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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09호 Me,Dear] 얼굴들 속에서 숨은 얼굴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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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8. 5. 1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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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09호 Me,Dear 2018.05.30.]


얼굴들 속에서 숨은 얼굴 찾기


이세린 (ACT!편집위원)



  스물여섯이 되었다. 첫 직장인 미디액트에서 일한지는 이제 세 달째다. 바뀌어가는 삶에 적응하기 바쁜 와중에 덜컥 ‘Me, Dear’에 지면을 얻게 되었다. 마을미디어 단체에서 일할 때 주민을 만나며 콘텐츠에 '나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 보시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 그게 그저 한 마디 말로서 권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하게 된다. 정작 내 이야기에 솔직했던 때는 별로 없었다는 생각도 든다. 이 글에 나의 어떤 이야기를 적을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하려는 얘기는 비혼에 대한 것이다.


▲ 일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하기에 요즘 너무 바쁘지만 

그래도 여유로웠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힘이 난다. 

작년 가을 대만 단수이에서 찍은 사진.


  언젠가부터 비혼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이 내게 중요한 정체성이 되었다. 아직 '결혼적령기'는 아니라서 부모님의 위기감이 크지는 않은 것 같지만……. (결혼을 할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를 거듭 드렸지만 자꾸 잊으셔서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있다.) 이전에도 비혼으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결혼은 여성으로서 손해 보거나 불행해지기에 딱 좋은 일이라는 생각, 남들이 해내려고 애쓰는 일에 아등바등 해봤자라는 생각, 누군가는 원해도 할 수 없는 것을 누리는 건 부당하다는 생각. 이런 것들이 비혼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였다. 지금은 많이 달라져서, 약간은 그런 생각이 남아있지만 그런 것들만이 전부는 아니다.


  지금 비혼을 생각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하고 있자면 한명 한명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내게 소중한 사람들. 요 몇 년 간 좋은 관계들 속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은 대체로 어떤 사람들이었냐면, 결혼 가능성이라는 규범 바깥에서 연인 혹은 파트너와 소중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가족이 아닌 관계 속에서 서로를 돌보고 지지기반이 되어줄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퀴어한 삶, 페미니스트로서의 삶, 자신이 속한 다양한 모습의 관계 속에서 노력하는 삶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서, 나도 그 얼굴들을 하나하나 닮고 싶어서, 그냥 그러다보니 그냥 결혼하려면 뭘 준비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잘 안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사는 데 대책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는 싫어서, 결혼 안 하고도 책임감 있게 살아보고 싶어서 최근에는 세미나를 하게 되었다. 비혼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목표나 고민을 나누고, 주거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과 같이 대안적 삶에 필요한 것들을 공부하는 모임이다. 처음에 읽은 책은 『아파트 게임』이었다. 아파트를 둘러싼 한국사회의 요지경을 집 가질 일 없는 사람들끼리도 좀 알아보자는 취지였다. 이 책은 소설의 형태로 한국 사회를 시대별로 분석하는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개발 예정지를 보러 다니고 카페에서 곗돈 이야기를 하는 부인들, 버블경제의 득을 누리거나 누리지 못한 고개 숙인 가장들이 나온다. 한국 사회가 그랬다는 거지만, 정말 비혼인 사람은 한 명도 나오지 않는 거라, 우리는 사회 속에 이렇게 '없는' 사람들인가 하고 좀 우울했던 기억이 난다.


