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잃어버린 신분을 찾아서 - 황혜진

전체 기사보기/Me,Dear

by ACT! acteditor 2019.08.09 10:43

본문

"현재 나의 친구들이 붙여준 나의 신분은 ‘프로 N잡러’이다. 적게는 3개에서 많게는 6~7개의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생활비를 벌어들이느라 오히려 또다시 제작할 여유가 없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ACT! 115호 Me,Dear 2019.8.14]


잃어버린 신분을 찾아서


황혜진


  지난 2월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짧은 고민에 빠졌었다. 입국심사서를 한참 적어 내려가던 펜이 직업란에서 멈추었다. 학생이라고 적기에는 졸업한 지 6년째라 까마득하고, 무직이라고 적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고민하던 나는 결국 프리랜서라고 적었다. (프리랜서라고 할 만큼 일을 하고 있진 않아 찔렸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내가 겪은 에피소드는 쟤가 왜 저런 것으로 걱정할까 싶을 정도로 고민거리가 아닐 것이다. 나도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나의 직업이나 사회적 신분을 밝히는 데에 있어 한 치의 고민도 없었다. 10대까지는 학생이라는 신분이 주어졌고, 20대 중반까지도 마찬가지로 어딜 가든 대학생이라는 말로 나를 쉽게 나타낼 수 있었다. 취업하고 난 후로는 명함에 적혀있는 ‘xx사 해외 영업 기획부 사원’으로 나를 소개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새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기가 부쩍 힘이 든다.

  ▲유럽 입국 신고서 


  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 싶은 사람)이다. 영화 공부를 하기로 한 지 2년이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딱 한 마디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내가 원하는 직업적 정체성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지만 현실의 나는 영화를 한답시고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온 30대의 무직 여성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내가 원하는 시간만큼 영화를 위한 고민을 하거나 사회문제에 대해 예민해질 여유를 갖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야근이 일상이었고 주말엔 집에서 지쳐 누워 책 한 권을 읽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지금은 비교적 영화 제작을 위해 투자할 시간이 많은 한편 금전적인 문제가 다시 발생했다. 현재 나의 친구들이 붙여준 나의 신분은 ‘프로 N잡러’이다. 차량 음식 배달서비스, 보드게임카페 알바, 다큐멘터리 조연출, 미디어센터강좌의 조교 및 장애인미디어교육 보조강사를 비롯해 자잘한 녹취와 촬영 알바를 포함하면 동시에 적게는 3개에서 많게는 6~7개의 일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생활비를 벌어들이느라 오히려 또다시 제작할 여유가 없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여러 개의 일을 한다고 해서 돈을 많이 버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회사에 소속되어 다닐 때보다 대략 반절의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내 책상 위 컴퓨터에는 아직 챙겨 받지 못한 5,6,7월의 알바비, 강사료, 촬영비 등의 내역서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가수 이랑은 본인을 생활예술인이라 소개한다. 본인이 하는 창작 및 공연 활동 등이 곧 생활에 직결하는 수입원이기 때문에 그러한 예술 활동을 제공함에 있어서 본인이 받아야 할 정당한 대가를 받자고 말한다. 나 또한 이랑처럼 생활예술인으로 10년, 20년 굶지 않고 사는 것이 지금 삶의 목표이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는 예술인들이 예술 외적 요인으로 예술 활동을 중단하는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지원함으로써 예술인 창작 안전망을 구축한다는 의미에서 창작준비금 지원을 하고 있다. 창작준비금은 연 2회 상반기와 하반기에 신청이 가능한데, 지원 대상 및 신청 자격으로는 1) 예술활동증명이 완료되고 2) 최근 2년간의 공개발표 예술활동실적 증빙이 가능한 예술인이어야 한다. 1)에 해당하는 이 예술활동증명은 예술인 복지사업 신청을 위한 기본 절차인데 이를 증명하려면 공개 발표된 예술활동이 있거나, 예술활동 수입이 있어야 한다. 보통 영화 분야의 예술활동증명은 개봉하거나 영화제 상영 이력이 있는 영화의 연출 및 주요 스태프 이력으로 가능하다. 내가 만든 두, 세 편의 영화 중 단 한 편만이 시민 영상제 상영 이력과 수상 내역이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예술인’임을 증명하긴 부족했는지 나는 예술활동증명에 실패해 아직까진 국가가 인정하는 예술인이 되지 못했다.

▲예술활동증명 방법


  어디에서도 나는 아직 다큐멘터리 만드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매번 나를 소개할 때마다 구구절절 설명하게 된다.
  “혜진 씨는 어떤 일을 하세요?”
  “영상 일을 하고 있는데요, 제 작업으로 다큐멘터리 연출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생활을 위해서 여러 가지 알바도 함께 하고 있어요.”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괜히 빈정 상하고 자존감이 떨어지는 건 왜지?

 얼마 전, 현재 작업하고 있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고 있는 독립 영화배우들을 만나 이야기하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영화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일 년 반 동안 영화배우 일은 잠시 접어두고 식당일을 하며 돈을 모으고 있다는 H, 배우 일을 하기 위해 최소한의 생활비만 사용하며 주말 알바를 하고 틈틈이 연기 스터디를 하는 M. 그리고 내 주변의 또래 동료 감독들도 생각해보았다. 영화제에서 일하며 퇴사 후 다시 본인의 작업을 하길 기대하는 S, 장애인 활동보조를 하며 남는 시간에 틈틈이 본인 작업을 하는 J, 단돈 몇천 원으로 몇 주를 생활하며 작업에 몰두하는 K. 또한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는 주변의 여러 감독들. 사실은 누군가의 인정을 받을 필요 없이 나 스스로 다큐멘터리스트라 생각하고 작업을 해나가는 게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아직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나 자신에게 스스로 당당하지 못해 이렇게 사회나 주변에서 인정해주는 신분에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닐까? □


글쓴이. 황혜진

- 생활예술인이 되고 싶습니다. 현재 여성의 몸과 다이어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