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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13호 Me,Dear] 여성활동가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Me,Dear

by ACT! acteditor 2019.03.0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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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13호 Me,Dear 2019.3.14.]


여성활동가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박혜미


  작년 이맘때쯤, 그러니 1년 전 퇴사를 했다. 필기시험까지 쳐가며 어렵게 들어간 정규직(!)이었고, 몇 개월 전 진급도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퇴사를 하게 될 줄은 나 자신도 몰랐다. 아마도 얼마나 더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언제까지 버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회의감이 몰려왔고, 나를 여기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월급이라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다. 퇴사하기 전 두 달 동안, 조금만 버티면서 그 다음을 준비하자는 나와 어차피 그만 둘 것이라면 지금이 좋다는 내가 줄기차게 싸워댔다. 친구들을 만나 상담도 하고, 타로 카드로 내 미래를 점쳐보기도 하고, 퇴사와 마흔의 사춘기를 다룬 책들도 열심히 뒤적여보며 중심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어쨌든 마음은 지금 당장 여기를 그만두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퇴사를 결정하고, 그 이후의 삶을 고민하면서 막막했다. ‘존버, 버티는 사람이 승자’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슬그머니 항복해버린 실패자 같았고, ‘직장이 전쟁터라면, 퇴사 후는 지옥’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겐 대책도 없는 철없는 사람인 것 같아서 자꾸 움츠러들었다. 실패했다는 마음과 막막함에서 오는 불안함이 조금씩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동안 하고 싶고 의미 있는 일을 ‘활동’ 혹은 ‘직업’으로 선택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 일과 활동이 나에게 유의미한지, 그렇지 않다면 지금 혹은 앞으로의 나에게 의미 있는 활동은 무엇인지 도통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나를 불안하게 했다. 활동으로 시작했지만, 어느 새 직장 혹은 직업이 되어버린 ‘일’에 대해서 원점부터 다시 질문하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전망을 찾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새로운 전망과 삶의 전환을 고민하면서, 퇴사 후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나눌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이것이 비단 나만의 고민만은 아닐 텐데, 경력이 늘어갈수록, 나이가 많아질수록 주변에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동료 여성을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과 함께, 20대, 30대에 함께 일을 시작했던 동료, 선배 여성활동가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단지 더 좋은 조건의 직장으로 이직하는 것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고민 – 이전에 굳건히 믿어왔던 ‘활동’의 가치에 대한 회의,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막막한 질문, 남성들뿐인 사회에서 여성으로서의 생존 전략에 대한 어려움 같은 것들은 더 나은 회사를 소개하고, 취업 스킬과 스펙을 높여주는 일반적인 퇴사 프로그램이나 자기계발서에서는 찾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래서 단지 직장이 아니라 가치와 믿음, 사회의 성장과 변화 등을 위해 일을 선택한 여성활동가, 하지만 어느 정도의 활동을 통해 전환에 대한 고민을 가지게 된 여성들의 일 경험과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운 좋게도 서울시 NPO지원센터의 <활력향연(활동가 역량 향상을 위한 연구지원)>(*주1) 공모 사업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렇게 연구가 시작되었다. (일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걸 또 연구 프로젝트로 만든 나는 어쩔 수 없이 일중독자인지도.)

 

▲ 활력향연 『경력 여성활동가의 일(삶) 전환 경험 연구』

(박혜미, 2018, 서울시NPO지원센터)



  연구는 경력 여성활동가들의 전환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혹은 진행되고 있는지), 그리고 전환의 과정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담았다. 얼마간 활동에서 자리를 잡은 후에 전환을 모색하는 경력 여성활동가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자연스럽게 30대 후반에서 50대에 걸친 여성활동가들을 만났다. 어떤 여성에게 전환은 경력 단절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에게는 ‘이직’을, 또 다른 이에게는 귀촌이나 이주처럼 공간의 이동, 위치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른 활동 영역으로의 이동 및 다른 활동 방식으로의 이동은 물론, 출산과 육아, 가족 돌봄 노동, 아픈 몸 등 어쩔 수 없는 환경과 이유로 활동을 그만두는 단절 또한 포함하고 있었다. 전환의 시간은 그동안 쌓인 독을 풀어내며 몸과 마음을 돌보는 과정이기도 하고, 일 중심과 능력주의에 물들었던 ‘노동’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기존의 관계나 삶의 방식과 떨어져 거리를 두는 것, 가족이나 세상이 아닌 온전히 나만을 위한 삶에 집중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지지와 용기를 얻었지만, 무엇보다 누구에게나 제자리에 멈춰 서서 자신의 활동을 돌아보고, 비워내고 다시 채우는 전환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의 과정은 세상의 속도보다는 느리겠지만 ‘가만히 멈춰 서서’ 자신을, 타인을 바라보고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구상하고 기획할 시간으로, 일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비생산적인 시간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전환의 과정이 사회적으로 지지받고, 인정받아야 하고, 개인이 오롯이 혼자 감당하기보다는 활동영역이나 사회 안에서 함께 고민되고, 나눌 수 있는 제도도 마련되어야 한다.  


  나 역시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일 중심의 생활과 관계를 돌아보게 되었고,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을, 동료를 착취로 내몰았던 부끄러운 경험들도 반성하게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불평등한 조건과 구조에 처한 여성의 노동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절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니는 불안들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더불어 단절과 전환의 과정이 단기간에 쉬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이제 나는 전환의 시작점을 지나고 있을 뿐이라는 것도. 덕분에 나는 연구를 마치고, 내가 만난 어떤 여성 활동가처럼 당분간은 기관이나 조직에 소속되지 않은 삶을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여전히 소속을 밝혀야 하는 순간순간마다 내가 일하는 단체나 회사 이름 대신 무엇으로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지만, 조급하지 않게, 초조해하지 않으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사람들이 불안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 역시 인터뷰를 다니며 만난 여성들에게 불안에 대해 물었다. 일을 그만두면 세상과 단절되지 않을까, 다들 나를 잊어버리지 않을까도 걱정이었다. 그녀들이 돌려준 답, 그래서 요즘의 나를 지탱하게 해주는 것들을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 당연히 불안하다! 하지만 예전에 하던 일을 계속 붙들고 있다고 해서 불안하지 않았을까?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불안은 나를 따라다닌다. 그 불안에 잡아먹히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단절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의 삶과 단절하고 거리를 두는 것이 더 어렵다. 설령 어떤 관계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사라지겠지만, 다른 새로운 관계들이 생겨난다. 막막하고 불안하지만, 나는 내 삶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다. 

  연구보고서는 소박하고, 소소하고 얇지만, 그녀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들이 혹여나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다른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 주1.  활력향연 활동가연구총서(2018) 전체 보기 

http://www.snpo.kr/bbs/board.php?bo_table=npo_aca&wr_id=4025


* 참고 자료 

액트113호-09첨부_활력향연(2018)_경력 여성활동가의 일(삶) 전환 경험 연구_박혜미.pdf



글쓴이. 박혜미



-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미디어교육실에서, 2011년부터 2018년 초까지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일했다. 현재는 딱히 정해진 소속이 없이 비정기적으로, 이따금 일이 들어오면 미디어교육, 연구, 상영 기획 등을 하고 있다. ‘경단녀’ 운운하는 걱정을 들으면 가끔 우울해지지만, 출퇴근이 없는 현재의 삶에 아주 만족하며 지낸다. 소속 기관이나 직함이 아닌 무엇으로 나를 표현할 수 있을지 여전히 고민이지만, 쉬이 답이 찾아질 것 같지 않다. 앞으로의 나에게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활동/삶은 무엇일지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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