▲ 책 『혼자 살아가기』 | 송제숙| 2016



  요즘에는 모임에서 『혼자 살아가기』라는 책을 읽는다. 한국 사회를 정치경제와 민주화 이후의 정동, 젠더라는 세 가지 틀로 분석해내기 위해서 비혼 여성들의 삶과 그들이 겪는 주거 문제에 주목하는 책이다. 분석틀로 삼고 있는 것들은 좀 어렵게 느껴지는데, 기본적으로는 2010년도를 살아가는 30대 비혼 여성들의 인터뷰에 기반 한 책이다. 준희라던가 원이라던가 소정이라거나 하는 가명의 사람들. 그런 삶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책에 따르면, 비혼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저임금 직종에서 일하며 승진에서도 차별받아 목돈을 만들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은행에서 대출을 해주지 않아 전세나 자가를 얻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한국사회에서 공식경제만큼이나 중요한 비공식경제 영역을 지탱하는 사적 관계망(친족, 동창 등)에서 배제당해 자본 축적의 기회를 잃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준희라거나 원이라거나 소정이라거나 했던 그 여성들은 이런 세상 속에서 번민한다. 사회에 대한 급진적인 생각, 유연한 삶을 향유하고 싶다는 생각, 자기계발과 재테크에서 뒤쳐졌다는 생각, 이런 생각들과 함께 삶을 지속하는 이들이었다. 혼란스럽고 막막하지만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는 책이라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그녀들과 비슷한 혼란 속에서 우리가 정부나 지자체에서 받을 수 있는 경제적 지원은 없는지도 찾아봤었다. 가족 단위로 짜여진 제도들, 신혼부부를 위한 정책 등 우리에게 맞지 않는 것들도 많았다. 조사하다보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정부나 지자체에 존재하는 청년 관련 정책들이었다. 전월세 임차보증금을 대출해주거나 대출이자를 지원해주는 사업들도 있고, 청년수당과 청년통장처럼 자본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들도 있었다. 잘 몰랐는데 자세히 알고 나니 그나마 이런 것들이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엄밀히 따졌을 때 비혼과 관련된 정책들은 아닌데 어쩌다가 이렇게 눈에 불을 켜고 찾게 되었나 싶기도 하지만……. 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청년 정책이 이렇게 우리에게 절실한데도 청년 정책을 홍보할 때에 비혼 여성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 2015년 12월 서울시가 발간한 '서울생활 안내서'. 

청년편 표지에는 남성이, 어르신편과 장애인편 표지에는 여성이 등장한다.



▲ 지난 3월 말부터 게재된 서울시의 생애주기별 복지 정책 광고에서도 

청년 관련 정책은 남성으로 표현된다. 나도 93년생인데……. 

포스터에는 우리가 모임에서 열심히 공부했던 

청년수당, 청년 임차보증금 지원 등의 정책들이 기재되어 있다.


  청년 정책이 여성으로서, 비혼의 가능성으로서 표상되는 일은 정말 없는 것 같다. 저출산이 문제인 사회니까. 아마 청년 정책 광고에 젊은 비혼 여성을 내세웠다간 여론도 돌아서지 않을까……. 아직 모임에서 여성 정책을 다루지는 못했지만, 비혼을 내세울 수 없다는 점에서는 비슷할 것 같다. 한국의 저출산 문제는 사실 신혼부부들이 아이를 덜 갖는 문제보다 결혼 자체를 하지 않는데서 오는 문제에 가깝다고 한다. 처음 이 얘기를 들은 것은 여성주의 강의에서였는데, 최근에는 조선일보까지도 비슷한 분석을 내놓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주1) 그러니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람들이 결혼을 많이 해야 한다. 청년을 지원해야 한다는 당위의 일정 부분 또한 사회가 ‘3포 세대(연애·결혼·출산)’를 이대로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에서 올 것이다.


  나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 하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인 20대 초중반을 보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문재인 정권 하에서 바뀌는 것들에 매사 놀라고 있다. 하지만 정권이 어떻든 아마도 꽤 오랜 시간동안 정부와 지자체의 정책 속에서 '비혼 여성'의 이름은 불리지 않을 것이다. 저출산 문제가 몇 년 안에 해결될 리는 없으니까. 비혼 여성'도' 지원받을 수 있는 정책이 아니라, 비혼 여성의 삶이 전면으로 드러나는 정책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내 주변의 그 얼굴들이 사회 속에서 생생하게 드러나고, 우리가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가능성을 지지받게 되는 날은 없을까? 어쩌면 정책에 기대하는 게 너무 많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세상이 다 뒤바뀌어야 가능한 일일지도. 비혼으로서 살아가는 삶은 낭만적이기보다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과 맞서야 하는 삶이 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결혼 따윈 제쳐두고 세상이 재현하지 않는 얼굴들과 같이 살 궁리를 계속할 예정이다. 


* 주1. 결혼만 하면 2명 이상 낳더라… 출산율 낮추는 건 非婚

(조선일보, 2017.11.09.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09/2017110900115.html




글쓴이 이세린

공동체미디어의 힘을 믿는 사람. 주변 사람들에게 '인터넷 인간'이라 불리는 SNS 중독자. 다양한 사회 운동을 좋아하는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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