않는다든지. 모두 자기만의 실천이고 변화를 위한 활동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실천들의 의미를 존중해야 변화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좁히지 말았으면 한다. 그런데 내가 활동가라는 언어를 받아들인 건 직업으로서의 의미라 좀 다르다. 이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 직업으로서의 활동가란?
- 연분홍치마 상임활동가가 되면서 어떤 능력과 책임을 요구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일상의 실천과는 다른 의미다. 대추리와 용산에서의 활동과도 달랐다. 그건 비일상적인 특별한 행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전히 내가 활동가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그 역량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좀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역량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미래가 보이나?
- 미래는 안 보이지만 책임은 보인다. 맡은 일을 잘 해야 하니까. (웃음) 활동가로서 늙는다는 측면에서는 잘 모르겠다. 내가 돌봄이 필요해질 때 누가 어떻게 날 돌볼 수 있을지 막막하다. 사회가 책임져야 하고 하나의 운동 영역이기도 하지만, 저렇게 늙으면 좋겠다 싶은 롤모델도 있으면 좋겠다. 어떤 할머니가 될까 상상했을 때 활동가로서 잘 늙어 잘 살고 있는 할머니가 내가 볼 수 있는 사람 중엔 안 보인다. 나나 활동가들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보통의 많은 사람들의 미래가 어둡고, 좋은 어른이 없는 사회이고, 나도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 넝쿨(연분홍치마, 인천인권영화제 활동가) 


=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
- 내가 뭐라고 무슨 말을 하겠나. 알아서 잘 할 것이다. 너무 꼰대 같은 질문 아닌가. (웃음) 자기가 알아서 잘 살겠지, 필요한 게 있으면 물어보겠지, 얘기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얘기하겠지. 새로 활동하시는 분들, 이렇게 하세요, 라고 할 게 뭐 있나. 나랑 같이 부대끼는 사람들일 텐데.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 자기 자신은 자기가 제일 잘 아니까. 

= 스스로에 대해 말한다면?
- 전문가가 되고 싶은 비숙련 노동자 같다. 10년 넘게 삐대고 있는데 아직도 비숙련이라는 게 부끄럽다. 잘 하는 것도 없지만 못 하는 것도 없는, 한 것도 없지만 안 한 것도 없는, 그런 때인 것 같다. 빈 도화지일 때는 배우는 대로 스펀지처럼 흡수했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갖고 있고 부족한 부분이 느껴져 성장을 갈구하지만, 느리다. 생각만큼 빠르지가 않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가야 하는데 기다리는 게 괴롭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아직 포기가 되진 않는데, 나름대로 활동한다고 했는데 잘 하는 게 없다. 말 그대로 비숙련 노동자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 연분홍치마의 퀴어 예능이 재밌길, 인천인권영화제를 잘 치르길, 그리고 10월 방탄소년단 서울 공연 티케팅에 성공하길 바란다. □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