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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8호 이슈] '외면'과 '호명'을 넘은 문화다양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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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18호 / 2005년 2월 28일 

 

문화다양성 운동의 이중성 : 국내와 국제적 쟁점 

 

  

'외면'과 '호명'을 넘은 문화다양성으로

   김 형 진 ( 문화연대 매체문화위원회 활동가 )   

1. 문화다양성의 왜곡과 이중성

 

‘문화다양성’은 현 시점에서 새롭지 않을 뿐 아니라 이중적이기까지 하다. 이와 같이 규정이 가능한 이유는 ‘문화다양성’에 대한 왜곡과 자본의 자기변명의 정도가 나날이 심해지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삶의 총체적 생활양식인 ‘문화’를 대하는 태도와 ‘다양한’ 문화들의 존중하는 태도로서의 ‘문화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는 ‘타자에 대한 예의바른 배려’를 실천하는 민주적 시민의 기본 양식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느낌이다. ‘타자에 대한 예의바른 배려’는 개성과 취향이 존중되는 다원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기본적인 태도로 이해되지만 이와 같은 시혜적인 느낌의 배려는 결국 ‘다양성’을 수사학적으로 이야기할 뿐 구체적 정책과 의지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데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문화의 공존과 표현을 문화다양성의 중요한 척도로 강요(!)하는 자본의 질서는 결국 정상성의 문화를 중심에 두고, 타인에 대한 배려의 차원에서 문화다양성을 이해하고 실현한다. 이는 태생적으로 ‘문화다양성’을 지극히 이중적이고 세련된 형태의 자본의 문화로 편입시키는 전략이다. 특히 모든 문화정책 콘텐츠는 ‘문화다양성’에 열렬한 예찬을 고백하고 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한 대안은 화려한 고백의 수사 뒤로 사라지고 있다. 결국, 자본의 의한 다양성은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충실한 자본의 적극적인 공세일 뿐이며, 자본적 삶의 피폐와 공공성의 저해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 하는 ‘다양성’일 뿐이다.

 

 

2. 현재 미디어 내의 문화다양성

 

미디어에 초점을 맞춰,

가장 일상적 미디어인 TV는 우리에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여기서 다양하다는 것은 긴 시간 여러 가지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당연히 24시간 내내 이미지를 송출하는 TV에서 ‘문화다양성’은 찾아볼 수 없다. 주류가 아닌 소수자의 목소리와 소수자의 이야기는 한시적으로 혹은 시혜적으로 다뤄지기 일쑤이며, 그나마 왜곡의 형태로 드러난다. 객관성과 시의성이 생명인 국제뉴스는 아예 독점적 미디어 권력을 지니고 있는 외신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문화다양성에 조차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 TV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그 동안 여성, 장애인, 어린이, 성소수자 등 소수자의 입장에서 TV를 모니터링하고 왜곡된 모습, 소외되는 현실을 비판해왔지만 여전히 TV는 문화다양성의 본질적 측면을 외면한 채 다양성을 가장한 노골적인 상업화에 줄을 서고 있다.

 

이처럼 문화다양성에 대한 기본적인 실천을 보이지 못하는 TV 프로그램 콘텐츠와 달리 ‘다양성’을 전면에 내걸고 있지만 결국 자본으로 편입된 사례도 있다. CATV와 위성방송 그리고 최근 가속을 내고 있는 DMB 등 미디어의 환경 변화는 기술을 잠식한 자본의 속도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다매체 다채널 시대가 도래하고 수용자들은 ‘다양한’ 콘텐츠와 채널에 접근할 수 있다는 자본의 야단법석은 그러나 CATV와 위성방송이 출범한 이후 오히려 지상파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으며 매체와 콘텐츠는 몇몇 사업자에 의해 독점되고 있는 것이 사실을 교묘히 숨긴다. 또한 표현의 자유와 콘텐츠의 다양성에관한 논의에서 수용자는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 최근 가속을 내고 있는 DMB 역시 수용자에 대한 접근을 담보로 그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자본만의 ‘다양성’ 논리에 불과하다. 주머니를 통째로 내놓은 대가로 접근의 다양성은 확대되었다고 하지만 콘텐츠와 제작과 선택을 둘러싼 본질적인 다양성은 여전히 요원하다.

