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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11호 Me,Dear] 다큐멘터리는 영화다! 페이퍼가 무슨 쓸모람? - 마민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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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8. 10. 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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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Me,Dear’는 미디어와 관련된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내는 코너입니다. 그 동안 ACT!편집위원이 써왔으나, 이번 호부터 다양한 분에게 요청드리려고 합니다. 첫 필자는 마민지 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ACT! 111호 Me,Dear 2018.10.05.]


다큐멘터리는 영화다! 페이퍼가 무슨 쓸모람?


마민지(다큐멘터리 감독)



  난생처음으로 강의를 맡게 되었다. 제안이 들어왔을 때 잠시 망설였지만 몇 번이나마 특강 경험이 있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내가 제일 오랫동안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를 고민하다가 모든 것의 문서화에 집착하는 기질을 반영하여 페이퍼워크에 대한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름 하여 ‘다큐멘터리 페이퍼워크 지옥 탈출’.


  사실 페이퍼워크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다. 시나리오가 미리 쓰여 있고 최대한 통제된 상황 속에서 촬영되는 극영화 현장과 달리, 다큐멘터리영화는 현장에서의 변수가 감독의 예측을 자주 뛰어넘는다. 감독이 상상력을 있는 힘껏 발휘하여 모든 변수를 계산할지언정, 그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은 현실에서 자주 벌어지곤 한다. 페이퍼워크가 현장에서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페이퍼가 필요한 이유는 다큐멘터리영화가 결국 영화라는 데에 있다. 


  영화는 감독 혼자서 만드는 예술 매체가 아니다. 한국 다큐멘터리 제작 현실에서 다큐멘터리는 주로 감독 홀로 처음부터 끝까지 작업하는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결국 후반 작업 단계에 이르러서는 협업을 할 수밖에 없다.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후반 작업을 D.I.Y로 진행하더라도, 배급 단계에서 누군가와 협업을 하게 된다. 도움 없이 배급을 진행한다고 할지언정, 관객은 아무런 정보 없이 그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걸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요지는 영화는 누군가에게 보여짐으로써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되기 때문에 기획부터 배급까지 그 제작 과정에서 다양한 범주의 설득과 소통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페이퍼는 영화 제작에서 가장 기본적인 소통 수단이다. 영화 제작 이외의 일로 회의를 진행할 때조차, ‘제발 다음 회의 때는 뭐라도 정리해서 써옵시다!’라고 말하며 정리하는 풍경이 왜 낯설지 않을까? 감독이 스태프들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 채 말로만 영화를 찍고 있다면 관객은커녕 스태프들조차 감독과 소통할 수 없을 것이다. 비약하자면 지난한 논쟁으로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그 회의에 만일 잘 정리된 페이퍼 한 장이 있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서로를 잘 설득하고, 조금 더 많이 소통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강의 자료를 만들면서 지난 5년간 영화 한 편을 만들기 위해 작성한 페이퍼들을 모두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작성하지 않았던 페이퍼들도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 감독이 모든 페이퍼워크를 섭렵할 필요는 없다. 감독은 좋은 이야기를 현실에서 잘 발견해내고, 이를 잘 써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종강일에 나는 수강생들에게 좋은 프로듀서를 만나면 이 모든 것을 혼자 해낼 필요가 없다고 전했다. 그리고 나는 운 좋게 좋은 프로듀서들을 만났었다고. 


  물론 프로듀서는 페이퍼를 대신 써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감독과 이 페이퍼들을 함께 짊어지고, 더 나아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애쓸 이들 역시 프로듀서뿐이다. 문제는 강의를 들으러 온 많은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홀로 페이퍼워크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작금의 현실은 프로듀서가 양성되지 못하고 있는 한국 다큐멘터리 씬의 구조적 문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상에 쌓여있는 수많은 페이퍼들을 바라보며, 한국 다큐멘터리 씬에서 이 페이퍼워크의 지옥을 함께 걸을 수 있는 동료 프로듀서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을지, 문득 씁쓸함이 밀려왔다. □





글쓴이 - 마민지 



학부와 대학원에서 각각 극영화 연출 및 다큐멘터리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자본이 도시의 장소와 공간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며 변화를 만들어내는지에 관해 관심을 두고 영화를 만들고 있다. <버블 패밀리>(2017)는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이며, 2017년 EBS국제다큐영화제 대상을 수상했다. ‘사회는 여성의 몸에 어떤 질병을 남기는가.’를 화두로 두 번째 다큐멘터리를 기획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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