문화다양성 운동의 큰 축을 이루고 있는 스크린쿼터운동 역시 자국 영화자본의 방어막이 되면서 ‘다양성’의 이중성을 드러낸 지 오래이다. 스크린쿼터운동의 산물로 한국영화는 다양한 장르와 실험이 오가며 한국영화를 문화적/산업적으로 성장시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영화시장은 스크린쿼터를 방패삼아 성장한 소수 독점 자본의 중심으로 재배치되면서 그토록 비판했던 헐리웃 시스템을 동경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또한 산업적 이해에 기반하여 우후죽순 생겨난 멀티플렉스식 유통/배급망 역시 철저히 자본의 첨병이 되고 있다. 문화다양성과 자본의 부적절한 만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국 독립영화, 예술영화 등 영화생태계의 철학과 원칙, 그리고 메시지가 자본이 인식하고 있는 ‘다양성’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 우리사회의 문화다양성 운동을 이끌었던 스크린쿼터의 현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위와 같은 미디어 진영 내의 문화다양성에 대한 상황과 그에 대한 운동진영에 대한 간략한 서술을 통해 현재 미디어의 문화다양성의 쟁점을 정리하면,

 

1) 문화다양성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프로그램콘텐츠 : 자본에 의한 문화다양성의 외면

 

2) 문화다양성을 이중적 의미로 전략화하는 자본의 정교화 : 자본에 의한 문화다양성의 호명

 

으로 볼 수 있다.

 

 

3. ‘외면’과 ‘호명’을 넘은 문화다양성의 실현

 

미디어 내의 문화다양성 실천은 자본에 의한 문화다양성의 ‘외면’과 ‘호명’의 이중적 태도에 대해 전면적인 검토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전략 구성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문화다양성에 대해 적당히 ‘외면’하고 있는 현재 지상파 방송을 비롯한 공공영역에서의 문화다양성 확대를 위하여 현 수준의 모니터링을 넘어 법적/제도적 측면에서의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콘텐츠를 통해 왜곡되거나 소외되는 계급/계층, 그리고 자본과 권력에 의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정보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Public Access권의 확보 역시 시청자참여와 수용자의 접근(기획/제작 등)의 다양성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운동으로 확대시켜야할 것이다.

 

한편 문화다양성을 자본이 ‘호명’함으로써 왜곡하는 경우는 문화다양성이 자본에 의해 새롭게 변이되는 물적 다양성으로 인해 오히려 질적 다양성을 억압하는 과정임로 인식하고 새로운 운동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그간 무수히 논의되어왔던 진부한 주제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에 대한 새로운 원칙으로 ‘감수성의 다원화’를 제기하는 바이다. 무수하게 쏟아져 나오는 매체의 ‘물리적 다양성’을 극복하고, 동일한 콘텐츠를 다른 시각으로/다른 감성으로 바라볼 수 있는 ‘화학적 다양성’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성으로 포장되지만, 다양성을 파괴하는 ‘물리적 다양성’을 배격하고 감수성의 다원화를 위한 다양한 체험과 표현, 소통이 자유로운 새로운 문화교육/영상미디어교육이 꾸준히 실험되고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4.

인간의 보편적 권리로써, 공익의 중요한 실천으로써의 문화다양성에 대한 논의는 이미 한 차례 지나간 진부한 논의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화다양성의 실질적인 확대나 실현은 요원한 상황이며, 이에 대한 움직임의 중요성은 날로 중요해지고 있다. ‘외면’과 ‘호명’으로부터 진짜 문화다양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물리적 다양성’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화 생태계의 종다양성을 지켜내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화학적 다양성’이다. 따라서 미디어 진보의 정치적/경제적 해석을 넘어 ‘문화적’인 접근으로 미디어의 다양성을 점차 확대해야 한다. 미디어의 공익성/공공성은 결국 삶의 총체적 양식으로 일상적 미디어를 실현하려는 운동이며, 문화다양성은 인간의 보편적 권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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